제목: 하나님께서 정하신 권세 Part 2
본문: 로마서 13장 1-7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은 부활 주일이다. 기독교 역사학자와 변증가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가 참이라는 가장 강력하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 역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전 15:17).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분을 믿는 자와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가져오는 데 충분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원, 즉 하나님과 그분이 의롭다 하신 자들의 화목을 더욱 확실하게 증거한다(롬 5:10).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여 영원히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 그분의 자녀가 된다.
그러면 세상에서 불러낸 무리,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은 삶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삶이 곧 영적 예배다.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의 방식이다. 복음은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요구한다. 새롭게 변화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요구한다(롬 12:1-2).
지난 시간, 우리는 로마서 13장 1-7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정치 활동을 해야 하는지 살펴봤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각 사람이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고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롬 13:1).
우리가 살펴본 대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세우신 이 땅의 모든 권세를 통해 당신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먼저 그분이 세우신 권세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그분이 자기 영광과 자기 백성의 선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믿고 평안과 확신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그런 삶이 복음에 합당한 예배자의 삶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를 인정하는 것은 곧 그 권세가 휘두르는 잘못된 권력이나 정책을 방관하고 절대로 판단하지 않으며 무조건 지지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세워진 권세를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그 권세 안에 두신 뜻을 실수 없이 주권적으로 이루실 것을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능하는지 평가할 수 있다. 역기능으로 작용하는 권세에 반대할 수도 있다. 로마서가 기록된 당시엔 거의 불가능했지만, 지금 우리에게 보장된 정치 참여를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은 심지어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활동하는 권세를 교체할 수도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치에 능동적으로 순응하고 참여하는 방식이다.
오늘은 로마서 13장 3절부터 7절까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권세를 세우시면서 어떤 역할을 그들에게 요구하시는지(3-4절,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의 순기능), 권세의 순기능에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5-7절), 마지막으로 본문의 교훈을 바탕으로 권세의 역기능에 성도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살펴보기 원한다: 1)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의 순기능, 2) 권세의 순기능에 대한 성도의 의무, 3) 교훈: 권세의 역기능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의 순기능(3-4)
먼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위에 세워진 권세를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부른다는 점이다(4절,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2번), 6절,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사역자”(διάκονος)는 종이나 하인, 교회에 세워진 일꾼(골 1:7), 집사(빌 1:1; 딤전 3:8)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6절의 “일꾼”(λειτουργός)은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히 8:2),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히 1:7).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권세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종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권세를 통해 이 땅에서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가? 권세를 세우시며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순기능이 무엇인가?
3절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절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3절과 4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을 주목하라. 바로 선과 악이다.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다스리는 자들 곧 위에 있는 권세는 악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는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선한 일에 대하여 칭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4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권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권세 아래 있는 자들에게 선을 베푼다. 그가 베푸는 선은 선을 칭찬하고 장려하며 악을 보응 하는 것이다.
권세가 가지고 있는 칼(공권력)은 공연히(아무 이유 없이) 있는 게 아니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기 위해 있다. 사도 베드로는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고 명령하면서 왕이 보낸 총독의 역할을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벧전 2:14).
정치적으로 자유주의(Libertarian)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을 빼앗아가는 권세(나라)를 위험집단으로 본다. 정부의 기능을 최소화하거나 극단적으로는 무정부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존 레논은 자유주의 사상을 이매진이라는 노래로 이렇게 표현했다.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누구도 죽이거나 죽지 않는.”
하지만 권세가 없는 세상을 현실적으로 상상해보라. 힘이 센 누군가가 당신의 집에 들어와 마음에 드는 물건을 가져가도 그것을 막아낼 권세가 없는 세상을. 비싼 승용차를 빼앗아도 처벌할 권세가 없는 세상을. 상점을 털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거나 강제로 해를 가해도 보호하거나 보응할 권세가 없는 세상을. 참으로 끔찍하지 않은가?
자유주의는 인간이 끔찍한 죄인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심각하게 간과한 나머지 하나님이 은혜로 세우신 사역자, 권세를 부정하려고 한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한다. 권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일꾼이다. 권세가 있기 때문에 사회 그리고 나라가 안전하게 보호된다. 하나님은 권세를 통해 선을 장려하고 칭찬하기 원하신다. 권세를 통해 악을 징벌하고 죄인이 악을 행하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만드신다. 공권력이 발휘되려면 많은 자원이 필요한데, 하나님의 일꾼인 권세는 6절 말씀처럼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기 위해 조세를 거둔다.
대한민국이나 미국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나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 등 권세가 가진 이념과 체제가 다르고, 역사적으로 왕정, 공화정 등 다양한 정치 형태가 있었지만, 권세는 역사와 체제를 초월하여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사역자로서 기본적으로 선을 장려하고 악을 보응 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하나님이 정하신 권세가 가진 순기능이다.
2. 권세의 순기능에 대한 성도의 의무(5-7)
그렇다면 이러한 권세의 순기능에 대하여 성도는 어떤 의무를 갖는가? 3절과 4절에 두 가지 명령이 나온다. 3절에 “선을 행하라” 그리고 4절에 “두려워하라”이다.
