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충성된 청지기가 되라
본문 : 출애굽기 20장 15절
설교자 : 최종혁
도둑질은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어떤 의미인지 모두 알 것이다. 그래도 굳이 찾아보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일”이라고 사전에는 정의되어 있다. 제 8계명에서 금하는 도둑질도 동일하다.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허가없이 취하는 것. 불법적으로 남의 소유물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 도둑질이다.
하지만 우리가 십계명을 다루면서 알게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탄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성경은 말한다(고후 11:14).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그런 사탄의 지혜로움은 죄를 포장하는 능력에서 잘 드러난다. 정말 더러운 죄를 깨끗하고 깔끔하게 포장한다.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좋아 보이게 만든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 사탄의 시도를 우리는 십계명을 배우면서 볼 수 있었다.
사춘기나 중2병이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불순종해도 괜찮은 것처럼 말한다. 아동학대라는 극단적인 죄를 이유로 자녀를 징계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기도 한다. 징계하지 않는 죄를 사랑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살인도 그렇다. 개나 고양이를 죽이는 것은 처벌 받는데,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죽이는 것은 괜찮은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인권, 개인의 자기 주도권 같은 것이 포장지입니다. 결혼 서약을 지키는 것은 순진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일로 치부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죄가 아니고 그 기준을 버리면 훨씬 나은 삶이 있다고 사탄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사람들은 그를 따르고 있다.
오늘 우리가 얘기하는 도둑질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도둑질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우리가 정당화하고 잘 포장한 것들을 벗겨내면 이 명령의 정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은 십계명 제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이 전제하는 것, 의미하는 것, 금지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자.
명령이 전제하는 것
도둑질도 범위를 넓히면 사람의 평판을 도둑질 한다거나 하는 얘기들도 할 수 있지만, 이 명령 자체는 물질적인 소유, 즉 재물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재물(소유)과 관련된 영역으로 한정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다른 사람의 재물을 도둑질 하지 말라는 명령에는 크게 두 가지 전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첫번째 전제는 사유 재산이다. 나의 것과 남의 것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둑질은 성립되지 않는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은 개인이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에 둔 명령이고 성경을 그것을 정죄하지 않는다. 단순히 정죄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유 재산을 보호한다.
출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소나 양은 농경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자산이다. 그것을 도둑질 했을 때 그에 대한 형벌은 그것을 돌려놓는 것인데, 그대로가 아니라 훨씬 많이 배상하게 되어 있다. 즉, 이렇게 해서 남의 것을 훔치지 못하게 한 것이고 그렇게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출 22:2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이 말씀은 전에 살인에 대해서 말할 때 정당방위를 말하고 있다고 애기했었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지킬 수 있게 법으로 규정을 한 것이다. 물론 3절을 보면 정당방위를 넘어선 행동은 처벌을 받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적극적으로 지킬 수 있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출 22:5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이건 좀 더 지능적인 도둑질이다. 자기가 직접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은 아니지만,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고 내가 이익을 취했다는 면에서 도둑질이다. 그래서 이 경우도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을 해야했다. 소가 풀을 뜯다보면 옆 집 농장까지 갈수도 있는건데, 너무 야박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율법에서 종종 언급되지만 가축에 대한 책임은 주인에게 있고 따라서 주인은 가축이 남의 밭에 들어가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그만큼 하나님은 사유 재산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보셨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은 의도적으로 남의 밭에서 풀을 뜯게 한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출 22:6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댕겨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밭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할지니라
여기서는 불이 댕겨(옮겨 붙어서) 낟가리(추수한 곡식)나 거두지 못한 곡식 혹은 밭을 태우면, 불을 놓은 사람이 그 책임을 져야할 것을 말한다. 이웃의 곡식을 태우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없을지라도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해 배상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유 재산을 보호하는 명령이다.
7절 이하의 말씀은 남의 돈, 물건, 가축 등을 빌렸거나 잠시 맡게 되었는데, 그것을 도둑 맞거나 잃어 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규정들이다. 이 규정들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소유를 내가 빼앗지 말아야 하고, 그것을 내가 임시로 맡았을 때는 소중히 지키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임을 이 율법들은 말하고 있다. 개인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보장해주는 규정들이다.
