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대로 알고 싸우자
본문: 디모데전서 1장 18-20절
설교자 : 이병권
다음의 경우에 어떤 아버지가 더 좋은 아버지일까요? 자녀에게 싸우지 말고 참으라고 가르치는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일까요? 아니면 자녀에게 싸우라고 권하면서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 어떻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일까요?
자녀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에 따라 해줄 수 있는 조언이 달라지겠지만 상식적인 부모라면 자녀에게 싸움을 권하지는 않습니다. 싸우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고 더 큰 문제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상반되는 말이 같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이 말을 듣는 자녀라면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왜 이랬다 저랬다 하시냐고 따질 수 있지만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한다면 다른 말씀을 하는 이유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반대되는 두 가지의 말을 하는 사람이 바울이라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다르게 생각할 것입니다. 바울이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을 했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 이유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싸우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범사에 오래 참으라고 인내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싸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싸워야 할까요? 싸우지 말아야 할까요?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싸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는 싸워야 하는 싸움이 있고 싸우지 말아야 하는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알고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면 싸우지 말아야 하는 싸움에서 이기려고 애를 쓰다가 정작 싸워야 하는 싸움에서 힘이 빠져서 제대로 싸우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인 사탄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엉뚱한 싸움으로 유혹합니다. 우리 가진 것을 낭비해서 주님을 위한 싸움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싸울 때를 알고 싸우지 말아야 할 때를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 알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싸워야 하는 싸움을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싸움” 싸움이라고 해도 다 같은 싸움이 아닙니다. 싸움 중에는 선한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싸움은, 성경이 명령하고 있는 싸움은 선한 싸움입니다. 선한 싸움이 아닌 싸움은 피해야 합니다.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싸움은 싸우면 싸울수록 우리에게 축복이 되지만 선한 싸움이 아닌 싸움은 싸우면 싸울수록 문제가 됩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에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선한 싸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선한 싸움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때 선한 싸움에 대한 명령을 제대로 따를 수 있고 선한 싸움을 명령한 이유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한 싸움이 주는 유익과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며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싸워야 하는 선한 싸움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에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지난 본문에서 바울은 짧은 간증을 나누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다시 디모데를 향한 권면의 말을 이어갑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들 디모데야”(18) 바울은 다시 주의를 환기시키며 디모데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사랑으로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권면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18)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바울의 명령이 중요한 것은 서신을 시작하면서 했던 이 명령이 서신의 마지막에도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6장 12절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명령을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생각하며 거듭 강조하는 의미 있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 선한 싸움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선한 싸움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선한 싸움은 이런 거고, 너희가 싸워야 할 싸움은 이런 종류의 싸움이야’ 설명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한 싸움은 이런 싸움입니다. 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한 싸움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명령 앞에 있는 말씀과 뒤에 있는 말씀이 힌트라 할 수 있습니다. 앞뒤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 두 가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명령 앞을 보면,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1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디모데가 전에 예언을 받은 적이 있는데 선한 싸움은 그 예언을 따르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받은 예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성경의 다른 기록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디모데가 장로들에 의해 안수를 받았을 때 있었던 예언입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4:14)
디모데는 예언을 통해 은사를 받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디모데는 하나님으로부터 직분과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봉사할 수 있는 영적인 재능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뜻에 따라 디모데를 부르셨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그 능력으로 맡겨주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싸움은 예언을 따르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권위와 은사를 사용하는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선한 싸움은 하나님을 위한 일입니다.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은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그 뜻에 따라 교회를 돌보는 일이 선한 싸움입니다.
