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제자도 1 : 죄를 그냥 넘어가지 마라
본문 : 누가복음 17장 1~4절
설교자 : 조정의
교통사고를 제외하고 10년째 대한민국 국민의 사망 원인 1위인 질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질병에 관해 고대 그리스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생김새가 마치 ‘게 등딱지와 같다’고 생각하여 ‘카르키노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집게가 꼬집는 것처럼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집요하게 달라붙어 있는 병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현대 질병처럼 보이지만 기원전 2500년 이집트에도 이 병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래된 질병입니다. ‘악성종양’이라고도 부르는 이 병의 익숙한 이름은 ‘내 몸에 바윗돌 같은 것이 갑자기 튀어나와 앓는다’는 의미로 ‘바위’를 뜻하는 한자를 써서 “암”이라고 합니다.
이 병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번 발병하면 언제라도 재발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특히 암세포는 우리 몸 밖이 아니라 우리 몸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속에서 다른 지체를 상하게 하고 죽입니다. 생명이 끊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속에서 공격하는 존재가 바로 암입니다. 이 병에 걸리지 않으면 좋겠지만 누구든지 암에 걸린다면 그는 이제 남은 생을 이 병과 끝까지 싸워 이기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생명이 걸려 있기에 느슨하고 하찮게 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모든 사람 속에 있어 그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영적 암세포, 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죄는 암처럼 사람의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강력하게 힘을 발휘하고 자기의 욕구를 이루려고 합니다. 죄는 개인의 삶을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가족,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결국은 육적인 죽음과 영원한 멸망까지 끌어갑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우리까지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영적인 암에 걸렸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한사람도 빠짐없이 우리는 이 영적 질병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영원한 운명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그냥 넘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17장에서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몇가지 교훈을 주십니다. 그 첫번째로 등장하는 교훈이 바로 죄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죄를 절대 그냥 넘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1-2절에 나오는것과 같이 죄는 무겁기 때문입니다.
1. 죄는 무겁다(1-2절)
예수님은 제자들이 죄를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 원하십니다. 죄가 얼마나 강력하고 무서운 질병인지 바로 알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죄로 인해 고통받을 수 밖에 없는 환자라는 것도 아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한 번 잘 생각해봅시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1절a)
먼저 주님은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족”이라는 단어 때문에 조금 의아하신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보통 실족이라 하면 실망이나 상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다치게 할 때 “저 당신 때문에 실족했어요”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실족”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실족”은 문자 그대로 ‘발을 헛디디다, 넘어지다’를 말하는 데 영적인 의미로는 ‘죄의 유혹에 넘어지는 것, 죄를 짓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고 하셨습니다(마 5:29). 눈이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상처를 줘서 빼야 한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눈이 우리가 죄로 넘어지게 하는 도구가 되거든 빼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족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죄를 짓는 것, 죄에 유혹을 받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라고 진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견은 성경의 진단과 일치합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롬 3:10). 솔로몬은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고 했습니다(전 7:20).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 영광을 좇아 살았던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우리 육신이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죄의 유혹을 받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한 성경은 세상이 거짓의 아비 사탄의 권세 아래 물들어 가고 그 세상에 속한 사람 역시 자기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고 말합니다(엡 2). 죄 많은 세상에 많은 죄인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죄의 유혹은 반드시 우리 삶에 찾아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해방하시고 의롭다 선포하셨지만 우리에게 아직 새로운 육신을 주지 않으셨고 이 세상도 아직 새롭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여전히 우리는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죄의 유혹에 빠지는 것, 그 속임에 넘어지고 죄를 범하는 것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서…” “죄악된 세상에서 살다보니…”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성급히 결론내리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런 느슨하고 게으른 태도로 죄를 바라보지 않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1절b)
우리말 성경에는 “그렇게 하는 자에게는 재앙이 있을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화가 있다”라고 경고하신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매몰차게 거절했던 지역(눅 10:13), 외식하는 바리새인(11:42-52), 그리고 심판 때 환란을 면하지 못할 사람들, 아이 밴 자, 젖먹이는 자(21:23),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22:22).