이런 율법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회법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분명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는 것을 경제의 근간으로 보신 것을 알 수 있다. 율법을 보면 오늘날의 복지에 해당되는 말씀도 많다. 하지만 모든 사회 구성원이 공동의 재산을 가지고 절대적 평등을 이루며 사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각자의 재산을 가지고 부족한 자들을 도우며 사는 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경제관에 입각한 사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초대 교회에서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기록은(행 4:32) 언뜻 보면 말 그대로 공동소유의 개념이 적용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도들 각자가 자발적으로 자기의 소유의 일부를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왔고 사도들은 그것을 필요에 따라, 특히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사용했다.
잘 알려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헌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받았는데 이유는 다 팔지 않아서가 아니라 속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베드로는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라고 말했다(행 5:4). 여전히 그 때도 사유 재산은 사유 재산으로 인정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유 재산을 인정하시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보호하며 개인이 잘 사용할 것을 원하셨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런 원리로 다스리기 원하신다는 것은 경제를 벗어나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다양하게 창조하셨다. 겉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격도 다 다르다. 능력에도 차이가 있다. 지적인 능력, 육체적인 능력, 정서적인 능력 등 모든 면에서 우리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똑같이 사람을 창조할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하셨을까? 아니다. 하나님은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다양하게 창조하셨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던 것처럼, 좀 더 큰 범주에서 모든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신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것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가진 것들을 나누는 것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모두가 처음부터 똑같이 가지고 있으면 나눌 수 없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신 것이다.
죄는 이런 창조의 질서를 깨뜨렸다. 차이는 곧 힘이 되었다. 육체적인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은 그것을 힘으로 삼아 다른 사람을 억압했다. 지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마찬가지다. 돈이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부자를 악으로 보고 가난한 자를 선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죄인인 이상 사람은 무엇이든 자신이 가진 것을 통해 자기 유익을 추구한다. 절대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아도, 상대보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가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힘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 죄인의 성향이다. 그것이 가져온 악영향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부자는 부자대로 죄를 저지르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대로 죄를 저지른다.
문제는 차이가 아니다. 차이를 죄악되게 이용하는 것이 문제다. 다시 경제로 돌아와서, 사유 재산의 차이는 악이 아니다. 그것을 악하게 사용하려는 마음과 행함이 악이다. 하나님은 사유 재산을 지키게 하시고 그것을 우리가 선하게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제 8계명의 첫째 전제다.
둘째 전제는 좀 더 근원적이다. 바로 우리 것이 우리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명령이란 권위가 있어야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그런 명령을 하실 수 있는 권위가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주인이시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 1:26-28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피조물들을 사람에게 주신 것이다. 일부는 이 말씀을 근거로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틀린 말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기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라는 말의 의미가 소유권을 완전히 이전한 것이라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성경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성경은 여전히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라고 말한다.
시 24: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 50: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고전 10: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사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소유권자라는 말씀은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서 모든 것들을 주셨다는 것은 소유권의 이전이 아니라 위임 혹은 위탁이라고 봐야한다. 여전히 모든 것의 소유주는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관리하고 돌볼 책임을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구체적인 임무도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는 것”이었다(창 2:15).
그래서 우리의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인의 뜻에 따라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위탁받은 청지기이다. 집사다. 관리자이지 소유주가 아니다. 사유 재산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다.
