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께로 돌이킨 왕
본문: 역대하34~35장
설교자: 최종혁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한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하셨고 애굽이라는 인큐베이터에서 한 민족을 키우시고 그들을 이끌어내어 왕국을 이루십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진 통일 왕국은 솔로몬의 죽음을 끝으로 둘로 나눠지고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로 분열된 왕국이 이어집니다. 그 왕들의 역사를 다룬 책이 열왕기상하와 역대상하입니다. 북이스라엘에는 선한 왕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악한 왕과 더 악한 왕이 계속 일어나 그들은 계속해서 타락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남유다에는 몇몇 선한 왕이 일어났고 그중 한 사람이 우리가 살펴볼 요시야입니다.
요시야의 삶
요시야는 매우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는 8세였습니다(왕하 22:1). 그렇게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요시야의 아버지는 아몬이었는데, 아몬은 22세에 왕위에 올랐다가 2년 후 반역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다행히 그 반역자들이 바로 숙청되고 아몬의 아들인 요시야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왕하 21:19-26).
8살, 우리 나이로는 10살 정도의 어린 아이가 처음부터 나라를 이끌어 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는 꾸준히 성장하여 제위한지 12년이 지나 그의 나이 20살이 되었을 때 요시야는 국가적인 영적 부흥 운동을 시작합니다(대하 34:3). 그 핵심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로잡는 것을 20살에 시작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뿐 아니라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영토까지 우상을 제거하고 제단을 허는 정결 작업을 진행했습니다(대하 34:3-7). 우상들을 그냥 가져다 버렸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버렸습니다. 제단을 허물고 제사장들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정결 작업이 끝나고 그가 26살이 되었을 때, 요시야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수리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망가트렸던 성전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그는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이 말은 그동안 율법서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전의 왕들이 율법서 없이 나라를 다스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했으며 선지자들은 율법서를 숨겨야 했던 것입니다. 율법서를 발견한 요시야는 율법의 말씀에 따라 행할 것을 스스로 언약을 세우고 백성들도 그렇게 하게 합니다(대하 34:29-33). 그렇게 영적 타락을 향해 가던 유다의 영적 부흥을 이끌었던 왕이 바로 요시야였습니다. 이 요시야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왕하 34:2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요시야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습니다. 정직하게 행했다는 말은 단순하게 거짓말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산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올바르게 행했다’는 의미인데,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라고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요시야가 치우치지 않고 따랐던 길은 다윗의 길이었습니다. 다윗의 길은 다윗이 한 모든 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다윗도 종종 넘어졌고, 심지어 살인과 간음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다윗의 모든 길은 다윗이 최선을 다해서 추구했던 삶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다윗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말씀해 주셨었습니다.
왕상 9:4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이것이 다윗이 추구한 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나뉘지 않고 온전하여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삶입니다. 죄인으로 죄악 된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계속해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 계속해서 말씀에 따라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는 삶입니다.
이런 요시야와 비슷한 일을 했던 사람이 그의 전에도 있었습니다. 이름도 그와 비슷한 요아스입니다.
요아스의 삶
요아스는 요시야보다 더 어린 7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역시 사연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시야는 하나님께서 예후를 통해 아합의 집을 심판하실 때 죽음을 맞습니다(대하 22:9). 그런데, 아하시야의 어머니인 아달랴(아합의 딸)는 자신의 아들이 죽자 자신이 왕의 자리에 앉기 위해 유다 집의 왕손을 모두 죽입니다. 그 학살에서 갓난아기였던 요아스는 아버지의 누이인 여호사브앗에 의해 구출되어 목숨을 건집니다(대하 22:10-12). 여호사브앗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요아스는 성전에서 숨어 지냅니다.
그 후로 7년이 지나 제사장 여호야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유일한 다윗의 자손인 요아스가 유다의 왕이 되어야 함을 주장하며 아달랴를 반역하여 일어납니다. 백성들(레위인, 이스라엘의 족장 등 포함)은 그와 함께 요아스에게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그를 왕으로 인정합니다. 아달랴는 그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고, 여호야다와 요아스는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언약을 새롭게 하고(대하 23:16)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전을 수리하는 일을 합니다(대하 24:4-14).
여기까지를 보면 요시야와 요아스는 비슷한 길을 걸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아스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좀 애매합니다.