하나같이 심각하고 중대한 일이었고 영원한 운명이 걸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인자한 예수님께서 가장 강력하고 무섭게 경고하고 꾸짖었을 때였습니다.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질병에 대한 선고였고 영적으로는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있는 무서운 죄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죄는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도 우리를 죽이고 영원히 지옥에 들어가게 할 만큼 심각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 간음이요 형제를 미워하고 욕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 성경은 죄의 중함에 대해 말하고 죄의 경중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음욕을 품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드는 지체가 눈이라면 빼내어 버리고 손이라면 찍어 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니까”라고 말하면서 범하는 사소하게 여긴 죄 하나가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옥은 너무나도 무섭고 고통스러운 곳이니 차라리 눈을 빼고 팔을 찍어버리고 지옥을 피하는 것이 낫다고 하시는 겁니다.
죄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결단코 죄를 하찮게 여기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유혹을 받고, 죄를 범하고, 죄로 인해 믿음의 도에서 멀어지는 것 그것을 피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되면 화가 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죄의 넘어뜨리는 것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2절)
여기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는 제자들 가운데 어린 아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은 부모나 어른의 특별한 보호와 돌봄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육신이 약하고 어리숙해서 쉽게 속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들을 가리키면서 이 아이들을 보호하고 돌봐야 하듯,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을 진리로 잘 인도하고 보호해야 하는데 오히려 죄로 이끄는 것이 얼마나 문제가 있는 것인지 보여주십니다.
교회 안에는 영적으로 아직 어린 아이들이 있습니다. 영적인 문제에 무지한 사람이 있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쉽게 입는 사람도 있고 이제 막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여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히 5:12,14-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가르침 받아야할 처지).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죄로 유혹하고 넘어지게 하는 자, 죄를 짓게 만드는 자는 차라리 그 목에 연자맷돌을 매여 ‘깊은 바다’(마 18:6)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연자맷돌은 아주 무겁고 납작한 돌로 나귀나 소에 연결하여 원모양으로 곡식을 돌려 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 속에 던져 놔두면 어떻게 될까요?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누군가를 죄짓게 만드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하신 것입니다.
고대문학에서 바다는 혼동과 악의 무서운 전형적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다에서 실종된 육신은 마지막 때 부활하지 못한다는 속설도 있었습니다. 그런 바다에 무거운 연자맷돌을 매고 던져져 절대 떠오를 가능성 없이 깊이 가라앉는다는 것은 절망과 영원한 파멸을 의미합니다. 재앙이 있는 것입니다. 화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무겁습니다. 그리고 무서운 것입니다. 절대로 가볍게 여기거나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이 무서운 경고를 기억하십시오. 죄의 유혹에 넘어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다른 지체를 죄로 넘어지게 하는 것을 그럴 수도 있는 실수로 여기지 마십시오. ‘성격이 원래 그래서, 말투가 좀 그래서…, 자라온 배경, 환경이 그래서…’라는 건 핑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부모의 이중적인 모습에 실망하여 하나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자녀가 있습니다. 무엇이 그 소자 안에 하나님을 완강히 거부하려는 강력한 고집을 만들어냈습니까? 부모의 죄입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상처받아 교회를 찾아온 영혼이 교회 안에서 더 큰 상처와 괴로움을 당하고 좌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의 죄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가 나를 파멸로 이끌고 내 죄가 다른 이를 병들게 합니다. 성도가 성도를 넘어지게 하고 특히 성도가 약한 성도, 어린 성도를 올바른 길에서 미끄러지고 벗어나게 합니다. 오랜 세월 자라지 못하게 막고 병들어 삶을 낭비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죄가 그렇게 무섭습니다. 절대로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너무 작아서 눈으로는 잘 볼 수 없는 작은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처럼 아무리 작고 하찮아 보이는 죄 하나라도 나와 내 지체를 병들고 죽게 할 수 있습니다.
병을 제대로 치료하려면 먼저 병의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아주 무서운 병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심각한 영적 질병과 싸울 수 있을까요?
2. 죄를 다루라(3-4절)
예수님은 먼저 우리가 스스로 경계하고 싸울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성도(형제)의 죄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① 스스로 조심하라(3a)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Pay attention to yourselves!
