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주님의 오심과 그리스도인의 삶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5장 1~3절, 데살로니가후서 2장 1~2절
설교자 : 조성훈
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5: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5: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2: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가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면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편지를 봐도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삶의 동요가 없게 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런 면에 있어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지난 설교의 주제는 주님의 경고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 그 설교가 끝나고 나서 교회 부지를 매입하겠다는 광고를 했습니다.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설교 후에 교회의 장래를 위해 땅을 매입하겠다고 말한 것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린 한편으로는 주님이 내일 오실 수도 있다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시대에 오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합니다.
아주 오래전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 보험회사를 다니는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당시에는 보험을 든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집을 짓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에는 주님의 오심이 강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예수님이 여러분을 앞에 앉혀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머지않은 자기 시대에 오리라고 생각지 않을까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고 3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그러한 환상을 봤을 때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우리가 오늘 이 집회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천사를 만나서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주님은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가 기록한 서신서에서 주의 오심이 매우 임박하다고 말합니다. 재물이 없는 자도 재물에 마음 두지 말고 장가도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편지를 읽었던 사람들은 주님께서 금방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 시대에 주님의 재림이 이뤄질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 때문에 우리의 삶의 균형이 깨질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666이나 베리칩 같은 것들 때문에 교회가 흔들렸습니다. 60년대에는 대학교에 가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주님이 곧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삶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금방 오실 것처럼 살고 어떤 사람은 아주 오시지 않을 것처럼 삽니다. 요즘 세계의 흐름을 보면 주님의 오심이 매우 임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더 이상 타락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전서와 후서가 다릅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바울은 삶이 흔들리거나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임의로 정한 주님의 재림 날짜에 맞춰 흰 옷을 입고 승천하리라 믿고 건물 안에 모였었습니다. 노아의 방주와 같이 만들어 놓은 방주 안에 돈을 내고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주님의 오심이 임박했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논밭을 팔아서 헌금하거나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거나 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여러분의 문제는 너무 안일하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이 오늘 오신다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조금 더 있다 오시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오심이 임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계획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롬 14:7)라고 한 것처럼 우리는 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도나 선교처럼 특별한 사명만이 주를 위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성도에 대해 오래 참고 사랑하고 짐을 져주고 원수를 갚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이 자기 집을 새로 짓는다는 것이 고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이 가까운데 집을 지어야 할까? 집을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 영광이 된다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주님을 이용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인 사람이 있고 예수님을 나를 돕는 자처럼 여기는 사림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 영광이 될지를 묻는 기도와 그저 도움만 요청하는 기도는 다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는 종교인의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신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데, 자신의 꿈을 이루는데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겐 주님이 주인이 아닙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그 마음에 항상 갈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외롭고 마음에 갈증이 있어 괴롭습니다. 총각과 처녀가 있는데 서로에게 반해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이 삶의 갈증을 느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할 수 없이 행복하고 기뻐하며 만족스러워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장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나, 집을 짓는다 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믿는 자들은 주님이 오실 때 부끄러움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산 시간보다 나를 위해 산 시간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적을 주님이 언제 오시든 상관없이 주를 위해 사는 것에 둔다면 그 날에 주님 앞에서 미안해할 것도 손해 볼 것도 없습니다. 어떤 자매는 주님이 곧 오신다고 하니 독신으로 삽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자신의 삶을 손해 보았다고 생각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늘에 있는 성을 바라봤기에 평생 장막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었습니다. 그가 100년 더 살 것을 알았다면 집을 지었을까요, 짓지 않았을까요?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몰라서 아브라함처럼 산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곧 오실 거라고 말했었는데 그가 만약 자신의 사후에도 주님이 여전히 오시지 않았음을 알았다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 모임들도 예전에는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것에 치중해서 예배당을 짓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때에 균형 잡힌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면 더 좋은 곳에 예배당을 지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유평교회는 교회 부지를 구했는데 주님이 원하신다면 좋은 훈련센터를 설립하려고 합니다. 이는 필요한 일꾼들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한국 교회에 필요한 일꾼들을 양육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곧 오신다면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곧 오셔도 상관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형제, 자매가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았다고 합시다. 주님의 오심이 가깝다고 자녀를 학교에 안 보낸다면 어떨까요? 좋은 가장, 좋은 리더는 수십 년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언제 끝나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주님의 재림을 너무 먼 장래로 생각해서 삶의 균형을 잃어버립니다. 오늘에 만족하지 않고 주님께 충성하지도 않으면서 내일을 살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 중에 어리석은 일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내일 할 걱정을 오늘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균형 잡혀 있어야 합니다. 장래에 대한 계획과 더불어 오늘 주님이 오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삶이 신실합니다. 주님이 오늘 오실 거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굉장히 성실한 삶입니다. 그러나 이분은 내일에 대한 계획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삶의 계획은 잘 세우는데 오늘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성도를 사랑하고 인내하는 것이 없습니다. 어느 식당에 갔는데 ‘오늘은 현찰, 내일은 외상’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다음날도 오늘이 되었으니 현찰을 내야 합니다. 내일이 없으면 오늘이 없고 오늘이 없으면 내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오늘 오실 수도 있고 내일 오실 수도 있습니다. 내일 주님이 오신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돌아봐야 합니다. 오늘이라는 동안에 내일 오실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업에 대한 계획도 세우고 교회의 비전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이 없이 산다면 그 삶은 헛사는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계획 없이 오늘을 충성스럽게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늘을 불성실하게 살면서 장래에 대한 계획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그 둘 사이에는 균형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시대에 오실 수도 있고 오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일의 목적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모든 성도가 비전을 함께 하여 큰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교회도 말씀에서 꽤 멀어졌기 때문에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셔도 후회 없이 갈 수 있도록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을 보면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주님이 곧 오실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 결코 방황하거나 혼동하거나 동요하지 않습니다. 균형 있는 삶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꾸준히 전도 계획을 세웠습니다. 주님이 곧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되고 우리 시대에 오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균형이 잡혀 있습니까? 주님이 내일 오셔도 후회 없이 갈 수 있는 오늘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 시대에 오시지 않는다해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두 가지 경우를 다 생각하는 균형 잡힌 삶이어야 합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균형 잡혀 있는지 점검해보시고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