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변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 때
본문: 누가복음 24장 13~35절
설교자: 이병권
지금 우리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위기라 할 수 있습니다. 바이러스 확진자가 8천명이 넘었고 감염에 대한 염려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입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의 무역이 중요한데 여러 나라가 한국에 대해서 입국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관련된 산업이 심각한 불황을 맞고 있습니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생계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개학은 또 연기되어서 교육에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도 참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몇몇 교회에서 여러 확진자가 나오면서 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신천지와 다를 바 없다면서 그렇게 욕을 하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뉴스에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경기도에서는 종교집회 제한명령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관련 공무원이 우리 교회가 주일에 모이는지 확인 전화를 하기도 합니다.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전환해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이 교회로 오고 주말이 되면 교회에 모이는 것을 자제해달라는 문자가 여러 차례 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저런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좋든 싫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소리가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문제는 그 소리가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그 소리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우리 마음을 자꾸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합니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정작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는 소리가 잘 안 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더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주변 소리가 아니라, 시끄러운 세상 소리가 아니라 정말 중요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들어야 하는 중요한 소리는 무엇일까요? 지금 나의 상황이나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을 넘어서는 중요한 소리, 정말 내가 들어야 하는 이야기는 뭘까요? 오늘 말씀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인 두 사람이 나옵니다. 두 사람은 그동안 자신들이 따르고 믿었던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으로 잃어버리고 쓸쓸히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자세히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사람의 이름을 “글로바”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기에 알 수 없습니다.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두 제자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집이 그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 때는 큰 기대와 소망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랐는데, 집을 떠나서 모든 것을 두고 예수님을 따라 갔는데,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나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기대와는 달리 힘없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소망은 사라졌습니다. 너무도 기가 막힌 상황이라 그들은 실망과 슬픔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면서 이 모든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13-14)
두 제자는 어떤 심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 그들의 대화는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마음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니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그분이 하신 말씀은 달랐는데, 그분에게는 능력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분을 믿었는데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아마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때 놀랍게도 예수님이 그들 곁으로 다가가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예수님이 그들과 동행하셨던 것입니다.
두 제자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실망하고 있을 때, 낙심하며 슬픔에 빠져있을 때, 그 때에 주님은 그들 곁에 오셨고 그들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 생애 가운데서 주님이 가장 필요했던 바로 그 때에 주님이 그들을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질문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17)
제자들은 아주 침통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어 섭니다. 그리고 글로바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대답합니다.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18)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십자가의 일이 그만큼 크고 사람들이 다 알만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다시 질문하십니다. “무슨 일이냐?”(19)
그리고 그의 대답이 이어지는데 쉽게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나사렛 예수는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선지자였는데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 생각하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습니다.‘(19-21)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한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고 예수님은 죽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망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소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는 기대와 다른 결과를 얻으면 실망합니다. 내가 생각한 대로 기대한 대로 되지 않을 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실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에 대해서 이러하리라 생각했는데,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게 이렇게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아서 실망합니다. 자녀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되지 않아서 실망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지 않으니까 실망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기대하고 또 쉽게 실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망하기 전에 먼저 나의 기대가 바람직한 것인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것을 기대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실수하면서 상대방은 실수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잘못된 기대입니다. 나는 완벽하지 못하면서 상대방이 완벽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잘못된 것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실망하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잘못된 기대를 가지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도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실망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치, 경제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나라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구원자로 예수님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셨고, 그들보다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시적으로 로마의 박해받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분은 빌라도나 가이사와 같은 정치 지도자의 권세가 아니라, 사단의 권세에서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NO라고 하셨지만, 정말 사람들이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YES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독립에 대해서는 NO라고 하셨지만 인류의 구원에 대해서는 YES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십자가에 죽으셨기에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생각하고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기도하는 대로 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위기 상황이 계속되고 교회가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개학이 미뤄지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주님이 나보다 더 잘 아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에 실망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실망과 슬픔은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22-24)
여자들이 새벽 일찍 무덤에 가서 비어있는 무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좇아가서 무덤을 확인합니다. 천사로부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지만 믿지 않습니다. 실망에 빠져 마음이 굳어버린 것입니다.
실망에 빠져버리면 우리 마음에는 어떤 이야기도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마음이 굳어지면 정말 들어야 할 이야기가 그냥 흘러지나가고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겁니다. 우리를 부정적으로 만듭니다. 우리를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으면서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해하기를 원하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쉽게 내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5-27)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설명해주십니다. 그러는 가운데 날은 저물었고 두 제자는 목적지인 엠마오에 도착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강권하여 더 있기를 청하였고 예수님은 요청을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식사하실 때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고, 마침내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 때 예수님은 사라지십니다.
두 제자는 이 놀라운 경험을 자기들만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곧장 일어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로 인해 큰 실망에 빠져서 엠마오로 왔는데, 이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을 만나 자신들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다시 뜨거워졌고 회복되었습니다. 그들은 실망을 이기고 슬픔을 떨쳐버리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실망한 두 제자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이야기로 이끌고 가셨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그 모든 구약의 이야기 속에서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구원자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자세히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실수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고, 역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설명해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미리 계획하신 대로, 말씀을 통해서 계시해 주신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그들의 굳은 마음을 회복하고 다시 뜨거운 마음으로 바꾸었습니다. 실망을 이기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심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전능하신 왕이심을 계속해서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대적보다 더 위대하시며 더 강하시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 합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주변의 소리가 크게 들릴 때, 실망하고 있을 때,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내 삶을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르시거나 실수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며 이스라엘을 마른 땅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이, 뜨거운 풀무불에서도 해를 받지 않도록 세 친구를 보호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런, 어떡하지!’ ‘큰일인데, 이건 예상 밖의 일이야!’ ‘아차, 깜박했네!’ 이런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끝이라고 말씀하실 때까지는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야기가,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코리 텐 붐은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자신의 집에 유대인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그녀는 수용소에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지만 끝까지 인내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그녀는 그 끔찍한 곳에서 벗어난 후 전 세계를 다니며 잃어버린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과 믿음, 용서의 메시지를 통해 교회에 용기를 심어줍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고 당신은 기차표를 찢거나 기차에서 뛰어내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눈앞이 보이지 않아 캄캄할지라도 기관사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 최고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기관사가 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당황하지 말고 터널이 지나가기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자리에 계십시오. 하나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것을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에 실망하셨습니까? 염려와 걱정으로 불안하십니까? 말씀으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 이야기를 읽으십시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그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인 것을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오래전에 기록된 그냥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보호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역사하고 계심을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까? 우리는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주변의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 중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도 있고 진실이 아닌 꾸며낸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전문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전문가의 말이면 더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짜 신뢰하며 들어야 하는 이야기,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는 전문가의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정말로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소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시던 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32)
이것이 답입니다. 실망에 빠져있을 때, 이해가 안 되는 일을 겪고 있을 때, 마음의 어려움이 있을 때 불안해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으십시오. 혼란스럽게 보이는 우리의 어려운 상황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다시 뜨거워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마음을 회복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주변 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리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