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제자도 2 : 믿음을 가지라

본문 : 누가복음 17장 5~10절

설교자 : 조정의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도 그 첫 번째 수업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죄를 그냥 넘어가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은 제자도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2교시의 시작은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하니(5절)

1. 제자들의 요청: 믿음을 더하소서(5절)

사도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그물, 배, 세리라는 특권 등)을 버리고 예수님을 주라 부르며 그분께 자기 소망을 둔 사람들이었습니다(눅 18:28). 한 번은 베드로가 나머지 사도들을 대표하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9)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핵심 멤버, 12명, 예수님이 기도하며 직접 선출하신(눅 6:12-19)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는데 그들이 지금 예수님께 믿음을 더 많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 그들이 왜 이런 요구를 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제자의 삶을 사는 데 있어 지금의 믿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고 간절히 느꼈을 것입니다. 바로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를 일곱 번 용서하는 것’,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정말 대단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정도의 믿음으론 제자의 길을 갈 수 없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이룰 수 없다고 느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갖은 박해와 고통, 조롱과 핍박을 받고 또 자신들이 영생의 말씀이라고 여긴 가르침(요 6:68)을 대놓고 거절하는 사람들을 무수히 만나면서 제자로서 사는 것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리 그들에게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 한다”(눅 9:23; 14:27)고 말씀하셨는데, 막상 제자로서 따르다보니 그 십자가의 무게가 보통 믿음으론 질 수 없을 만큼 무겁다고 느낀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담대하고 신실하게 진리를 선포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면서 위대한 일을 하려면(병 고침, 기적) 거대한 믿음이 필요하고 그 믿음이 없으면 절대 제자로서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초라하고 작은 자기들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눅 12:28). 그러니 큰 믿음을 가지면 제자로서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우리의 일상 가운데 자주 찾아오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삽니다. 아침에 일어나 서둘러 준비를 하고 직장이나 학교에 갑니다. 혹 집에서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심신을 침대에 올려 두면 또 시작되는 내일이 기다립니다. 내가 가진 믿음으로는 일상 가운데 해야 할 일만 하는 것도 벅차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를 위한 크고 위대한 일은 나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 몫이라 여겨집니다. 강단에서 가르치거나 해외에서 선교하는 사람,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내 신앙 하나 지키기에도 벅차다고 느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살고 있는 데 특별할 것이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구도자를 만나면 겁이 나고 그들에게 소망의 이유를 전달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도들처럼 삶을 주님께 드리고 싶고, 바울처럼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싶은데 우리의 현실, 우리가 가진 믿음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내 신앙 지키기에도 벅차니, “주여 우리에게 아주 큰 믿음을 주셔서 주를 위해 살게 하소서!”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심정입니다.

더 큰 믿음, 아주 특별하고 강한 믿음을 주시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작은 믿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마음이었고 지금 우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2. 작은 믿음이 큰 일을 이룬다(6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절)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쉽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 마치 그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었다고 판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현재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유무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아주 작은 믿음이 해내는 것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은 아무리 작아도 결국 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에서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으로 소개됩니다. 실제로 700개의 씨앗을 모으면 1그램이 될 정도로 아주 작고 가볍습니다. 쉽게 말하면 깨 한 톨 정도로 작고 가볍습니다. 여러분에게 그 정도의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정도로 작은 믿음이 해내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뽕나무가 심겨 있는 곳으로 가서 그 뽕나무에게 명령합니다.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겨자씨만 한 믿음이 어떤 일을 합니까? 뽕나무가 그 명령에 순종하여 땅에서 뽑혀서 바다에 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뽕나무는 검은 오디 나무입니다. 크게 자라면 13~15미터까지 자라고, 무엇보다도 뿌리가 넓고 깊어 아주 단단합니다. 여간해서 뽑히지 않고 600년을 사는 나무입니다. 이 튼튼한 나무를 뽑아서 바다에 심는 것이 가능할까요?