대하 24:2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뒤에만 보면 좋은 말입니다. 요아스는 요시야처럼 정직히 행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달려있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 동안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 말은 그 기간이 아닌 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역대하 24:15-19
요아스는 그 전까지 자신이 해왔던 일을 그대로 뒤집었습니다. 모든 것을 영적 부흥 이전으로 돌려놓았습니다. 백성들이 기쁘게 낸 헌금으로 성전을 수리하고 예배를 회복했는데, 그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운 언약은 무효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경고하였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경고했을 때 그를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요아스와 요시야의 시작은 비슷합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그 나라를 하나님께로 이끌었던,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회복하려고 했던 왕입니다. 하지만 끝은 같지 않습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1. 환경이 결정적인 차이는 아니다
현재의 어떤 문제의 원인을 과거의 환경에서 찾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가 나한테 어떻게 해서, 어렸을 때 당했던 어떤 사고 때문에, 어렸을 때 친구들을 잘못 사귀어서 등등… 과거의 무엇이 현재의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언제나 결정적인 요인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요아스와 요시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요아스를 생각해 보면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나는 부모도 없이 자랐다, 말하고 걷기도 전에 생명을 구하려고 피난을 가야했다, 그런 속에서 부모처럼 나를 키워준 사람이 떠났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난 너무 지쳤고 이제는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편하게 살 거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오히려 요아스는 그런 상황 때문에 여호야다라는 좋은 영적 스승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악한 영향력 아래서 자랐을 것입니다. 요아스는 오히려 더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환경 때문에 요아스가 그런 선택을 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시야는 어떻습니까? 그야 말로 환경을 탓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몬과 할아버지 므낫세는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선조 히스기야가 애써 이뤄 놓은 영적 부흥을 모두 되돌린 사람들입니다. 아마 요시야가 발견한 율법책은 그들의 시대에 숨겨졌을 것입니다. 요아스는 왕이 되면서 바로 율법책을 받았지만(당시 왕이 되면 책임 중 하나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필사하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기까지는 그조차도 없었습니다. 환경이 차이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살아간 환경을 생각해 보면, 그 자체가 두 사람의 삶을 결정한 결정적 요인인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노력의 결과가 달랐던 것도 아니다
때로 어떤 일을 꾸준히 하는데 드러나는 결과가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쉬운 예로 선교지에 나가서 10년 동안 복음을 전했는데, 누구도 구원 받지 않고 아무도 관심이 없다면 계속해서 선교의 일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열정을 가지고 시작했던 일도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점점 지치고 그 일을 계속하기 어렵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럼, 요아스와 요시야의 개혁은 어땠을까요? 요아스는 처음 왕이 될 때부터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지도력 아래서 그들은 한 마음으로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언약을 새롭게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즐거워하며 그렇게 했습니다(대하 23:21). 성전을 보수하고 수리하는 것도 요아스의 계획이었습니다(대하 24:4). 처음에는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아달랴의 아들들이 방해했기 때문입니다(대하 24:7). 그래서 그는 한 궤를 만들어서 성전 문 밖에 두고 율법에 따라 세를 내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돈을 가져와서 궤에 넣었고 궤가 차면 그 돈으로 성전을 보수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성전은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대하 24:13). 그리고 남은 돈으로 성전의 기물을 만들고 계속해서 성전에서 번제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아스는 그가 했던 일들의 결과를 바로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요시야는 어땠을까요?
요시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도 그가 행했던 영적 개혁의 결과들을 즉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기록이 있습니다. 성전을 수리하는 중 율법책을 발견했을 때, 요시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하 34:21 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하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고 계시다는 것이 요시야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대하 34:24-25). 요시야에게는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하 34:27 내가 이곳과 그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여기까지만 보면 “그래서 진노를 거두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대하 34:28 그러므로 내가 네게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에 사신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진노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시는 것을 너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참 기운 빠지는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깨닫고 돌이키면 진노를 거두겠다고 약속해주시면 좋았을 텐데,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요아스는 애굽 왕 느고가 바벨론을 치러 가는 길에 그를 막으러 나갔다가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가 생각했던 방법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하나님은 약속대로 하나님의 재앙이 그 백성에게 내리는 것을 요아스는 보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런 말씀을 하나님께 듣는다면 어떨까요? 내가 하는 개혁이 무슨 의미가 있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며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바뀌는 것이 없다면 순종할 필요도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시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세웁니다.
대하 34:30-31 [30]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 주고 [31]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요시야는 알려진 결과에 관계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다짐하고 모든 백성들도 그렇게 하게 합니다. 노력의 결과로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이 그 삶의 결정적인 요소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요아스와 요시야의 삶을 다르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은 환경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요아스에게는 없고, 요시야에는 있었던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3. 신앙의 차이다
요아스에게 없고 요시야에게 있었던 것은 좋은 환경이나 긍정적이고 가시적인 노력의 결과물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신앙이 요시야에게는 있었고 요아스에게는 없었습니다.
