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텅 빈 종교인가, 참된 신앙인가?
본문 : 누가복음 6장 1~11절
설교자 : 최종혁
누가복음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시작할 때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누가복음 1장은 매우 희망적이고 밝은 분위기로 시작했습니다. 시므온이 예수님에 대해 예언했던 내용이 있는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긍정적으로, 누구는 부정적으로 반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공적 사역 이후로 그런 반응들이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말씀을 듣고자 했고 이적을 보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나사렛에서 복음을 전하셨을 때, 이사야의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하시고 이방에게 구원의 복음 긍휼이 임할 것을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한 배척은 특히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대제사장들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주목해봤고 그들을 따라다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신들과 달라도 영향력이 없다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무너뜨리고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생각에서는 세리와 같은 죄인과 식사를 하고 교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교제하셨고 심지어 세리였던 레위를 자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금식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척도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들이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누구기에 이런 문제를 일으킬까 사람들은 왜 저 사람을 따를까 생각했고 늘 의심의 눈, 불신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에 대해 분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논쟁의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논쟁에서 볼 수 있는 것이 텅 빈 종교인과 참된 신앙인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 말씀처럼 새 옷과 낡은 옷의 차이,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차이입니다. 그 둘은 섞일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두 번의 안식일에 대한 논쟁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논쟁이 되는 사건과 상황이 기록되었고 바리새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해 기록되었고, 예수님은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사이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먹었습니다. 남의 것을 먹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시나요? 우리나라의 서리문화가 떠오르시나요? 주인에게 허락받고 먹는 것이 아니라 그냥 먹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죄 지은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3:24-25에서는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의 목적은 사회적으로 가난한 약자들, 이방인들, 나그네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율법은 엄격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법률로 생각하는데, 실제로 율법에는 사회적인 약자를 보호하시는 율법들이 있습니다. 출22:21에서는 그들을 압제하거나 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먹는 것에 대해서 이런 규례가 있습니다. 추수할 때 빼먹은 것은 가져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포도추수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와서 먹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밀을 추수할 때도 떨어진 이삭은 줍지 말고 가난한 자들이 와서 먹을 수 있게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율법을 읽어보면 어떤 표현들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다”가 나옵니다. 그 명령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권위의 표현이면서, 율법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의 속성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은혜가 넘치시는 분입니다. 자비와 긍휼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율법이 우리에게 나쁜 것일 리 없습니다. 우리가 율법대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의 속성을 알 수 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익합니다. 율법은 형식, 의식, 규례를 볼 때 그 근본 목적이 무엇인지 봐야 합니다. 포도원에서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는 규례가 있다면 내가 맘대로 먹어도 되겠구나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릇 대신에 큰 자루를 가져갈까, 낫이 아니라 트랙터를 가져올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먹는 사람은 주인에게 최소한 피해를 안 주는 선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들이 먹을 때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인하고 베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근본정신입니다. 그러나 율법만 가지고 말한다면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율법은 선하지만 사람이 선하지 않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숨겨 두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최대한 확대해서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 가져옵니다.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최대한 축소해서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양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나에게 손해되는 것이 싫어서 병든 것, 저는 것을 드렸습니다. 간음한 이 외에는 부부관계를 지킬 것을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이혼증서만 있으면 이혼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 기초가 되는 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근본정신에서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거기서 벗어나 있다면 어떨까요?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근본정신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안식일을 얼마나 잘못 해석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2절입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하지 못할”이라는 표현은 여기서 ‘허용되지 않은’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제자들이 율법에서 허용하지 않는 일을 했다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관점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 이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까?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9-10)” 일주일에 하루는 일하지 말고 쉬라는 것,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유의 명령은 율법적인 종교인들이 좋아하는 명령입니다. 겉으로, 눈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 할례 받는 것, 음식에 대한 것 등은 민족의 정체성처럼 여겼습니다. 그것이 전통이 되어서 철저하게 지켜왔습니다. 