오늘날엔 기술이 좋아서 여러 인부들과 잠수정, 크레인 등을 통해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이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단지 명령만 하면 순종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표현을 그대로 살리면 “뽕나무는 명령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그 즉시 순종합니다”. 한마디로 말문이 막힐 정도로 위대하고 기적같은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7장과 21장에서 이 작은 “믿음”이 있다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아무리 작아도 엄청난 일을 해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은 분량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작은 믿음을 통해 많은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톰 라이트는 ‘믿음이 창문과 같다’고 말합니다. 창문 크기가 10센티미터냐 1미터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을 통해 바라보는 대상이 누구인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작다 해도 그 작은 믿음이 의지하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이 엄청난 일을 이루고도 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지금 하고 계신 말씀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믿음으론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느냐? 제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에는 너희 믿음이 너무 작아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작아도 그 믿음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충분히 이루신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에 예시가 될 만한 증인들이 참 많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연약하고, 감정에 치우치고, 넘어지기도 하고 우울증에 빠져 죽기를 간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변하기도 했습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의 믿음으로 어떤 일을 하나님이 이루셨는지 히브리서 11장을 통해 살펴봅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압니다(히 11:3). 수많은 사람들이 이 우주만물을 폭발과 함께 저절로 생성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우리는 “믿음”을 통해 온 우주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하나님을 없다고 아는 이와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을 아는 이의 차이는 바로 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이후로 계속해서 믿음이 해내는 일을 기록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려 의롭다 하심을 얻고(4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 올라갔으며(5절), 믿음으로 노아는 비를 본적이 없지만 대홍수가 임할 것임을 알고 방주를 지어 가족과 짐승을 보호합니다(7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우리와 같은 연약함을 많이 가졌지만 약속된 땅과 자손이 주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광야에서 장막생활을 하면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합니다(8-16절).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믿음이 해내는 결과가 제시됩니다. 사라는 믿음으로 구십세에 아들을 낳았고(11절),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녀를 바칩니다(17절). 요셉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획,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며 자기 뼈를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고 부탁하였고(21절), 모세는 믿음으로 왕자의 자리보다 백성과 고난 받기를 택합니다(24-25절).

히브리서 기자는 더 이상 제시하기 힘들 정도로 예시가 많다고 말합니다(32절). 그리고 40절까지 계속해서 믿음이 이룬 것들을 확증합니다(35-40절). 그들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작은 믿음이 의지하는 대상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작은 믿음으로 이 위대한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 증거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오늘 예수님의 교훈과 같습니다. 믿음이 결국 이루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2)

제자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삶의 태도가 이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약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이런 일들을 행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제자들에게 필요했습니다. 이런 일을 해낸 것은 여기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믿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믿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영화 <불의 전차>로 유명해진 영국 육상선수 에릭 리델은 따 놓은 당상이었던 육상경기를 주일을 지키기 위해 포기합니다. 그리고 다른 종목에 출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금메달을 땁니다. 여기까지는 많이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릭 리델의 가장 큰 꿈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중국 선교사로 가서 주님을 섬기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게 해달라고 거듭 기도하며 올림픽을 마치고 중국으로 갑니다. 하지만 그는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투옥되고 결국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습니다. 중국까지 가서 그가 한 일은 무엇이었나?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갇혀있는 삶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무얼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이 좁은 감방에서 내가 무얼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중국 전역을 달려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려 했건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기회나 믿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렇게 실망하고 좌절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령 동시대 사람 허드슨 테일러의 증손자 짐 테일러 같이 9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속해있는 해외 선교협회를 대표하여 전 세계에 수많은 결실을 맺는 위대한 일을 이루면 얼마나 좋을까요? 감옥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그러나 그는 믿음이 부족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기대했습니다. 수용소에서 삶의 좌절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고 자결하려는 사람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하였으며 같은 방에 수감된 동료와 함께 매일아침 비좁은 감방에서 땅콩기름으로 희미하게 불을 켜놓고 하루에 한 시간씩 성경을 공부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더 알기를, 선교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를 원했습니다. 아주 작은 일부터 충성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그 좁은 감방에서 동료와 그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이 사람보다 해외선교협회 대표 짐 테일러가 더 위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더 큰 일을 이루었으니까요. 그런데 누가 짐 테일러를 중국 감옥에서 위로하고 격려하여 살아남도록 도왔을까요? 바로 에릭 리델입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라면 주님은 산이 옮겨지는 큰일을 이루십니다. 에릭 리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다만 하나님을 믿으며 내 앞길에 놓은 어떤 상황도 받아들일 뿐입니다” 바로 제자들과 우리가 해야 하는 고백이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용하실지 믿고 바라고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주어진 상황 가운데 주님께 충성하십시오.

3. 큰 일을 이루어도 마땅한 일을 한 것이다(7~10절)

짐 테일러처럼 위대한 일을 이룬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진 믿음을 통해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실 때 우리는 교만하기 쉽습니다.

설교를 통해 수많은 무리를 끌어 모으는 목사, 봉사와 섬김으로 주변 사람과 세상의 칭송을 받는 사람, 결과가 좋고 열매가 풍성한 사역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바로 성공한 자들입니다.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할까요?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로 겸손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해낸 것이니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서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7절)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 아무도 없습니다”입니다. 그걸 기대하고 물으신 질문입니다.

