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성경의 그 어떤 말씀보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이 요한복음 3:16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구원하셨다는 진리를 말하지만, 이 말씀은 그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창조주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2015년 1월 3일부터 9일까지 ‘무신론’에 대한 글을 <Grace to Korea>라는 홈페이지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존 맥아더 목사님의 설교와 글, 책 등을 소개하는 웹사이트가 <Grace to you>인데, 이 영어 컨텐츠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한국인들에게 전하는 웹사이트입니다. 주로 존 맥아더 목사님의 글이 번역되어서 올라오는데 그 번역을 하는 일과 칼럼 등을 올리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2015년 새해부터는 <오늘의 말씀>이라고 해서 매일 묵상하는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 웹사이트의 영향력은 페이스북 페이지에 ‘좋아요’가 1630번 있을 정도입니다. 이번에 ‘무신론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그 ‘좋아요’의 수는 110개가 늘어났습니다. 이 활동을 통해 유평교회를 찾아오겠다고 연락을 해오는 사람들도 있고, 미국의 성도들도 그레이스 교회에 방문하겠다고 운영자에게 메일과 메시지로 연락을 해오기도 합니다. 이 웹사이트의 글 하나가 거의 5~6천명에게 전달되고, 최근 ‘십일조’에 관련된 글은 2만 3천 여 명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편집해서 웹페이지에 올린 메시지가 인터넷 상에 있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그 사역 중에 일어났던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믿을 수 없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6차례에 걸쳐서 올린 글입니다. 그레이스 교회의 필 존슨 목사님이 로마서 1장 19-20절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우리 눈에 보이는 만물에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드러나 있고,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사람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다는 로마서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한 것입니다. 몇 가지 하이라이트가 될 만한 글을 6부작에서 각각 인용하여 말씀드리고, 그 글에 대해 인터넷 상에서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왜 왔는지 알지 못한다면 논리적이고, 포괄적이고, 지적으로 삶과 실제를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만약 당신이 가장 기본적인 지성이 어디서 왔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른다면 당신은 어떠한 것에 대해서 실제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좀 어려운 듯한 글이지만 무신론자들과 대화를 하려면 이러한 논리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더하기 1은 2입니다. 어렵지 않은 이 계산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각각 ‘1’이라는 개념과 ‘2’라는 개념, ‘더하기’라는 개념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무엇을 ‘안다’라는 개념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생길 수 있을까요? 무신론자들은 최초의 지적인 존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우연적으로 생겨났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근원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말하길, ‘왜’라는 질문을 9번만 하면 모든 사람의 지식의 바닥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이 지식의 근원이 되는 존재가 분명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그러한 존재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을 확실히 안다고 상상하거나 어떤 지식의 필요한 기반 없이 어떠한 것을 객관적인 진리라고 선포하는 것은 거만한 것이고 겸손하지 못한 것이다” 여러분이 보기에 제가 키가 큽니까?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자’라는 것이 없다면 키가 큰 지 작은 지 알기 어렵습니다. 오직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만 가능합니다. 이 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장신이라면 저는 단신일 것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크고 작은 것은 상대적인 원리일 뿐입니다. 최초의 누군가가 우주를 짓고 질서와 법칙과 원리를 세우지 않았다면, 그래서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면 절대적인 진리, 기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도, 도덕도, 옳고 그름도 그저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르는 상대적인 가치일 뿐입니다.