전통을 모아놓은 책인 미쉬나를 보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이 39가지 정도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추수하거나 타작, 키질하는 것, 음식을 만드는 것, 양털을 가공하는 것, 천을 놓고 꿰매거나 뜯는 것, 글자도 2자 이상 쓰는 것, 건물을 짓거나 부수는 것, 불을 끄거나 켜는 것, 망치질 하는 것, 물건을 옮겨놓는 것 등이 안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2천 걸음 걸어서는 안 되고 마른 무화과나무 열매보다 무거운 것을 들면 안 되고, 한 손으로 들어도 되지만 다른 손에 옮겨서는 안 됩니다. 보수적인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면 엘리베이터가 안식일 모드로 동작합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수 없습니다. 버튼을 누르는 것은 불을 켜는 것이기에 안 됩니다. 1층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고 2층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식으로 올라갑니다. 운전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안식일에 멀리 갈 일이 있으면 전날에 가서 그곳에서 잡니다. 두루마리 화장지를 쓸 수 없습니다. 천을 찢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루마리 화장지 대신 티슈를 사용합니다. 지금도 그렇게 엄격하게 지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은 최소한 두 가지에서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삭을 자른 것은 추수한 것이고, 비빈 것은 타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어서 쭉정이를 날리고 알맹이를 먹은 것은 키질한 것이고, 먹은 것은 음식을 만들어 먹은 것입니다. 최소한 2가지 이상의 율법을 어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생각했던 것은 안식일을 어겼다는 것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그렇게 해석하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너무나 멀어진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지적하십니다. 3-5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으시고 너희들이 이것을 읽지 못했느냐고 물으십니다. 너희들이 읽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사건은 다윗의 사건입니다. 다윗이 사울 때문에 도망하다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릅니다. 배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자 일반적인 빵은 없고 진설병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막 앞에 있는 상 위에 이스라엘의 지파를 상징하는 총 12개의 떡을 놓고 진설병이라고 하고 임재의 떡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 떡을 안식일마다 바꾸었습니다. 안식일마다 묵은 떡을 꺼내고 제사장들이 먹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상 말씀을 보면 다윗이 그것을 달라고 하자 제사장이 그것을 주었습니다. 너희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깨끗하다면 이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어떠한 심판도 없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잘못 했을 때 바로 죽거나 심판이 임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걸까요? 다윗도 그랬으니 우리도 그래도 된다고 하신 것일까요?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 12:5)” 안식일이라는 규례에는 예외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제사 드리는 일이 자신의 일이었는데 안식일에 쉬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의식 규례에는 예외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핵심입니다. 근본정신을 망각한 어떤 의식적인 행위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둘 사이의 우선수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 은혜, 자비가 우선순위입니다. 그것이 충돌한다면 자비와 은혜를 베푸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다윗과 그의 수하들이 배고팠을 때, 다윗에게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행하셨습니다. 자비가 의식을 지키는 것보다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무죄한 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바리새인에 대해 무죄한 자를 죄 있다 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지 않았고 유대인들이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안식일은 쉬면서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한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을 규례들로 얽매었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셨습니다. 율법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가 할 수 없다, 나에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5절)” 안식일에 주인이 예수님이시기에 해도 되고 안 되는 것은 예수님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성경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율법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율법을 다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약자를 섬길지, 겸손하게 온유하게 대할 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인 행위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하나의 명령에 수많은 세부조항을 만들고 이것을 지키면 거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의를 나누는 것입니다. 누가 더 의롭고 의롭지 않은지를 그것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6절)”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회당에 질병이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일부러 바리새인들이 그를 두고 시험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손이 말랐다고 당장 죽는 것이 아니라 지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는 바리새인의 관점은 이렇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7절)” 회당에서 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고소할까라는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회당이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잘못하면 그것을 빌미 삼아서 고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엿보고 있었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은 안식일 규례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병을 고치는 것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사가 갈리는 일, 안식일에 출산하는 일에는 의료행위가 허용되었지만 그 외에는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당장 고치지 않아도 되는 질병은 그냥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면 규례를 어기는 것이 돼 고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지금 예수님 눈앞에 병자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병자에 대한 불쌍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를 이용할 목적만이 있습니다. 그들 앞에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당연히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계서 죄를 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이 그저 어떻게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예수라는 존재를 없앨 수 있을까 그것만이 관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실까요?