1) 먼저,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한다. 국가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선을 장려할 때, 하나님의 백성이 선을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물었다(벧전 3:13). 이것은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다. 위에 있는 권세는 일반적으로 선량하고 의롭게 사는 시민을 아무 이유 없이 벌하지 않는다.
권세의 처벌보다 더 강력하게 선을 행해야 하는 이유가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예수님이 왜 자신을 내어주셨는가? 바울이 디도서 2장 14절에 분명하게 밝힌 이유는 바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모든 제도와 권세 아래 열심히 주를 위해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5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5절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은 단지 권세의 진노(처벌)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 곧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주를 위하여”, 벧전 2:13), 하나님이 권세에 두신 뜻과 목적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복종하는 것이다. 권세가 장려하고 칭찬하는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라. 선행의 구체적인 모습은 7절에 기록되었다.
7절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조세는 국민이 국가에 바치는 직접세(재산세, 인두세)를 가리키고, 관세는 상품에 부과되는 세금, 간접세(판매세, 통행세)를 가리킨다. 바울은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라”고 포괄적인 명령을 하고 구체적으로 직접세와 간접세를 구분하여 명령했다. 국민으로서 국가가 요구하는 것을 빠짐없이 성실하게 하라는 의미다.
바울은 조세 제도를 적용으로 제시했지만, 베드로는 “인간의 모든 제도”에 순종하라고 명령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이 말씀에 따라 위에 있는 권세가 장려하는 선을 적극적으로 행한다면 도로교통법이나 각종 세법 등 권세가 요구하는 제도에 하나님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마지못해서, 귀찮아하면서, 어쩔 수 없이 선을 행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처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을 열심히 행하는 자들이다.
나아가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위에 있는 권세를 마땅히 두려워하고 존경하라고 명령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만 중요한 게 아니다. 위에 있는 권세를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한다. 함부로 대하거나 비방하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권세가 잘못하는 부분을 비판하더라도 기본적인 존경의 태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 세워진 권세를 고발할 때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명하셨다. 신중하라는 것이다(딤전 5:19).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회에 세우신 권세를 판단하거나 잘못을 고발할 때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선이다.
2)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악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권세가 금한 일들, 처벌하는 일들을 두려워하며 멀리해야 한다. 베드로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며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라고 말했다(벧전 3:12). 시편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라고 말한다(시 34:16).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을 행하는 자를 땅에서 처벌하시는가? 땅에 세운 권세를 통해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 권세를 두려워하고 또 그 권세를 세우신 여호와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죄를 멀리해야 한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은 단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악을 멀리해야 할 이유만 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더 강력한 동기가 있다. 잠언 8장 13절이 말하는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면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더 준법정신이 뛰어나고 악을 멀리하는 시민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꼼수를 부려가며 적절하게 타협하지 말라. ‘걸리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버려라. ‘남들 다 하는데 뭐’라는 생각을 버려라. 권세가 장려하는 선을 열심히 행하고, 권세가 처벌하는 악을 두려워하여 열심히 멀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하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영적 예배다.
3. 권세의 역기능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우리는 권세가 하나님의 사역자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세워진 일꾼이라는 것을 살펴봤다. 기본적인 권세의 기능(순기능)은 선을 장려하고 악을 처벌하는 것이다. 권세의 순기능에 그리스도인은 단지 처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권세 위에 두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생각하며 선한 양심을 가지고 더욱 열심히 선을 행하고 악을 두려워하여 멀리해야 한다.
이제 가장 어려운 부분에 도달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제기능을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선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금하고 하나님이 악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옳다고 할 때, 그것을 권세 아래 있는 자들에게 강요할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1) 먼저,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신 선악의 기준으로 권세를 평가하라. 다른 말로 하면 진영논리나 이념전쟁으로 하나님의 선악을 규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보수가 하는 것은 친기독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진보가 하는 것은 반기독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선입견을 갖지 말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말하는지 면밀히 살펴보라.
아놀드 클링은 “정치의 세 가지 언어”라는 책에서 크게 세 가지 정치적 견해를 나눴다. 진보(Progressive), 보수(Conservative), 그리고 자유(Libertarian)이다. 각 진영은 강조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보는 각도가 다르다. 자유는 앞에서 살펴봤으니 진보와 보수만 비교해보면, 보수는 사회를 지탱하는 도덕적 가치와 전통을 중시한다. 진보는 불우한 사람, 사회적 약자를 중시한다.