“아무리 많은 과학자가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학문적으로 뛰어난 천재들이 이 입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크고 역동적인, 질서 있는 우주가 지적인 건축가와 특별한 상관없이 무에서 저절로 생겼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놀라운 우주가 저절로 생겨났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네모난 삼각형이 있습니까. 결혼한 독신남자가 있습니까. 본질적으로 결혼을 했고 본질적으로 독신인 사람은 없습니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었다’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처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장 혐오스럽게 생긴 곤충을 현미경으로 자세히 관찰한다면 그 곤충의 복잡함과 독창성과 그리고 그 곤충이 설계된 방법의 아름다움을 무시할 수 없다. 흔한 집에 있는 파리의 눈은 인간 최고의 발명품보다 수천 배나 더 놀랍다” 여러분은 곤충을 자세히 관찰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복잡한 조직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스마트폰과 같은 복잡한 기계는 시간을 충분히 들인다면 어떤 기능인지, 어떤 부품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동물, 인간, 곤충 등의 자연 만물들은 인간이 만든 어떤 것보다 훌륭한 설계가 들어있습니다. 그것들을 만든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수많은 피조물들이 그 증거가 되어 대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그 기본적인 지식을 두셨다. 사람의 마음에 기본적인 지식이 있으며 그 지식이 하나님을 인식하게 한다. 물론, 이 지식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진리는 아니지만, 이 지식은 옳고 그름, 선과 악, 정의와 부당함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지식이다” 동물들 중에 너무 많이 먹어서 괴로운 동물이 있습니까? 다른 동네에 개보다 빨리 달리고 싶어서 연습하는 개는 없습니다. 내 친구의 밥을 빼앗아 먹었다고 괴로워서 잠을 못자는 개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압니다. 무엇을 잘못했을 때 그것에 대한 죄책감을 감정으로 느낍니다. 잘못된 것에서 옳은 것을 선택하고 노력하려는 의지도 있습니다. 지식, 감정, 의지를 인격(지정의)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에게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온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면 왜 사람에게만 인격이 존재하고 동물에게는 존재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압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에너지가 아니라 인격체입니다. 지식, 감정, 의지가 있으신, 인격이 있으신 분으로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닮은 인격을 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무신론은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신론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물을 통해 알 수 있고, 내 안에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존재하는데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없다고 말할까요?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그 어리석음은 죄의 저주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롬 1:21,22).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글을 웹사이트에 올렸습니다. 이 글에 대해 무신론자들의 극심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여기 그들의 답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진화를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쓴 글입니다. 진화는 관찰되는 사실이며 이미 증명된 부분입니다. 증거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화가 ‘가정’ ‘가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현상적으로 밝혀진 것을 무시하는 현실 부정과 다를 게 없는 말입니다. 진화는 지금도 일어나는 사실이며 이는 무신론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오늘날 과학적인 증거들이 진화를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진리가 아닌 창조가, 시간이 갈수록 진리에 가까워지는 진화론에게 이길리가요”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고, 시간이 갈수록 진화가 진리임이 드러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단지 기원전 사람들의 비합리적인 책을 통해 그것을 믿는 건가요? 그것을 믿는다면 지금까지 밝혀졌고 앞으로도 밝혀질 상반되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며 사탄의 것으로 치부할건가요?” “성경은 결국 인간이 쓴 거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 자신의 믿음에 따라 주관적인 관점으로 쓰인건데 그것을 최종권위이자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에서부터 오류가 있지 않나요” “필사자의 입맛에 맞춰 이것저것 수정을 거친 성경이 오류가 없는 책이라고요? 이상하군요 성경은 당대에 유행한 철학에 기반해 많은 수정을 거쳤습니다. 수많은 필사자의 의견이 들어갔는데 그게 어떻게 진리의 책이 되는건가요?” “저는 성경은 절대무오한 진리의 서적이 아닌, 신을 그 당시 사람에게 맞춰 알리는 상대적인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여태 성경을 근거로 진화 및 성적소수자(동성연애자) 등등을 비난한 기독교인들은 충분히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즉 기독교인들도 이제 시대에 맞춰서 사고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초기 성경을 완성시킬 때처럼 여러 사람들이 충분히 토의를 거치고 수정하는 등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들은 성경이 객관적인 사실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수천 년 전에 쓰여져 그 당시 문화와 역사에 고정된 성경을, 발전하는 21세기 현대에 적용하려고 하는가, 성경은 유행에 뒤쳐진 책이라고 공격합니다.