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8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아셨고 그들과의 논쟁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병자의 병이 위중한 것이 아니니까 다음 날에 고치시거나 그 날 고치더라도 나중에 조용히 고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들과 직접 대면하고자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9절)”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쉬운 질문입니다. 누구도 악을 행하는 것이 옳다거나 죽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옳으냐고 묻고 계시는데 2절에서 바리새인들이 썼던 표현으로 안식일에 무엇이 허용되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대답을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는데 마가는 “그들이 잠잠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답을 알았기에 잠잠했던 것입니다. 만약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맞는다고 대답한다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들의 종교 그동안 지켜왔던 규례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보다 종교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에 탄식하시고 노하셨습니다. 완악한 사람들과 대비되게도 예수님은 이 병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10절)” 손을 내밀라 하실 때 손이 회복됩니다. 만지시지 않고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다른 병자들을 고치셨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손을 얹고 치유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일을 하신 것일까요, 아닌 것일까요? 바리새인의 기준에서 생각해보십시오. 병자를 고치셨으니 일을 하셨다고 볼 수 있지만 직접 치료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기준에서도 일인가 아닌가 고소하기 애매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 손 마른 자를 고치면 고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고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그들은 모멸 당했다고 생각했고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병 고침을 받은 것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11절)” 예수님을 빨리 없애려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병자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병 고침을 받았음에도 함께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선을 행하기는커녕 죄 없는 자를 어떻게 고소할까, 생명을 살리기는커녕 어떻게 죽일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 안식일에 했던 일입니다. 어떻게 그들은 착각과 기만에 빠진 종교인이 되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마음의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분야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 것, 손 씻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것, 형식과 의식에 따라 기도하는 것을 엄격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인하는 것, 형제에게 노하는 것, 간음하는 것뿐만 아니라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에 대해 엄격히 말씀하셨고 맹세하지 말고 대신 정직하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 의식, 행동에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의 문제, 마음의 동기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이 헛된 종교와 참된 신앙의 차이입니다. 헛된 종교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갖지만, 참된 신앙은 자신의 문제를 돌아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였지만 율법의 참된 의미를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마음의 동기 없이 단지 드려지는 형식적인 제사, 위선적이 종교행위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위선적인 종교가 참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 대해 너무 하신다 싶을 정도로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자신들만 잘못 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이끌고 잘못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으로서 소경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천국 문을 닫아놓고 자신들도 못 들어가고 사람들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위선적인 율법주의자들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텅 빈 종교는 우리를 하나님께 조금도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를 절대로 하나님께 인도하지 못합니다. 착각을 주고 멸망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종교시스템을 허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바리새인들과 비슷한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동기의 문제보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도 율법주의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자인가 사람들 앞에서 어떤 모습이 보일까를 생각한다면,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도 율법주의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일을 해서 하나님께 더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면 여전히 우리 안에 율법주의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죄의 문제보다 다른 사람의 죄의 문제에 더욱 관심이 있다면 그것도 율법주의자들이 모습입니다. 헛된 종교인은 믿는 자에게도 믿지 않는 자에게도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믿지 않는 자가 이런 율법주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한다면 절대로 얻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이 자리에 그런 분이 계시다면 지금 당장 그것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율법주의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앙은 없이, 마치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할 교회를 판단과 정죄로 분열하게 합니다.
율법주의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유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그것을 나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율법주의의 반대입니다. 내 삶에서 그것을 실천하고 적용하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미가서 6장 말씀을 보시면 율법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 무엇이 참된 신앙인지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 6:6-7)” 이것이 율법주의자들의 고민입니다. 내가 어떻게 무엇을 해서 하나님 앞에 뭔가를 이뤄낼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무엇이 참된 신앙입니까?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자비와 긍휼을 행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텅 빈 종교인인지, 참된 신앙인인지 이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