여기 예수님의 비유 속에 종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종이라고 하면 흑인 노예 등을 생각하는데 그런 종류의 학대와 고통 받는 종이 아니라 숙식, 보호, 공동체를 제공받는 대가로 한 가족을 섬기겠다고 서약한 자발적인 일꾼입니다. 그래서 찰스 스윈돌은 현대의 ‘장기고용인’과 같다고 말합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생존을 위해 스스로 다른 집의 종이 된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는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합니다. 밭도 갈고, 양도 치고, 식사 준비도 하고 집안일도 합니다. 그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고 주인으로부터 은혜를 입는 것에 대한 마땅한 반응입니다. 그 종이 밭에서 힘들게 일하고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주인이 그 종의 밥을 차려 주고 앉아서 먹으라고 하겠냐는 물으신 것입니다.

아닙니다. 8절 말씀처럼,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8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당연히 이렇게 말하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종은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주인을 섬기기 위해 띠를 허리에 띠고 식사 하는 동안 옆에서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그 후에 자신이 먹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9절)

종이 명령한 것에 순종했다고 그것이 감사해야 하는 일이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종이 하는 모든 일은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주인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을 종으로서 마땅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0절 말씀처럼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10절의 결론을 내리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0절)

너희도 이 비유와 나오는 종과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가 주신 은혜와 믿음으로 위대하고 큰일을 이룬다 해도 우리는 주의 종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내가 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 분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하고 내가 이룬 일에 대해 마땅히 칭찬과 감사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아주 강한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바로 “무익한 종”이라는 표현입니다.

‘무익하다’는 것은 쓸데없고, 가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표현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익하다니, 조금은 쓸모 있는 종이 아닌가? 그런데 깊게 생각해보니 ‘무익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위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분의 밭을 경작하고 짐승을 치고 그분을 섬기기 위해 태초에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뜻대로 살면서 파멸에 이르는 궁핍한 삶을 연명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원래 창조된 목적대로 살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과 영원한 처소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그분을 위해 우리가 하는 일은 원래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므로 당연한 일입니다. 엇나간 우리를 구원하여 그분의 일꾼으로 삼아주신 것이니 그 은혜에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원래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것을 돌려드리는 것뿐, 그 이상의 유익을 보태드리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랍비 자카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가 율법에서 많은 것을 이루었다면 너희 자신이 가치 있다고 주장하지 말라 너희는 그런 목적으로 창조되었느니라”

또 한 가지 제가 “무익한 종”이라는 표현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입니다. 그렇지 않은 가정도 있지만 보통 자녀들은 부모를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불효자”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가 받은 무수히 많은 사랑과 돌봄과 보호를 생각할 때, 자신이 부모에게 하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부족하고 항상 모자라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답하는 모든 것이 받은 사랑을 기억할 때 사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이러한 사랑과 은혜의 관계가 크게 강조되지 않지만 다음 나병환자 이야기를 통해 분명하게 전달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무궁한 사랑, 돌봄, 보호를 생각하면 우리는 그 분 앞에 불효자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섬김과 봉사와 사랑이 그 분 앞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언가 해냈다고 생각할 때,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만하게 목에 힘줄 필요 없습니다. TV에 나오는 유명한 목사, 사역자, 봉사자들이 “내가 이런 사람이고 이런 일을 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 저는 참 불편합니다. “저는 무익한 종이며 할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참 아름답습니다. 주가 하신 것이고 우리는 그 손에 들린 도구에 불과합니다.

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보석으로 꾸며진 집이나 정금으로 다진 길, 흐르는 생명수와 생명나무 과실이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의 무궁한 영광 앞에 서서 그분을 찬양하는 것, 제가 정말 사모하는 것이지만 그것도 가장 최고의 장면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의의 면류관을 수여하시는 것도 정말 기대하는 장면이지만 아닙니다. 저는 그 후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주를 믿는 믿음으로 순종하여 의의 면류관을 얻은 수많은 성도가 다시 그 면류관을 벗어서 다시 주님 앞에 바치는 장면입니다. 그때 우리는 외칠 것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오늘 우리는 제자도 그 두 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작은 믿음을 가졌더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이라면 그 믿음으로 하나님은 큰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 안에서 충성하면 주가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큰일을 이루었다고 자만하지 마십시오. 주가 하신 것이며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일입니다. 오직 영광을 그분께 돌려드리고 하나님의 귀한 은혜의 도구가 된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히 11:6).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마가복음에 나오는 귀신들린 아이 앞의 한 아버지처럼 이렇게 주께 간구하십시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 주께서 내 안을 정복하고 있는 악한 영을 제거하시고 주를 향한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