명령이 의미하는 것
앞서 언급한 두 전제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들 각자에게 뜻을 가지고 필요한 것들 것 맡기셨다. 그 중 일부가 재물이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주인이신 하나님께 가장 이익이 되도록 맡겨주신 재물을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다른 청지기에게 맡긴 것을 빼앗지 말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분배는 하나님의 몫이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그 뜻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을 주신다. 그것을 빼앗는 것은 주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빼앗긴 자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혹은 하기 어렵게 만드는 일이 된다. 해를 가한다라는 것이다. 도둑질 하나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현실이 그렇다. 재물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예) 미국에서 공부할 때 카드 사기를 당했던 적이 있다. 아마 주유소에서 카드를 사용할 때 그 정보를 복사해서 가짜 카드를 만들었던 것 같다. 아침에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엉뚱한 곳에서 카드가 사용되었다는 연락이 왔고 부랴부랴 통장을 확인해보니 이미 한참 마이너스가 되어 있었다. 은행에서 잘 해결해줘서 빠져나간 돈은 다시 돌려받기는 했지만, 순간 눈 앞이 캄캄해졌던 경험이 있다. 그 돈이 없으면 학교나 교회에 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먹을 것에도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빼앗는 사람에게는 큰 이득이 아닐 수 있지만 빼앗긴 사람에게는 전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도둑질은 상대방에게 분명한 손해를 끼친다. 음식을 훔치면 그 사람을 배고프게 만들고, 가축을 훔치면 농경을 방해한다. 옷을 훔치면 추위나 더위로 고통 받게 한다. 무엇이든 누군가의 소유를 훔치는 것은 결국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살아가기 어렵게 혹은 불가능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서 빼앗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의미도 된다. 하나님은 주권적 섭리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셨고 계속해서 주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묘사한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필요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더하실 것을 말슴하셨다. 도둑질은 이것을 믿지 않는 것이고, 이것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나도 저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나에겐 저것이 지금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지 않으셨을거야”라고는 잘 생각하지 못한다. 내가 지금 가지고 싶으니까 할 수만 있으면 가지려고 한다. 조금 뒤에 다루겠지만, 눈에 보이는 도둑질은 하지 못하지만 보이지 않는 도둑질은 그래서 하게 되는 것이다. 만족하지 못하는 탐심과 믿지 못하는 불신의 결과가 도둑질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그대로 가지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고 무언가를 더 얻으려고 하는 것은 다 도둑질이냐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면서 주셨던 명령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 땅의 것들을 다스리라는 것이었다. 에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생산성있게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십계명의 제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의 가장 좋은 말씀 풀이는 에베소서 4:28일 것이다.
엡 4: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이렇게 해야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주신 것들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청지기로서 우리가 주신 것에 만족하며 그것으로 충성스럽게 일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을 할 수 있기를 원하신다. 가진 것의 차이는 의도된 것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 남의 것을 빼앗는 도둑질로 이런 일을 할 수는 없다. 충성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이것에 제 8계명의 의미다.
명령이 금지하는 것
이 명령이 금지하는 것은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어떻게 정리를 해야할까 고민을 하다가 포기하고, 그냥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사실 기본적으로 도둑질은 어떤 문화나 사회에서도 죄로 생각한다. 대상에게 명백한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제8계명도 모두가 인정하는 분명한 절도, 강도, 납치, 횡령, 사기 등을 모두 금지한다.
최근에는 디지털화된 무형의 물건들이 많아 그런 것에 대해서는 도둑질에 대한 개념이 모호해지거나 약해진 면도 있는데, 이런 무형의 물건도 분명 가치가 있는 것들로서 훔쳐서는 안된다. 요즘은 그런 것들이 “저작권”이라는 것을 통해 가치를 인정 받는다. 사람이 만든 법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누군가가 노력을 통해 만들어낸 것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측면에서는 좋은 것이고 우리도 그런 면에서의 가치 기준을 바꿀 필요가 있다.
디지털화 된 물건들은 복제가 쉽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훔친다”는 생각이 잘 안든다. 내가 가져간다고 해서 원래 그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빼앗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로 책을 누가 훔쳐가면 나는 그 책을 빼앗기는 것이지만, PDF로 만들어진 책은 누가 복사해서 가져가도 나는 여전히 그 파일을 가지고 있다. 그럼, 이것은 훔친게 아닐까?
사실 오늘날 사회가 복잡해지고 서로 얽힌 것이 많아지면서 판단이 어려워진 것들이 많다. 지금 예로 든 PDF 책을 복사한 경우는 그 파일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서 내가 훔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파일을 판매한 사람에게서 훔친 것으로 봐야 한다. 내가 PDF 책을 구매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구매해야했기 때문이다. 판매자에게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얻어야할 PDF 책을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얻었다면 그것은 명백한 절도에 해당된다.
