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큰 기쁨
본문: 베드로전서 1:6-9
설교자: 조정의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는 1장 1,2절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받은 사도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이 편지를 받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3-5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어떤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는지, 구원을 시작하시고 지키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 구원을 성취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시를 기록했습니다.
이제 본문 말씀인 6-9절에서는 그 구원의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성도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의 마지막 부분에 “크게 기뻐하는도다”와 8절의 마지막 부분인 “기뻐하니”는 이 말씀들의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입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은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매우 크게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왜 기뻐하였고 그 기쁨의 결과는 무엇이었는지 오늘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6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하지만 원어성경에서는 “이것 안에서 크게 기뻐하는도다”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것”은 앞에서 말한 3-5절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 구원을 지키고 계시고 날마다 보호하시는 것, 그리고 장차 구원을 완전히 이루실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쁨은 강렬하고 열정적인 환희,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최고의 행복을 말합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이 누렸던 기쁨은 세상의 물질로부터 얻는 일시적인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구원의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저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참 기쁩니다. 사무실에 트리를 설치하고 캐롤송을 틀어놓으면 마음이 참 기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억할 때 기쁜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고 말했습니다. 이 소식은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우리는 이 기쁨의 소식 때문에 즐거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소식을 세상에 선포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기쁨은 주님이 오시는 날에 완전하게 될 것이고 그날 후로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안에 기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에 소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기쁨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이 누렸던 기쁨은 열정적인 환희였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기쁨은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세상에도 많은 기쁨이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자식을 낳아 기르면 기쁨이 있지만 그것도 역시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그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까? 오늘 하루 그 기쁨 가운데 즐거워하셨습니까?
소아시아 성도들은 이 구원 안에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은 우리 역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구속사역을 시작하셨고 현재 우리의 구원을 보호하고 계시며 미래에 영원히 성취하실 것을 우리 역시 알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런 열정적인 환희를 경험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구원을 받고 너무나 기뻐했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한 캠프장에서 복음을 들었는데 그때 말씀을 전하시던 선생님과 그 시간대가 기억이 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시각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 순간 강렬하고 열정적인 기쁨과 환희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쁨을 현재 우리는 왜 계속해서 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오늘은 왜 기쁘지 않을까요? 나에게 구원의 기쁨이 새롭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소아시아 성도들이 겪었던 환경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6). 우리 삶에는 여러 시험과 근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환란이나 핍박”이 앗아간다고 말하고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그것을 없앤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여러 시험으로 근심하기 때문에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내와의 갈등, 상사와의 갈등, 직장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이런 시험들을 당할 때 우리는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6절을 보면 “잠깐” 근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원히 기쁨을 누릴 것과 대조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 살면서 여러 가지 시험을 각오해야 합니다. 한 번도 주님은 우리에게 부와 명예, 평안과 안전을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하게 살려는 우리에게 사탄은 핍박을 가합니다. 그러니 이 땅을 사는 동안 더 풍요롭고 만족스러워 지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시험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근심하게 만들고 구원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려고 할 것입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은 어떻게 이런 시험 중에도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6절의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라는 구절에는 원어상으로 “if necessary(필요하다면)”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에 주어진 여러 시험은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주어진 모든 환경은 불필요하게 주어진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일어난 일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입니다. 그것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을 확실하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금광석에서 정금을 축출해낼 때 순수한 금이 나올 때까지 뜨거운 불로 단련하듯이, 우리의 믿음 역시 여러 시험을 통해서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7). 여러분은 무엇이 천국을 기다리게 만듭니까? 생명수 강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하와 행성이 기다려지십니까? 저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그날에 하나님께 꼭 받고 싶습니다.
첫째는 ‘칭찬’입니다. 주님은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부르시며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삶 가운데 어려운 환경을 허락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시키고 더 거룩하게 하여서 충성된 종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에 이런 칭찬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칭찬을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나 자신의 행복과 만족만 추구하다가 주님 앞에 서고 싶으십니까?
둘째는 ‘영광’입니다. 이것은 모호한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을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이 땅에 있을 때 매일의 삶에서 조금씩 주님을 닮고 그 형상을 따라가면 주님이 나타나실 때 완벽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의 형상을 닮으려고 열심히 달려갔을 때,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결승선에서 누리게 될 기쁨과 같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존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비슷한 말입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을 닮아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삶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도 구원의 즐거움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오는 여러 시험이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하기 위해, 나를 더 단련시켜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주님이 오시는 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여러분이 기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합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시냐고, 직장을 잃게 하냐고, 결혼할 사람을 보내지 않으시냐고, 건강이 이러냐고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온전한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잘 살고 잘 먹고 더 편히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우리의 재물, 건강, 직장에서의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 거룩한 것, 하나님으로부터 영광과 존귀과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적은 믿음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다른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나의 마음이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 소아시아 성도들이 어떻게 즐거움을 누렸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생각할 때 소아시아 성도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기도 하고 경험하기도 했으리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8). 그들 역시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경험한 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경험했을 때만 기뻐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감정적으로 느꼈을 때 기뻐하지 그렇지 않으면 그 기쁨이 이내 사라집니다. 그러나 소아시아 성도들은 그런 경험이 없었어도 기쁨을 누렸습니다.
여러분도 구원받았다면 마음 속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를 생각하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려고 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므로 우리의 마음에 그런 사랑이 생긴 것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9-10).
이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순종이라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14:21). 소아시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했습니다. 사랑은 순종의 행위로 입증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순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믿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룰 것이라고 약속하신 분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붙잡고 믿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4). 아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순종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5). 에녹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보였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7).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 사랑, 순종은 늘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늘 미래에 있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그것을 믿으면서 순종함으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있으리라 약속하신 하나님을 굳건히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사랑과 순종으로 그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수많은 고통과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미래에 있을 영광과 기쁨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구원의 즐거움으로 살고 싶으시다면 우리 앞의 증인들처럼, 예수님처럼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매일의 삶에서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여러 시험을 주실 때,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이 말하는 것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시리라 약속하신 것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자에게만 살아있는 소망이 존재합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9).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 순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영혼의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믿지 않는 친구들, 직장동료들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믿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이나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괴로워하고 낙심하는 일에 믿는 우리 역시 그렇게 반응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가난한 자 같으나 부한 자”라고 했는데 우리는 오히려 “부한 자 같으나 가난한 자처럼” “모든 것을 가진 자인데 아무것도 없는 자”처럼 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에 어떠한 환경이 주어졌을 때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아끼지 아니하신 분이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냐는 것을 아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늘 고백하며 살아야 하는데, 믿지 않는 자들처럼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나의 영혼을 보시고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요? 차갑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말씀하실 것 같았습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은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근심하게 되었지만 크게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믿음을 단련시키실 것이고 이러한 환경을 허락하신 것은 아버지로서 하신 것임을 믿었습니다.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이 부르실 것이고 의롭다하실 것이며 영화롭게 하실 것을 붙들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주어진 환경을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환경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했습니다. 그 안에서 소망을 가졌습니다. 이런 자들이 기쁨을 가진 그리스도인입니다. 삶 가운데 진정한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