요아스에게 신앙의 결과물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와 함께 있을 때 그랬습니다. 우상을 깨고 성전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참된 신앙의 결과물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의 영적 스승인 여호야다가 떠나자 곧 바로 증명됩니다. 여호야다가 떠나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모사가 되자 요아스는 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대하 24:17). 지금까지 그가 이루어낸 모든 일들을 무너뜨렸습니다. 열심히 수리해서 겨우 본래 모습을 되찾은 여호와의 전을 버렸습니다. 대신에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습니다(대하 24:18).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심지어 죽였습니다(대하 24:189-22). 이에 하나님은 적은 수의 아람 군대로 요아스를 징벌하셨습니다. 요아스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후 신하들에 의해 침상에서 죽임을 당합니다(대하 24:25).
요아스의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결론입니다. 단지 그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모든 선한 길을 버리고 악한 길을 택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봅니다. 진정한 본인의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늦느냐 이르냐의 문제이지 결국은 그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진실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가 16살의 나이에 하나님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대하 34:3 (요시야가) 아직도 어렸을 때 곧 왕위에 있은 지 팔 년에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그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준 좋은 부모님이나 여호야다 같은 좋은 영적인 스승은 없었지만, 요시야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굳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율법책이 없었던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우상을 제거하고 성전을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약간의 타협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으려는 듯, 우상을 빻고 제단을 헐고, 이방 제사장들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성전 수리 중에 율법책을 발견했을 때, 그는 율법의 말씀을 듣고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말씀의 빛이 자신을 비추자 그는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그렇게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대하 34:33).
그 절정은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유월절을 준비하고 지켰습니다(대하 35:, 4, 6, 12, 13).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대하 35:18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히스기야도 유월절을 지키고 다른 왕들도 그렇게 했지만, 이렇게 요시야처럼 정확히 말씀에 따라 정확한 때에 성대한 규모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가 율법책을 발견한 것이 그의 나이 26살의 일이었고 유월절을 지킨 것도 같은 해의 일입니다. 그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신앙에 따라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신의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 요아스와 요시야의 삶에 차이를 만든 결정적 요인입니다.
하나님께 돌이킨 왕
그런 요시야에 대한 특별한 평가가 하나 더 있습니다.
왕하 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요시야는 그 어떤 왕보다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로 돌이킨 왕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신 6:5). 그 사랑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여 좌로나 우로 치우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신 5:32). 요시야에 대한 평가를 보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에 따라 행했는데, 특별히 그는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으로 그 열매가 나타났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요시야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한 가지 답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마음이 ‘연약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직하게 끝까지 부흥을 이끈 사람인데 마음이 연약하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대하 34:27 내가 이곳과 그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왕하 22:19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요시야는 물론 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결단력을 가지고 일을 추진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약한 것이 있었는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약했습니다. 그는 율법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지 않은 것이 문제임을 알고 즉시 순종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현재의 상황이나 앞으로의 결과를 고민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것이 말씀에 약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요아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율법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여호야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야다가 떠나자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왔고 그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에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마다 그런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먹는 것에 약한 사람은 먹는 것에 쉽게 움직입니다. 애교에 약한 사람, 눈물에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월급에 약한 사람은 월급에 움직이고, 자존심에 약한 사람은 자존심에 움직입니다. 평판에 약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그것에 의해 움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 가깝기를 원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만 한없이 약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좌’하면 나도 ‘좌’하고 ‘우’하면 나도 ‘우’해야 한다. 말씀이 ‘유턴’을 말하면 나도 ‘유턴’을 해야 합니다. 요시야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말씀에 따라서 온 힘을 다해 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좌로나 우로 치우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외줄 위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넘어지는 것입니다. 자전거를 탈 때도 가만히 있으면 한쪽으로 쓰러집니다. 계속 달려야 합니다. 계속해서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삶의 균형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가 움직여야 성경적인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것에 따라 움직이면 균형이 잡힌 것 같아도 그것은 성경적인 균형이 아닙니다.
무엇에 약하십니까?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십니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것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에 마음을 움직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환경이 방해를 할 수도 있고,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어서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는 상황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온 맘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시야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나라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을 했으나 그의 생애는 짧게 끝났고 그 나라는 패망의 길로 갔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삶이 아무 의미가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짧은 생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매일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