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본문 : 누가복음 12장 35~48절
설교자 : 이병권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풍족하게 누리고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 손에 있습니다. 많은 책들과 인터넷을 통해서 원하면 얼마든지 말씀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함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무런 위험 없이 자유롭게 주님을 섬길 수 있고 교회로 모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가난했고 위험했고 어렵고 힘겨웠던 초대교회가 오히려 더 힘 있고 열정적이고 영적으로 더 부요했다는 것을 압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극심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증거하며 복음을 위해 목숨을 던졌던 그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가진 것에 비해서 너무도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걸까요? 몇 가지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는 주님이 곧 오신다는 분위기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인사는 ‘마라나타’였습니다.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것을 제쳐 두고 가장 중요한 것을 행합니다. 그래서 바른 우선순위를 가졌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며 삽니다. 그래서 다른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다르게 만든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 그 기대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다르게 만들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가 가지는 주의 오심에 대한 기대를 새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보다 영적으로 깨어서 주님 만나기를 사모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럼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제목으로 오늘 본문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복이 있는 종에 대해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단락은 35절에서 40절까지이고 두 번째 단락은 41절에서 48절까지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단락에서 복이 있는 종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37절과 38절에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락으로 전환이 되는 베드로의 질문이 41절에 있고, 43절에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시며, 복이 있는 종의 모습을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 있는 종의 모습을 두 가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 있는 종은 어떤 모습입니까? 첫째로 복이 있는 종은 깨어서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설명해주십니다.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36) 예수님은 사람들이 금방 떠올릴 수 있는 모습으로 종을 묘사합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아주 쉽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은 혼인 잔치에 참석한 자신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시의 혼인 잔치는 일주일 정도 계속되었고 잔치에 참석한 손님은 자신이 원하는 기간 동안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집에 있는 종의 입장에서는 잔치에 참석한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즉시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두 개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 먼저, 허리에 띠를 띠는 것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입던 옷은 활동하기에 그리 편한 옷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재빠르게 움직여야 할 때는 기다란 겉옷의 허리 부분을 졸라맵니다. 마치 우리가 어떤 일을 앞두고 그에 맞는 복장을 갖추는 것과 같습니다. 익숙한 표현으로 말하면 소매를 걷어붙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등불을 켜고 서 있는 것은 어두운 밤에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왔을 때, 그 때 등불을 켜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종은 주인이 올 것을 준비해서 미리 등불을 켜두고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는 것과 등불을 켜는 것은 모두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이렇게 준비된 종은 주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언제든 곧바로 문을 열어 줄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때는 핸드폰으로 언제 오는지 연락을 하거나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바로 확인할 수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요즘처럼 간단하게 문을 잠그고 외출할 수 있을 때도 아닙니다. 집 안에서 문을 잠그면 밖에서는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밖에서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는데 안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습니다. 깊은 잠에 푸욱 빠져있으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릴 때 그 즉시 종이 나와서 문을 열고 주인을 영접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주인이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37a)
예수님은 주인을 기다린 종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종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왜냐하면 깨어 기다린 종에게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종이 받게 되는 보상은 무엇입니까? 그 보상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37b)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깨어서 주인을 기다린 종을 위해 이제는 주인이 허리에 띠를 졸라맵니다. 그리고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주인이 종을 섬깁니다. 이 장면은 식탁교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종은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으며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주로 모신 자들이 누리게 될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복이 있는 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38) 이경과 삼경이 언제인지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로마의 관습을 따르면, 시간은 저녁 아홉 시에서 새벽 세 시까지가 됩니다. 유대의 관습을 따르면, 시간은 저녁 열 시에서 새벽 여섯 시까지가 됩니다. 견해에 따라 시간이 조금 차이날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포인트는 그만큼 깊은 밤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집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 깨어 있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야만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깊은 밤, 모두가 잠든다 하더라도 깨어 기다리는 종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을 받는다는 것을 반복하시며 깨어 기다리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조금 다른 측면에서 깨어서 기다리는 것의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39) 예수님의 비유는 주인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종에서 예상치 못한 도둑의 침입을 대비하는 집주인으로 바뀝니다. 도둑은 자신이 언제 방문하는지 미리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도둑은 집주인 몰래 침입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룹니다. 만약 주인이 이 사실을 안다면 미리부터 도둑의 침입을 대비할 것입니다. 밤이 늦었더라도 깨어서 도둑이 집을 뚫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당시의 집은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을 세워 담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도둑은 벽을 뚫을 수 있었고 집안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집주인이 도둑이 온다는 것을 미리 안다면 혹시 뚫린 곳이 없는지 구석구석을 살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해를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과 도둑을 대비하는 집주인, 이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 비유에 대한 교훈을 짧게 요약하시며 결론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40)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준비하고 깨어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각하지 않은 때”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오심을 준비하여 깨어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되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것처럼, 캄캄한 밤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라 하더라도 깨어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마치 도둑을 대비하는 것처럼, 깨어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깨어서 기다린다는 것은 날마다 밤을 지새우면서 비상대기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깨어서 기다린다는 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그분을 내가 기다리는 중이라 것을 잊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 예수님이 다시 오실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 내 삶을 점검하며,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기초를 두고 그 위에 나의 삶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러니 그때를 준비함으로 깨어서 기다리는 복이 있는 자가 되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 있는 종은 어떤 모습입니까? 첫째로 복이 있는 종은 깨어서 기다립니다. 둘째로 복이 있는 종은 맡은 일에 충성합니다.
