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죄인을 위한 복음

본문: 로마서 1장 23절 외

설교자: 최종혁

예수님께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후에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식사하시는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방했다. 어떻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유대인의 선생이 아니라 최소한 제대로 된 유대인이기만 해도 생각할 수 없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9: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의인과 죄인을 말씀하시는데, 사실 맥락상 보면 실제로 의인과 죄인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두 종류의 죄인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며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죄인(의인)과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죄인이 있다. 스스로 구원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죄인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다.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죄인과 구원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이며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진짜 죄인의 구원자로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세리를 두고, 누가 더 하나님 나라에 가깝겠냐고 질문하면 모두가 바리새인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바리새인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 알고 하나님의 말씀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매일 기도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기 때문이다. 십일조를 빠지지 않고 안식일도 잘 지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리새인이 더 ‘경건’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기준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뭔가 더 선한 삶을 산 사람에게 더 좋은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국이 있다면 그렇게 열심히 남을 도우며 살았거나 인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선하고, 선할 수 있다는 것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변하지 않는 생각인 것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모든 종교가 다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어쨌든 뭔가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맹신하는 심리학은 어떤가?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모두 내 밖에 있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은 항상 나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자존감을 가지고 자부심을 가질 것을 말한다. 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멀리 하라고 한다.

좋은 생각,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당연히 그런 모든 생각이 나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거대한 흐름의 이면에 있는 사탄의 전략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탄은 항상 우리가 듣기 좋은 말,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스스로 구원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나의 구원자가 되라고,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자의 필요성을 제거하여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제거하는 것이다. 우리의 과학이, 우리의 철학이, 우리의 교육이, 우리의 문화가, 우리의 정치가, 우리가 곧 복음이 된다. 하나님의 복음은 필요없다.

안타깝게도 인류는 수천년을 실패한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마치 진화론자들이 수십억년의 시간이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고 믿는 것처럼, 사람들은 지금은 아직 아닐지 모르지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우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문제가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현대의 바리새인이 되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면, 죄인을 위한 복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라는 말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앞서 말한 오늘날의 배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복음도 받아들일 수 없다. 혹 받아들인다고 해도 제대로 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없다. 복음은 죄인을 위한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의 시작에서 “죄”에 대해서 말한다. 로마서 1:18에서 시작된 죄에 대한 말씀은 3:20까지 이어진다. 스포일러지만 결론을 먼저 읽어 보자면 이렇다.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당신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가 결론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바울은 우리에게 익숙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말한다. 오늘은 3:20까지 이어지는 죄에 대한 말씀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죄에 대한 중요한 사실 4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죄는 창조주-피조물 관계를 깨는 것이다.
    2. 죄의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3. 우리는 죄의 피해자가 아니라 범죄자다.
    4. 죄인이 죄를 짓는다.

죄는 창조주-피조물 관계를 깨는 것이다

먼저 성경이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죄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가 바로 떠올리는 것은 ‘악’일 것이다. 뭔가 남에게 큰 해를 끼치는 행위를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는 대개 그런 행위를 법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법을 어겨서 징역을 살지 않는 이상 스스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보편적으로 봤을 때 내가 ‘악’을 행하지는 않은 것이다. 또한 ‘행위’가 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생각들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 의식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실제 ‘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그 기준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짜 죄는 그렇지 않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런 것들이 죄의 모습으로서 드러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말해서 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깨는 것이 죄다.

성경은 죄에 대해서 다양한 표현을 사용한다. 목표를 벗어나는 것, 선을 넘는 것이 죄다. 반역하는 것이 죄고 법을 어기는 것이 죄다. 제 갈 길로 가는 것도 죄다. 그 모든 기준에 있는 것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목표를 벗어나는 것,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을 넘는 것이 죄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을 어기는 것이 죄다. 하나님을 떠나 제 갈 길로 가는 것도 죄다.

왜냐고 물을 수 있다. 독립된 주체로서 그냥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게 왜 잘못이라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독립된 주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살아가야 하는 의존적 존재다.