질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손을 깨끗이 씻고 물을 끓여 마시고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위험하게 여겨지는 것을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죄에 유혹을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다루는 방법입니다.
물론 우리 안에서 죄를 몰아내고 새로운 심령을 불어 넣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밧세바와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2, 10)
하나님이 내 죄를 모두 지우시고 씻으시며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더럽혀진 마음을 정직하게 새롭게 하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이 주권적인 사역에 동참할 것을 명령합니다. 바로 죄를 경계하고 죄와 싸우라는 것입니다. “조심하라”는 단어는 언제나 변함없이 경계하라는 뜻을 가집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함께 공부한 야고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7-8)
성도를 죄로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마귀를 대항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죄를 짓는 손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올라오는 죄가 무엇인지 그것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고 대처해야 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사냥꾼이 올무로 새를 잡으려고 덫을 놓는 것처럼 죄는 항상 우리 곁에 웅크리고 앉아 언제든 우리 육신이 그 죄에 걸려 넘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오는 죄의 유혹, 내 안에서 일어나는 죄의 유혹을 자세히 살펴보고 경계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죄와 싸우는 성도들을 이렇게 책망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않는다”(히 12:4). 치열하게 싸우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을 진단해보십시오.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바른 것으로 교훈하고 죄악된 생각을 책망합니다. 성경은 우리 삶을 의로운 것으로 교육하고 죄악된 삶을 바르게 교정하는데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딤후 3:16-17). 그러니 갓난아기들이 젖을 사모하듯 성경을 간절히 찾고 그것으로 내 속에 있는 죄를 점검해보십시오. 그리고 세상에 있는 것을 분별하십시오.
‘음란한 생각, 더러운 것, 우상숭배(자기중심적 삶),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분열,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함…’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육체의 소욕 중 나를 계속 넘어뜨리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주는 것들을 검사해보시기 바랍니다. 말세에 죄가 가득한 영향 아래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감사하지 않고 거룩하지 않고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못하고 사납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만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 그런 죄의 강력한 감염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십시오. 스스로 경계하십시오.
② 경고하고 용서하라(3b-4)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Rebuke him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Forgive him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예수님은 다음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이 처방전은 “만일”이라는 조건문으로 시작합니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지금 다른 형제 혹은 자매가 나에게 죄를 범한 경우입니다.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다른 지체가 죄를 범할 때 영향을 받습니다. 때로는 나에게 직접 죄를 범하기도 하고 지체가 범한 죄가 나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가령 나에게 거칠게 말하거나 분노하거나 나를 뒤에서 욕하거나 헛된 소문을 내는 것으로 직접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또 간음이나 중독과 같은 죄를 지어 가정이 깨어지거나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여 마음을 상하게 하고 낙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경고하라. 예수님은 3절에서 두 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하나는 먼저 그에게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경고”라는 말은 “솔직하고 부드러운 책망”을 가리킵니다. 잘못을 책망하지만 예의를 갖춰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짜증난 상태에서 상대의 잘못을 들추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경고는 신실함, 솔직함, 분명함을 갖추고 상대방의 등 뒤가 아니라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경고의 목적은 그 형제나 자매가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죄는 심각하고 무거운 것입니다. 그런 죄를 범하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것은 치명적인 질병을 가지고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와 자매가 그 죄로부터 돌이키고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 안에서 회복을 누리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죄를 다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명령하였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1-2)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범죄한 성도를 찾아가야 합니다. 온유한 심령을 갖추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히 자신을 살펴보며 자신도 같은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가야합니다. ‘어떻게 그런 죄를 범할 수 있어? 그리스도인 맞아?’라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목적은 그 사람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고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다뤄야 할 책임이 그에게 있지만 그 짐을 서로 져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 ‘형제를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의 확실한 적용입니다.
우리는 사실 경고를 성실하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귀찮기 때문입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나서 이야기하는 과정이 힘들고 부담스럽습니다. 물론 나에게 개인적으로 한 작은 실수이고 내가 사랑으로 그 허물을 덮을 수 있는 것이라면 덮을 수 있습니다(잠 10:12; 17:9; 벧전 4:8). 그러나 그것이 나와 형제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그 형제자매와 나 사이에 분열이 생기며 잊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으로 남아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형제를 향한 분노로 작용하고 있다면 그건 사랑으로 덮은 것이 아니라 죄를 다루지 않은 것입니다.
