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
본문 : 누가복음 2장 40~52절
설교자 : 조정의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

 

2장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성장기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누가는 세례 요한의 탄생부터 성장까지 5가지 항목을 차례로 기술했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성장까지의 다섯 항목을 세례 요한의 그것과 서로 비교 대조하며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섯 항목은 ‘탄생’, ‘주위 사람들의 반응’, ‘할례를 받고 이름을 예언된 대로 지은 것’, ‘예언의 찬송’, 그리고 ‘성장기’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1:80)라고 기록했던 누가는, 예수님에 대해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2:40)라고 기록합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기록에서 추가된 것이 바로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동일하게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라갔는데, 특별히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성령의 은사를 말할 때 ‘은사’와 같은 단어입니다. 곧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예수님과 함께 했다는 표현입니다.

 이어지는 41-51절에서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얼마나 충만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일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에 대해 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은 아이를 키우면서 아마도 ‘이 아이가 메시야가 맞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더디게 자라나는 모습에 그런 의구심을 가졌을 것도 같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이 말씀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은 30살 이후 공생애 기간부터 메시야였지 그 전에는 아니었다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예수님의 유년기에 대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많은 이단들이 있었는데, 어떤 이들은 눅 3:22에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들어 그 순간에 인간이었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어릴 때는 그저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또 이와는 반대로 외경에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흙으로 새를 만들어 날렸고, 손가락으로 나귀와 양을 가리키면 그 짐승들이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또 흙으로 장난을 치다가 방해한 친구를 저주하며 죽게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예수님이 죄가 없었다고 말합니다(히 4:15; 벧전 2:22 고후 5:21). 또 그분께 지혜가 충만했다는 것도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막 6:2).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은 공생애 전 어린 시절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질문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과연 아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메시야의 임무도 알고 있었을까요? 마지막으로, 그러한 임무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본문에 나타난 일련의 사건들을 살펴보면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41).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명절입니다(출 23:17; 34:22-23; 민 16:16). 로마 전역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 중 남자들이 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굳이 가족이 다 함께 갈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한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부모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던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독실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친척들과 가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140-150킬로의 여정이었습니다. 당시는 강도들이 많아 여럿이 함께 이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42-43).

유대인들은 13살부터 성인으로 인정하는데 당시 예수님의 나이는 12살이니 그 이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절기의 관례를 따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유월절 이후에는 7일 동안 무교병을 먹는 절기가 있었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을 합쳐서 유월절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온 사람들은 이 긴 기간을 머물 장소를 먼저 구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짐을 풀고 머물 장소를 구한 뒤 희생 제사를 드릴 제물을 구하러 다닐 것입니다.

 유월절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있던 애굽에서 탈출할 때 하나님이 그곳에 내리신 몇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과 관련된 것입니다. 마지막 재앙은 모든 장자가 죽는 재앙이었는데 희생 제물의 피가 문에 발라진 집은 심판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유월절=Passover), 그 집 안에서 백성들은 희생제물로 잡은 양과 무교병, 그리고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쓴 나물은 쓰디 쓴 노예생활을 기억하는 의미였습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행사는 신약시대까지 내려져왔습니다. 모든 남성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희생제물을 잡고 여러 가족이 함께 모여 양과 무교병, 쓴 나물을 먹고 4잔의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이후에 무교절이 이어져 7일 간 무교병을 먹고 첫째 날과 마지막 날에 성회로 모여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민 28:19~23). 예수님의 부모는 이 모든 관례에 따라 모든 절기를 마치고 나사렛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부모가 신실한 이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43).

그런데 예수님은 함께 떠나지 않고 예루살렘이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이 아주 어린 아이였다면 부모의 부주의로 아이를 잃어버렸겠지만 이 때 예수님은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남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남으셨을까요?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43-44).

당시 행렬은 여자와 아이를 앞세우고 남자는 뒤에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와중에 친척들 중에 있거나, 부모가 따로 움직이니 서로에게 있으려니 하여 예수님을 놓쳤던 것 같습니다. 4-5일 여정 중 하루를 간 뒤에 예수님이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친척 중에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46).