가령 보수는 자유와 기회의 평등이라는 가치를 중시하여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경제정책을 편다면, 진보는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약자를 더 신경 쓰는 정책을 편다. 진보가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도 각자 성향에 따라 보수나 진보를 지지할 수 있다. 각자 보는 관점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달라서 그렇다. 견해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든지, 당신이 지지하는 권세가 하나님이 선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악이라고 말할 때(혹은 그 반대) 당신은 하나님의 선악의 기준으로 일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역자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진영논리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보수가 시장의 자유와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강화하면서 막대한 자본을 가진 기업의 횡포와 비리를 눈감아주거나 함께 불의를 저지른다면 ‘경제가 살려면 어쩔 수 없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한 권세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판한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진보가 법 때문에 마음대로 낙태하지 못하는 산모를 약자로 보고 산모의 권리를 위해 낙태를 허용한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인은 동의해서는 안 된다. 2019년 한 기사에서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발표한 것에 따르면 매년 100만여 명, 하루 평균 3,000명의 아기가 낙태된다고 추정한다. 1분에 2명의 아기가 살해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무슨 권리로 죽일 수 있는가? 살인은 하나님이 명백하게 금하신 악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권세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참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의 기준대로 기능하는지 평가해야 한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라서, 내가 선호하는 정치적 성향이라서가 아니라(반대로 내가 반대하는 정당, 싫어하는 정치 성향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라.
2)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외쳐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하고 기뻐하시는 뜻을 말씀을 통해 분별했다면 강단에서, 교회에서, 때로는 밖에서 온유하고 담대하게 그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자인 권세가 권리남용하고 있다고 고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를 성 소수자로 보고 다수의 사회적 편견으로 오해받는 약자로 여겨 보호하고 인정하려는 정책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이다. 동성애는 한 번도 성경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지 않았고,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는 죄라고 명백하게 밝히셨다.
‘얼마 안 되는 성 소수자를 인정해주는 게 뭐가 그리 큰 문제인가’라고 생각하며 소극적으로 이 문제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하지만 성 정체성을 국가가 결정하는 것은 성을 가진 모든 국민에게 막대한 영향을 가져온다. 소수의 산모에게 낙태를 허용하는 것이 한국에서만 한 해 100만 명의 살인을 일으킨 것처럼, 소수의 동성애자를 인정하고 성 정체성을 마음대로 결정하게 국가가 허용하면 종국엔 다수의 나머지 국민뿐만 아니라 태어날 모든 아기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온다. 하나님이 창세에 세우신 가장 기본적인 질서, 가정을 무너뜨려 생육과 번성을 저해한다. 사회의 존속을 위협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기준을 담대하게 선포해야 한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외쳐야 한다. 교회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나눠야 한다. 때로는 밖에서 하나님의 사역자인 권세가 마땅히 장려해야 할 선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줄 필요가 있다.
다만 이 일에 지혜가 필요하다. 온유함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 창녀의 죄를 분명하게 지적하셨지만 동시에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외칠 때 그분의 은혜와 함께 외쳐야 한다. 온유함으로 겸손하게 하지만 담대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위에 있는 권세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당신이 진영논리에 빠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지지하는 정당이 추구하는 정책이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위배될 경우에도 침묵하려 할 것이다.
예수님 말씀처럼 ‘옳다’ 할 것은 ‘옳다’하고, ‘아니라’ 할 것은 ‘아니라’ 하라(마 5:37). 우리의 모든 말이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 것처럼 진중하게 나와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자기 생각에 따라 말하지 말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했다면 그것을 담대하고 온유하게 선포하라.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마 5:13-14).
3) 마지막으로 법이 허용한 강력한 정치 참여 기회로 하나님의 사역자에 더욱 부합하는 권세를 세우라. 우리는 투표를 통해 권세를 세우고 폐할 권리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불법이나 무력을 통해 세워진 권세를 무너뜨리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적법한 수단인 투표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권세를 교체할 수 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권세도 하나님의 마음에 완전히 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다스리는 그 날까지는 계속해서 우리를 실망시킬 권세, 하나님의 선악 기준대로 온전히 다스리는 데 실패하는 권세가 세워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투표를 통해 하나님의 기준에서 덜 멀어진 권세를 세울 수 있다. 조금이라도 덜 부패하고 덜 악한 권세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의 선택으로 부정과 부패를 휘두르는 권세를 세울 수도 있고, 약자를 보호하는 권세를 세울 수도 있다. 중요한 가치와 기준을 세우는 권세를 세울 수도 있고, 사회를 지탱하는 중대한 가치와 기준을 상대적으로 무시하는 권세를 세울 수도 있다. 기독교적 가치와 진리를 선포하는데 자유로운 권세를 세울 수도 있고, 법의 규제로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는 권세를 세울 수도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을 조금이라도 더 잘 수행하는(반대로 덜 역행하는) 권세를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지금 법이 허용한 투표를 통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4월 15일이 21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라고 알고 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렇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권세를 우리 위에 세우실 것이다. 자기의 일꾼이자 사역자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선을 권장하고 악을 처벌하는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다. 도구가 제멋대로 일한다 해도 그 권세를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주권적인 뜻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평안과 확신 가운데 기쁨으로 세워진 권세를 인정하고 복종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투표를 통해 하나님의 사역자에 더욱 합당한 권세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세워진 권세가 정말 주인의 뜻대로 선을 권면하고 악을 보응하는지 평가할 수 있다. 때론 목소리를 높여 담대하고 온유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외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 모든 사람 곧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했다(딤전 2:1-3).
권세를 위해 기도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다(딤전 2:3). 권세와 나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라. 기도가 가장 강력한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