그래서 디지털화된 무언가를 구매한다면 개념 자체를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디지털 구매는 물건 자체를 내가 소유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리는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는 능력에 관계없이 판매자가 정해준다.
예) 어떻게 하다보니까 어버지와 내가 차를 바꿔서 타고 있다. 차의 소유자와 사용자가 다른 상황이다. 근데 꽤 오래 타나보니 이제는 진짜 누구 차인지도 헤깔린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아버지의 차를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는 없다. 차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만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권리를 행사하면 안된다. 디지털 물건들도 마찬가지다. 판매자가 정한 권리 이상으로 무언가를 누리는 것은 할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마느냐하는 문제인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부분은 시장 거래와 관련된 부분이다.
신 25:13-15 13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14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15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거래에 있어 공정할 것을 율법은 말하고 있다. 잠언에서도 속이는 저울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두 차례나 말한다(잠 11:1; 20:23). 공정해야 한다는 것은 이익을 봐서는 안된다는 말은 아니다. 정당한 이익을 얻는 것이 거래의 핵심이다. 다만, 그 이익을 상대를 속이는 것으로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도둑질이다.
예) 의사를 생각해 보자. 요즘은 정보가 많이 공개되어서 다들 왠만한 의사보다 나은 지식이 있는 듯이 스스로 생각하지만, 사실 의학은 고도로 전문화된 분야로서 병원에 가면 절대적으로 의사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만큼 모르기 때문이다. 최종 결정은 내가 하겠지만, 의사가 준 정보를 토대로 결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의사가 환자의 그런 무지를 악용해서 이익을 취한다면 그것은 도둑질이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치료를 권하거나 시술을 권하는 경우가 그렇다. 비슷하게 자동차 정비소에서 당장에 불필요한 부품을 교체라하고 하는 것도 그렇다.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 악한 범죄인 것처럼, 상대방이 잘 모르는 영역이라고 해서 그것을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도 악한 범죄다.
예) 좋지 않은 것을 좋다고 속여서 혹은 본래 이상으로 과대 포장해서 물건을 판매한다면 그것도 도둑질이다. 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면에서 조심해야 한다. 효능이 검증되지 않는 건강 보조식품 같은 것을 마치 실험을 통해 입증된 효능이 있는 것처럼 말해서는 안된다. 차를 파는 사람이 객관적으로 차를 소개하지 않고 팔아야할 차가 있어서 마치 그 차가 세계 최고의 차인 것처럼 소개하는 것도 속이는 저울이다.
예) 아마 요즘 중고거래 해보신 분들도 많을 것이다. 중고 거래에도 이런 속이는 저울의 유혹이 있다.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팔고 싶은 마음에 알고 있는 결함을 말하지 않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도 이 계명을 기억해야 한다. 도둑질하지 말라.
앞에 몇 가지 예로 든 것들은 어쩌면 반대로 하는 것이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치아 하나만 치료하면 될 것은 두개 치료하게 하면 더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타이어만 교체하면 되는데 휠도 교체하게 하고 브레이크 패드도 교체하게 하면 유능한 직원이 되는 것이다. 특히나 영업직 같은 경우 실적에 더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성도가 대상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불신자를 대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괜찮을까? 절대 아니다.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되어주어야할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청성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우선순위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부분은 일과 관련된 부분이다. 직장에는 두 부류의 도둑들이 공존하고 있다. 월급 도둑과 일 도둑이다. 일은 적게 하고 돈은 많이 타가려는 도둑과 일은 많이 시키고 돈은 적게 주려는 도둑이다. 믿는 자들은 어느 쪽의 도둑도 되어서는 안된다.
골 3:22-23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직원의 입장이라면 성실하게 일하고 그에 합당한 급여를 받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해야 한다. 마땅히 해야할 일을 눈속임으로 하지 않으면서 동일한 임금을 받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 여기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고용주라면 노동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특히 야고보는 그렇게 하지 않는 부한 자들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기도 했다.