모든 신을 섬기고 있었던 아덴의 사람들에게 바울은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17:24–28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8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다. 우리는 온전히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고 누구를 의지할 필요도 없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셨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게 하셨다.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뿐 아니라 우리가 즐거워 하는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 창조주-피조물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죄인 것이다.

1:18–23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창조주-피조물 관계에서 사람은 하나님 자체를 영화롭게 해야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21절). 내가 왜 그렇게 해야하느냐고 따질 일이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이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위치가 그렇게 다르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서 그것을 부정하고 “막는” 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여기서 “막는다”는 것은 억누른다는 의미를 가진다. 즉, 이 말은 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진리를 알지만 그것을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19-2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 수 있다. 성경을 통해 훨씬 더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만물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두신 양심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고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정직하게 자신의 이성과 양심을 따른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진리를 억누른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 것을 그르다고 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셨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18절은 또한 죄를 “경건하지 않음”“불의”로 표현했다. “경건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고, “불의”는 그 결과로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악을 의미한다. “경건하지 않음”은 하나님 사랑과 관련된 표현이라면 “불의”는 이웃 사랑과 관련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의”에 해당되는 것이 24절 이하의 말씀에서 계속해서 나온다. 정욕에 따른 성적인 타락(24절), 부끄러운 욕심에 따른 동성애(26-27절), 상실한 마음에 따른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비방, 부모 거역, 무정, 무자비 등(29-31절)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는 악이다. 이 모든 악의 근본에 있는 것이 바로 “경건하지 않음”, 즉 하나님의 부재인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부재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1:22–23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바꾸는 것”으로 가능해졌다.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사라지신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창조주의 자리)에서 끌어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을 두었다. 그것이 “우상”이다. 사람이 만들어낸 나쁜 것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기도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대체하는 것), 그것이 죄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죄는 그렇게 하나님의 진리를 막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뒤집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둔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결과를 보고 있다. 사람들은 ‘악’에 대한 하나님 주신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지만 그 기준이 되는 ‘선’이신 하나님을 제거했기 때문에 ‘악’에 대한 절대적 기준 혹은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 살인이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낙태는 살인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사람을 죽인 사람은 처벌 받지 않는데, 고양이나 강아지를 죽인 사람은 처벌을 받기도 한다.
  • 불륜이 옳지 않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법에서도 사라졌고, 이젠 도덕적 의무로만 여겨지고 있다.
  • 세상에 성별이 수십가지가 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어제 남자였던 사람이 오늘은 자신이 여자인 것 같다고 하면 여자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는 일년에 성별을 바꿀 수 있는 횟수를 법으로 정해두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정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제거한 지금 세상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우리가 경험하는 악의 근원에 있는 것이 바로 창조주-피조물의 관계를 깬 죄다. 우리가 피조물로서 하나님 아래 있다는 것을 부정한 것이 근본적인 죄인 것이다. 왕이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스스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왕이 된 것이 죄인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이런 가치가 선한 것으로 강조되는지 생각해 보라. 아이들이 많이 보는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도 바로 이것이다. 어떤 구습, 예전의 질서, 틀을 깨고 나를 찾아 온전한 자유로 나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며 최고의 선으로 그려진다.

내 위에 있는 모든 권위를 깨고 내가 그 권위가 되기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세상이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최고의 가치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하는 것을 성경은 죄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악은 그 결과로서 오는 것들일 뿐이다.