만일 예수님이 일반적인 아이였다면 어떤 모습으로 있었을까요? 울고 있었을까요? 가축들을 관찰하고 있었을까요? 넓은 광장에서 아이들과 놀고 있었을까요? 똑똑한 아이라서 성전에서 가르치는 선생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47).

당시의 수업방법은 질의응답이 많았습니다. 선생이 중앙에 앉고 학생들이 둘러앉아서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가운데 계셨고 많은 이스라엘의 선생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아이가 하버드 대학에 있는데 그곳의 세계적인 교수들이 그 아이를 둘러싸고 그 아이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으며 놀라고 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교수들은 웬만해서는 그렇게 놀라지 않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아마도 모세의 율법이나 메시아에 대한 것, 즉 유대인의 스승들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것들에 대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얼마나 충만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놀랍다’라는 표현은 ‘물러나다’, ‘정신을 잃다’, ‘이성을 잃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 정도로 놀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산상수훈을 나누시는데, 그 지혜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마 7:28-29). 예수님은 열두 살의 나이에 유대인의 스승들 앞에서 놀라운 지혜와 권능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아이 예수님은 메시야로서의 임무를 성취할 능력이 있으실까?’라는 질문에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권능이 충만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

사흘을 찾아헤맨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가 참 야속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49). 마리아가 말한 “아버지”는 요셉을 가리키고, 예수님이 말한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개인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말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가리키거나, 모든 생명체에게 생명을 주신 분으로 말하곤 하는데, 여기서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로서의 ‘아버지’를 말하고 있습니다(요 1:14).

 공생애 이후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제자들, 백부장과 여러 백성들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증거 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여러 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셨고,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할 위기를 여러 차례 겪으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볼 때, 12살 소년이던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곧 아버지의 권세 아래 복종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시작되어 이스라엘 역사 내내 그림자로 보여진 희생양. 그것이 가리키는 메시야가 자신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깨달음은 그 어떤 지혜 있는 자들도 월등히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을까요? 물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부모는 소년 예수에게 유월절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희생제물 어린양이 죽임을 당하고 그 피가 제단에 뿌려졌을 때 오래전 하나님께서 우리를 노예생활에서 구원해주시고 자유를 주셨다는 것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에 남아서 하나님이 주신 임무에 대해 생각했을 것입니다. 죽임 당한 희생양이 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겼을 것입니다. 주님은 훗날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보내시면서 내 피와 살로 새언약을 맺는다고 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여셨습니다.

어린 예수님이 부모에게 했던 말이 너무 무례하지는 않았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셨던 말이 그렇게 무례한 말은 아닌 것은 51절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51).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셨고 그 임무도 아셨으며 능력도 가지고 계셨지만, 때가 이르기까지 부모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순종하며 받드셨다’는 이 표현은 참 놀랍습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중요한 본이 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 도착하셔서 남은 17년의 삶을 평범하게 살아가셨습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예수님의 성장기에 대한 기록입니다. 가브리엘과 사가랴, 엘리사벳, 시므온, 안나를 통해 우리는 메시야가 어떤 분인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큰자이며 구원자이심을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전후로 이런 증언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자신의 입술에서 나온 증언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하나님께 임무를 받으셨음을, 그리고 그 임무를 성취할 지혜와 권능을 지니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열두 살의 나이에 말입니다.

 여러분은 삶에서 많은 지혜가 필요하실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삶에 필요한 지에 대한 지혜를 구할 것입니다. 이미 열두 살의 나이에 모든 지혜에 충만하셨던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가 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여러분의 영적인 눈이 떠져서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님의 지혜와 권능의 충만함이 여러분에게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하신 그 지혜의 하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아직 하나님의 지혜에 굴복하지 않으신 분은 이제 그분께 나오십시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라고 했던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 외에는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 지혜 앞에 나오시고 그것을 여러분의 지혜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에게 지혜를 부으셨습니다. 열두 살 예수님의 지혜는 선생들을 경이롭게 할 정도로 위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라가며 더욱 지혜가 커지고 충만해지셨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

이제 우리가 만날 예수님은 더욱 커지고 충만해진 지혜와 권능을 가지신 분입니다. 이어지는 누가복음 공부를 통해 우리는 여러 사건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이분이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