약 5:4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이런 기준을 따르는 것이 어쩌면 세상의 기준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다.
추가로 개인 경제 생활과 관련된 몇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채무와 관련해서, 빚 지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갚지 않는 것은 도둑질이다. 거기에 더해서 갚을 계획이 없이 돈을 빌리는 것도 그 자체로 도둑질이다. 예를 들어 대책없이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것도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도박은 제 8계명과 관련이 없을까? 관련있다. 도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확률 게임이다. 노력없이 일확천금을 노리는 수단이다. 대부분이 잃고 일부만 얻는다. 당사자들의 합의가 있다고 해도, 청지기로서 합당한 삶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은 청지기들이 자기 손으로 일하면서 수고의 열매를 누리고 선한 일을 행하길 원하신다. 도박에는 열매가 없다. 생산된 것이 없다. 도박에는 확률에 근거한 부의 재분배만 있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로또를 비롯한 복권도 마찬가지다. 이런 합의된 도둑질에 참여해서는 안된다.
주식을 비롯한 투자의 경우는 도박과는 다르다. 그 자체로서 죄라고 할 수 없다. 물론 그 안에 위험한 요소가 있어서 조심해야할 부분들이 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서 가진 재물을 지혜롭게 또 거룩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부분도 꼭 기억해야 한다. 요즘 사람들이 주식을 하는 모습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주식에 모든 것을 걸고 그것에 의해 그날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돈임을 기억하고 청지기로서 재물을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다.
기타 도둑질들
– 일을 하지 않고 남의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의존하고 사는 경우
– 마땅히 내야할 세금을 내지 않는 것
– 거짓으로 국가의 돈을 타내는 것. 우리나라도 점점 사회 복지가 늘어나면서 여러 지원금들이 생겨난다. 장애인들을 지원하고, 청년을 지원하고, 농어민을 지원하고, 실업자를 지원하는 등 많은 복지 혜택이 있다. 이런 것들을 거짓으로 신고하여 돈을 타내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도둑질이다.
이 외에도 오늘날의 복잡 다양한 사회는 정말 각양각색의 도둑질이 있다. “다들 그렇게 한다더라. 이런건 그냥 이렇게 하는거야.”라는 말들에 쉽게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도둑질을 잘못하면 감옥에 가지만 도둑질을 잘 하면 능력으로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는 사회다. 어떤 도둑질이든 우리는 버려야 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 충성된 청지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도전
우리는 왜 도둑질을 할까? 죄악된 우리는 기본적으로 모든 영역에 있어 나의 이익을 추구한다. 재물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더 가지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한 노력은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불로소득을 원하는 것이고 그런 갈망과 탐심이 앞서 말한 그리고 이루 다 말하지 못한 다양한 모습의 도둑질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둑질은 내가 사랑해야할 이웃에게 해를 가하고 내가 사랑해야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소유로 살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의 좋은 청지기가 되기를 원하신다. 다른 청지기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일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살아가기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재물을 이 땅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눠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게 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제 8계명이 무너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더 쉽지 않다. 경제적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이렇게 말했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삭개오는 진짜 부자였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사실 핵심은 그게 아니다. 삭개오는 지금 자기 삶을 바로 잡고 있는 것이다. 도둑질한 것은 돌려놓고, 자신에게 주신 많은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누겠다고 말한다. 엄청난 경제적 손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었고 그 손실을 감수하고서도 따를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도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필요하다면 이런 경제적 손해를 감수해야한다. 내 삶에 혹시 충성스럽지 못한 청지기의 모습이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은 없는지, 이웃의 것을 교묘한 수단으로 빼앗지는 않는지 살펴봐야 한다. 도둑질로 누리고 있는 부가 있지 않은지 봐야 한다. 궁극적으로 나눔으로 하늘에 재물을 쌓고 있는지 아니면 욺켜쥠으로 이 땅에 재물을 쌓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결국 나의 재물이 어디에 쌓이고 있는지가 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것이다. 하나님의 청지기라면 하늘에 재물을 쌓아야 함을 잊지 말자. 그렇게 하여 우리 모두가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 주인께 칭찬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