죄의 궁극적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다음으로 죄에 대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죄의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죄는 그냥 죄로 끝나지 않는다. 앞서 우리가 경험하는 악한 일들이 모두 죄의 결과라고 말했다. 성경은 그것이 단순히 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가장 소극적인 심판으로서 “내버려 두심”의 심판이다.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고 하나님께 모든 좋은 것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내버려두시고 그들이 하고 싶은대로 두신다는 것은 결코 사람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32절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서로 격려해서 더 악한 일을 하며 더 서로를 괴롭게 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의 심판의 거의 끝에 와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미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볼 수 없었던 죄악을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소극적인 심판일 뿐이다.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 죄에 대한 결과를 당하게 하시는 소극적인 형태의 진노도 있지만, 이 말씀은 보다 적극적이고 궁극적인 형태의 진노, 심판도 포함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묘사한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이 땅에 쏟아 질 것이다. 하늘이 떠나가고 산과 섬이 옮겨질 것이다. 이 땅의 왕들, 부자, 강한 자들이 다 바위 틈에 숨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싶어 할 것이다(계 6:14-15).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6:16–17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고 삶의 전부라고 여겼던 재력이나 힘이나 지위나 모든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아무도 설 수 없다.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칼로 만국을 치고 철장으로 다스리며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계 19:15-16). 그리고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모든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불리는 곳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계 20:11-15). 예수님은 그곳은 꺼지지 않는 불이 있지만 또한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막 9:48). 고통의 장소이지만 벗어날 수 없는 곳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심판의 장소, 지옥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심판이나 지옥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도 이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냥 ‘하나님 없는 삶이 지옥이예요’ 정도로 얘기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재가 지옥이라는 것이다. 지옥을 ‘의식을 지닌 채 영원히 계속되는 고통의 장소’로 말하기 부담스러워 한다. 영원한 심판의 장소를 만드신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의 장소로서 지옥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지옥같은’ 삶을 사는 것을 지옥이라고 한다. 지옥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다고 말한다.

앞서 말했지만 우리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는 심판을 내리셔서 우리가 괴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옥은 아니다. 지옥은 삶의 장소가 아니다. 죽음의 장소이고 적극적인 심판의 장소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지옥이 아니라,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지옥이다.

성경은 지옥이 그런 장소라고 말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오늘날 지옥에 대해서 개념을 약화하려는 노력의 의도는 알겠으나 전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판을 보라. 거기에는 ‘삶’이라는 것이 없다. 지옥은 그래도 살만한 장소, 그래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은 장소가 될 수 없다. 영원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쏟아지는 곳이다. 지옥을 힘들지만 살만한 곳으로 포장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변호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지옥이 어떤 곳인지 우리에게 확실하게 말씀해 주신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는 우리의 죄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죄의 결과는 영원한 심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구원 받는다’고 말할 때,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바로 그런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으로부터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대로 그런 곳에 가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9:43–48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7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은 이런 궁극적인 심판이 있을 것임을 여러 방법을 통해 말씀해주셨다. 앞서 살펴본 몇 구절 외에도 여러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객관적이며 분명하게 이 사실을 말씀해 주셨다. 또한 인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심판이 이를 말해준다. 노아 홍수가 대표적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도 있다. 가나안에 살던 민족들에 대한 심판도 있다.

이런 사건들을 볼 때, 때로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시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시기에 그렇게 오래 참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할 기회를 그들에게 충분히 주셨다. 하지만 그 기회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손을 거두실 때가 오고 그때는 공의의 심판이 쏟아진다. 모든 죄의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엄중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을 죄인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죄의 피해자가 아니라 범죄자다

다음으로 죄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는 죄의 피해자가 아니라 죄를 범한 죄인, 범죄자라는 사실이다.

때로 우리는 이 사실을 착각한다. 죄로 인해 우리가 고생하고 괴롭다는 사실로 인해서 우리를 죄의 피해자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치 나는 그런 죄인이 아닌데,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은 정죄하고 자신은 불쌍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가 범죄자다. 우리가 다 범죄자여서 서로에게 해를 가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우리가 보상을 받고 있는 것이다.

2:1–3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2:5–6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나는 선한데, 세상이 악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다 악하다. 우리는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엄하다. 자신의 죄에는 항상 타당한 혹은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지만 타인에게는 그런 예외가 없다. 로마서 2장은 특히 유대인들이 부도덕한 이방인들을 보면서 스스로는 의롭다고 여기는 죄를 지적하는데, 우리도 똑같이 그런 일을 한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말한다. 너도 똑같은 죄인이라고.

2:17–22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어느날 예수님께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에게 끔찍한 해를 당한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3:1–3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은 뜻밖에 해를 당한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 회개해야할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해를 당한 사람들이 ‘무고’하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다. 그들이 억울하게 이런 일을 당했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들조차도 전적으로 죄의 피해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더 선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남들에게 인정받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죄의 피해자가 아니다. 모두가 범죄자다.