우리에게 믿음만 있다면 이들의 공격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심각합니다. 여러분의 손자, 여러분의 자녀가 읽고 있는 책,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것들은 진화가 맞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복음반에서 공부하는 한 사람은 지난 시절 교회를 떠났던 이유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상반되기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아이가 여러분을 찾아와서 이것에 대해 묻는다면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있다고 배웠는데 학교에서 진화로 세상이 이뤄졌다고 배운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것에 대해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동성애가 왜 죄냐’, ‘살인이 왜 죄냐’고 물어오는 사람들, ‘지금의 사회, 문화와 많이 다른데 이 말씀의 원리를 왜 따라야 하냐’는 물음에 우리는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신론과 성경은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상의 창조가 우연이라는 무신론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서 우연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연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고 주관자이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계시다면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반대로 우연적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없는 것입니다. 무신론이 맞다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우리가 왜 세상에 생겨났는지 알 수 없으며 절대적인 선과 도덕의 기준, 모든 가치의 기준이 무의미해집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그저 종족을 보존시키기 위한 본능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잇고 동정심을 느끼며 인내하고 용서하는 것은 그 가치를 만드신 분이 있어야 의미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이 있지만 본능을 통제하는 존재입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이같이 말했습니다. 자신을 창조과학 혐오자라고 밝혔는데, 창조와 진화의 타협점을 찾으려는 사람입니다. “나같은 진화적 유신론자의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진화를 비롯한 과학을 공격하지 마세요. 진화는 이미 사실로 밝혀진지 오래이며, 이는 다 쌓으면 지구 몇 바퀴 돌 수 있는 수의 증거와, 관찰된 현상들에 의해서 뒷받침됩니다. 창조과학과 같은 거짓말쟁이들을 몰아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신앙과 과학이 함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전제하는 진화론을 따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있다는 유신론을 믿고 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신이 ‘진화를 이용해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의 증거들도 사실이고 동시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제하셨으니 하나님도 살아계신 것입니다. 문제가 없어 보입니까? 적절하다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이들은 결국 과학에는 문제가 없고 성경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빛과 해와 달과 별을, 하루 하루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화를 받아들인 유신론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하루’가 실제로 하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하루는 수천 억년이 흐른 시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섯 째 날 창조된 아담과 하와는 하루 하루가 지날 때 수천 억 살이 되었을 텐데 그는 930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또 930이라는 숫자도 상징적인 숫자라고 말할 지 모릅니다. 그들은 또한 아담 역시 실존했던 사람이 아닌 최초의 인류라고 가르칩니다. 그 역시 상징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논리의 배경은 무엇일까요? 과학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성경과 다른 것이 있다면 성경을 과감하게 왜곡하면서까지 과학에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권위의 문제입니다.
저의 이러한 설명에 대해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러면 성경의 모든 부분을 믿는다는 겁니까?” 네, 우리는 이 성경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최초의 ‘무’의 상태에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날아가는 새도 참새 한 마리도,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분은 만물의 주인이시고 주관자이십니다(히 2:10; 엡 1:11). 우리는 이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원천, 지식의 원천, 또한 생명의 원천도 하나님이십니다(요 1:4).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것인가’와 ‘세상이 말하는 것에 따를 것인가’하는 권위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진화론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논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십니까? 진화가 아닌 창조의 모습을 진리라고 믿고 계십니까? 만물의 창조주요, 공급자요, 주인과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모든 내용을 같은 권위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화론을 비웃으면서 성경을 선택하셨다면 이제 성경의 다른 말씀들도 따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이것은 괜찮고 문화적으로 좋다’고 말해도,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 권위에 굴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 있으라”고 하셨을 때 암흑 속에서 빛이 있었고, “해와 별이 있으라”고 했을 때 그러한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을 말씀의 힘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 정도의 권위가 있습니다. 질병이 순종하고 귀신들이 순종했으며, 죽음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죽은 자를 내어주었습니다. 매일 아침 성경을 펴서 읽을 때 ‘이 말씀은 지키고 이 말씀은 지키지 않아도 돼’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제안’이 아닙니다. 이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셨고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새해에는 성도님들의 삶에서 말씀에 대한 권위를 바로잡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대하듯이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십시오. 마치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을 때 성도들이 일어서서 하나님을 경배했던 것처럼,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는 히브리서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순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