주의 오심을 준비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충성된 종과 그렇지 않은 종을 구분해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충성된 종입니다.“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42)
예수님은 청지기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 있는 직분이었습니다. 청지기가 된 종은 주인의 집과 토지는 물론 다른 종들까지 관리하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지기가 해야 했던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종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 “양식”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성경에서 딱 한 번 여기서만 사용되었습니다. 기준을 따라 일정분량으로 나누어진 곡식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없을 때 그 집에 대한 책임을 맡은 자로서 종들을 돌보고 재산을 관리합니다. 그만큼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지기의 직분을 맡은 종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자신이 주인에게 속해 있는 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이 없을 때는 청지기가 주인인 것 같지만 아닙니다. 주인은 곧 돌아옵니다. 그리고 주인이 오면 청지기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주인이 없는 동안 청지기가 한 일에 대해서 낱낱이 계산될 것입니다.
주인이 청지기를 평가할 때 무엇이 중요할까요? 청지기가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가졌는지, 얼마나 키가 크고 잘 생겼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주인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얼마나 잘 행했는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주인의 평가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43)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한 종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44)
맡은 일에 충성한 종은 주인의 인정을 받으며 계속해서 주인의 집에서 그 소유를 관리하며 쓰임을 받게 됩니다. 그 종은 자기의 청지기 직분을 계속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인을 섬기며 주인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종이 그와 같은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제 신실하지 못한 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45) 이 종은 주인이 멀리 가서 지금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인이 돌아오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행하기는커녕, 자신의 권한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다른 종들을 때립니다. 자기 멋대로 방탕하게 사는 겁니다. 결국, 주인이 돌아왔을 때 이 종은 혹독한 벌을 받게 됩니다.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46) 이 악한 종은 자신이 행한 일에 결과로 믿지 않는 자가 받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주인은 돌아왔을 때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여기에 “엄히 때리고”라는 말은 정말 무서운 말입니다. ‘엄히 때리고’ 라고 하니까 그냥 좀 많이 때리는 정도로, 그래서 맷집이 좀 좋은 사람은 버틸 수 있는 그런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이 단어는 ‘둘로 쪼개다’는 뜻입니다. 능지처참을 하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단순히 청지기라는 직분을 박탈당하고 매를 맞는 정도가 아닙니다. 주인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아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종은 주인이 없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무책임했고 결국 자신의 신실하지 못함을 드러냈습니다.
특별히 누가는 이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판의 원리를 기록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47-48)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은 종은 그것을 몰라서 행하지 않은 종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알고 있는 것에 따라 요구되는 책임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책임에 대한 처벌도 다른 것입니다.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말씀과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1절에 나오는 ‘이 말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신 것인지’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서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신 대답은 제자들은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모든 사람을 향한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신실함을 요구하십니다.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은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경고하십니다. 주의 오심을 준비하지 않은 자들에게 임할 심판의 날, 피할 수 없는 무서운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예수님의 부재중이라고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착각하며 삽니다. 내 삶이 내 것인 것처럼,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삽니다. 주님의 평가가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한 번 평가해보십시오. 그날에 예수님을 만난 후에 후회하지 않도록 미리 평가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의 오심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된 자입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나 구원받았어요, 나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요, 나 예수님을 믿어요.’ 단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여러분이 사는 방식이, 여러분의 삶의 태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뜻을 아는 자답게 그 뜻을 행하기를 힘쓰며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의 입술보다 더 큰 목소리로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줍니다. 여러분은 정말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주로 믿고 따르는 정말 구원받은 자가 맞습니까?
저는 정말 두려움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경고는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이 저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여러분이 들은 경고의 말씀을 그냥 무시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안다면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계속해서 마음을 닫는다면, 계속해서 고집을 부린다면, 계속해서 멸망의 길로 가겠다고 한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가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게 될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형벌 속에서 후회와 절망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얼마의 시간이 더 남아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주의 오심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영원히 자신의 존재를 저주하는 날을 맞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가르침은 신약에서 계속 강조되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주제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지기로서 사는 것입니다. 이 둘은 따로 떼놓을 수 없는 하나의 묶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이 있는 자는 주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며, 맡은 일에 충성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임박한 때를 살고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여기서 “주님이 곧 다시 오십니다.” 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마치 “늑대가 나타났다”하고 외치는 양치기와 같은 걸까요?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외쳤지만, 그 외침이 이 천년 동안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 가운데 정하신 때가 되면,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에게 그러한 분명한 믿음이 있다면, 그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주의 오심을 준비하며 사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날에 후회할 일을 줄이는 비결입니다. 참으로 복된 일이며 가치 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가복음 12장에서 살펴봤던 교훈들을 기억하십니까? 우리 마음의 중심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맞춰있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물질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착각하며, 잘못된 우선순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바로 잡아 주는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될 때, 우리 삶에 대한 평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주의하게 합니다. 그분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평가하시고,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날을 깨어서 기다리는 자가 되십시오. 그날을 기다리며 맡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렇게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정말 기대할 수 있는 진정한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