찾아가십시오. 온유한 마음, 겸손함으로 무장하고 찾아가십시오. 내 형제를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의 있게 그 사람의 죄를 스스로 보게 도와주십시오. 한두 번 하고 포기하지 마시고 신실하게 경고하여 죄에서 돌이키게 도우십시오. 그것이 형제 사랑이고 그것이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는 치료법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권합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라(약 5:16)
만일 회개하거든. 두 번째 조건문은 그 범죄한 형제가 회개한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명령어를 사용하여 그런 경우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하다”는 말은 따로 설명이 없어도 다 알고 있는 말이지만 여기에는 신속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 즉시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풀어주다”라는 의미도 있는데 빚을 갚고 손실을 보상하고 응징을 받아야 할 의무에서 벗겨준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회개할 때 우리는 상대방이 그런 무거운 죄책감과 상실감에서 해방하도록 즉시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용서하지 못하는 죄를 짓고 삽니다.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를 들어 그 죄를 꾸짖으십니다(마 18). 하나님으로부터 절대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 동료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으십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렇게 용서하라고 권합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을 대적하여 원수로 있을 그 때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생명을 대신 내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배워야할 용서의 본입니다. 물론 상대방이 죄를 회개하기 전에 관계가 회복될 수는 없지만 그가 범한 죄에 대한 쓴 뿌리와 분노는 내 안에서 풀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이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고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여 속에 있는 복수심과 원한을 제거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용서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노라고 말하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아니 일곱 번 같은 잘못을 범하고 일곱 번 잘못했다고 말하면 이제 진짜 회개입니까? 유대 랍비의 격언에 “세 번 용서하는 자는 완전한 자”라는 말이 있는데 곱하기에 하나를 더한 일곱 번이나 용서하라니요?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큰맘 먹고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줄까요? 라고 물으면서 일곱 번까지 하면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8:22).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죄는 언제라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남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참 작고 부족합니다. 용서할 힘이 없고 내가 받은 상처는 너무 큽니다. 그 때 우리가 바라봐야 할 분이 바로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온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용서를 베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셨습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하나님을 대적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용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없이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하나님을 삶에서 쫓아내고 우상을 만들어 모시고 섬깁니다. 미움과 분노가 도사리고 성령이 기뻐하시는 일보다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합니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약속하면서도 계속해서 같은 죄에 빠지고 넘어집니다.
만일 내가 도박을 하여 사랑하는 부모나 아내나 자녀가 팔려 감을 당하였다면 그리고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면 다시 그 도박을 찾고 즐기려 할까요? 그러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아무런 죄 없는 예수님이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예수님을 입술로 찬양하고 홀로 영광을 받아달라고 기도하면서 그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죄를 날마다 짓는 우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 용서와 사랑을 날마다 풍성히 누리면서 내 형제 자매를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은 얼마나 부끄럽고 가식적인 모습입니까? 나는 풍성한 사랑과 용서를 일만 달란트만큼 받고 한 데나리온의 빚도 풀어주지 못하다니요.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 죄를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완악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자라면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못박습니다(요일 4:20).
오늘 우리는 죄의 심각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죄를 어떻게 다룰지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 죄에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다른 모든 죄는 하나님이 용서하셔도 그 죄는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이 죄와 싸우는 기본 전제입니다. 암세포를 도려내지 않고 아무리 치료와 요법을 따라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 그 암세포를 도려내십시오.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바위처럼 딱딱한 내 마음을 도려내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그분께 맡기십시오. 구하십시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그분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아무리 작은 죄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자 되기 원합니다. 스스로 죄를 경계하고 멀리하고 대항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우기 원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죄를 내 짐처럼 지고 그가 회개하도록 온유하고 겸손하게 경고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 안에서 하고 계시는 일이 그것입니다. 죄에서 멀어지고 아들의 아름다운 형상을 닮게 하는 일입니다. 그 일에 기쁨으로 적극적으로 함께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따라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