죄인이 죄를 짓는다

끝으로 로마서 3장에서 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죄와 죄의 행위의 관계다.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해 보면 자신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살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악하게 행한 일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그렇지만 그래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죄’는 지었지만 ‘죄인’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우리에 대해 이렇게 선포한다.

3:10–18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성경의 논리는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죄는 지었지만 죄인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죄인이 죄를 짓는다고 말한다. 즉, 죄의 행위는 우리가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많이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하나님을 제거한 우리는 삶에서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상태이다.

결론

결국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바는 하나다.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모든 사람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변명의 말도 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 그리고 복음은 바로 그 죄인을 위해 주어졌다.

그래도 나름 선하게 살려고 하는 나를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성경과 교회가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이 부분을 건너뛰려고 한다. 그래서 “힘드시죠? 여기 힘을 주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라고만 말한다. “괴로우시죠? 여기 당신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외로우시죠? 여기 당신의 말을 들어주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상처 받으셨죠? 여기 당신을 치유해주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런 말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죄인을 위한 복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죄인을 위한 복음을 말하고 있지, 힘들고 괴롭고 외롭고 상처 받은 사람을 위한 복음을 말하고 있지 않다. 결국 복음 안에서 그 모든 죄의 결과가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죄의 해결 없이 죄의 결과만 해결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죄의 결과만 해결해주시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를 해결해주시러 오셨다.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러 오셨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불쾌한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나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불쾌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라는 설교에서 우리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매우 생생하게 묘사했다.

조나단 에드워즈,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 중에서, 유황불이 활활 타오르는 그 처참한 지옥이 여러분 밑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이 이글대는 무서운 웅덩이가 있습니다. 지옥 문이 입을 활짝 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발을 붙이고 서 있을 곳도, 붙잡을 만한 지푸라기도 없습니다. 여러분과 지옥 사이에는 넓은 공간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곳에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과 그의 전적인 뜻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 그 손을 놓으시는 날이면, 여러분은 즉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마치 큰 댐으로 막아 놓은 저수지와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댐으로 막혀 있는 물은 댐 밖으로 터져 나갈 때까지 그 양이 계속 불어나며 수위가 높아질 겁니다. 그 물이 거기 오랫동안 갇혀 있으면 있을수록, 수문이 터질 경우 물살이 그만큼 더 거세질 겁니다. 여러분이 범한 악행에 대한 심판 역시 이와 같을 것입니다. 물론 그 심판은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수의 물결은 아직 보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 중에 여러분의 죄는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따라서 매일 더 많은 진노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 수위가 계속 높아지고 있으며 그 물살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심판의 물결이 터져 나오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뜻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손을 놓으시는 날이면, 즉시 수문이 열리며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물결이 순식간에 우리를 덮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라도 지옥불 속에 떨어져 마땅한 존재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손으로 여러분을 붙들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지난 밤 지옥에 떨어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난 밤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가 오늘 아침 다시 눈을 뜨고 이 세상을 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후 지금까지 지내면서 아직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여러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엄숙한 시간에 여러분의 악한 방식대로 예배드림으로써 정결하신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즉 여러분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지금까지 예배드리고 있는 동안 지옥지옥불에 떨어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역시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외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서 불쾌해할 것이 아니라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아직 하나님께서 마지막 진노를 베풀지 않으시고 그 은혜의 손으로 나를 붙들고 계심에 감사해야 하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한다면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복음이 나의 것이 될 것이다.

내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나 역시 이런 죄인이었다는 의미고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대상이었다는 의미다. 그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에게 쏟으실 진노를 의인이신 아들 예수님께 쏟으셨다.

그렇게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내가 의인이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죄인이어서 구원 받은 것이다. 내가 남들보다 그래도 깨끗한 삶을 살아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다. 좀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죄인이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 진노 대신 은혜를 쏟아 부으셨다.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나님을 정말로 아는 자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해야 한다. 회개한 죄인으로서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그 어떤 피조물과도 바꾸지 말아야 한다. 내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경외하며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듣고 믿고 나를 구원한 복음은 죄인을 위한 복음임을 잊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