디모데가 하나님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웠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그 선하신 계획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에게 영적인 재능을 주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선한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따라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갑니다. 서로가 서로를 말씀으로 세워주고 세상의 거짓들에 대해서 대항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군사로서 악한 영들과 싸우며 세상 풍조와 죄에 맞서 계속해서 선한 싸움을 싸웁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선한 싸움이 가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자를 택하셔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선한 싸움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은혜로 선한 싸움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은혜를 잊어버리고 악한 싸움을 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한 번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선한 싸움인지 악한 싸움인지, 나는 지금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지 세 가지로 점검할 수 있습니다. 싸움의 대상, 싸움의 방법, 싸움의 목적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족끼리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면 어떨까요? 남편과 아내가 싸우는 것 부모와 자녀가 싸우는 것은 선한 싸움이 아닙니다. 가족끼리 싸우면 안 됩니다. 영적인 가족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자매가 서로 다투고 싸워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연약해서 종종 싸울 때가 있고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빨리 돌이키고 용서를 구하고 잘못을 용납해야 합니다. 우리는 잘못된 대상으로 싸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잘못된 방법으로 싸우면 안 됩니다. 선한 싸움, 하나님을 위한 일은 그 방법도 선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를 악하게 대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들입니다. 악은 하나님이 갚으십니다. 선한 싸움은 그 방법도 선해야합니다.
또한 우리는 잘못된 목적으로 싸우면 안 됩니다. 선한 싸움의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위해서, 내 욕심을 위해서, 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하는 겁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잘못된 대상과 방법과 목적으로 싸우는 것은 선한 싸움이 아닙니다. 그런 싸움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한 싸움은 하나님을 위한 일입니다.
그럼 다음으로 선한 싸움이 무엇인지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명령 뒤에 나오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19)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명령합니다. 여기 “가지라”는 말은 ‘붙잡으라,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나에게 없는 것을 노력해서 얻으라는 말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계속 유지하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은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를 뿐만 아니라 나 혼자를 두고 비교한다 하더라도 시간에 따라 세월에 따라 믿음과 착한 양심이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이 더 깊어지고 양심이 더 민감하게 될 때도 있지만, 반대로 믿음이 얕아지고 흔들리고 양심이 무뎌질 때도 있습니다.
믿음과 양심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둘은 서로 연관 되어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주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으로 견고하게 서있다면 양심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깨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흔들리고 무너진다면 양심도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과 양심을 따로 생각해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믿음이 있으면 그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만드신 피조물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양심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마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양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양심이 깨어있는 사람은 나름의 기준으로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더 크게 양심의 일깨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착한 양심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느끼고 그 하나님에 대해서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착한 양심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심을 알기에 행동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심이 깨어있지 않다면, 무뎌져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믿음이 좋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믿음과 착한 양심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싸움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싸움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기에 믿음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양심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제대로 싸울 수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심을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본문에서 양심을 버린 두 사람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은 양심을 버렸기 때문에 그 믿음에 관하여 파선합니다. 여기서 양심을 버렸다고 할 때 버렸다는 말은 ‘밀어 내고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 양심이 일깨우는 소리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의도적으로 밀어내고 거부한다면 결국 그 믿음에 파선하게 될 것입니다. 배가 항해를 하다가 암초에 부딪혀서 침몰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달리기를 중단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양심은 무뎌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괴로워하다가 무뎌지게 되면 죄에 대해서 익숙하게 되고 죄가 자연스러워집니다. 계속 죄를 지으면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는 것처럼 그 죄에 대해서 감각이 없어지고 더 큰 죄도 용납하게 됩니다. 결국 양심을 버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죄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주유소에서 이런 현수막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기름만 팔고 양심은 팔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양심을 팝니다.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쾌락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양심을 쉽게 내어버립니다. 일시적인 기쁨을 위해 싸구려 만족을 위해서 양심의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고 하나님을 무시하려고 눈을 감아버립니다.
하지만 선한 싸움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 임재하심 가운데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의 양심을 통해 말씀하실 때 믿음으로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선한 싸움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디모데가 해야 했던 일과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했던 일을 대조해서 다시 생각해봅니다. 디모데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했습니다. 선한 싸움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그 반대의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바울은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20) 그들이 했던 일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비록 파선했지만 믿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했던 일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욕했을까요? 하나님을 저주하며 망령된 말을 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들이 한 일은 선한 싸움에 반대되는 일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는 것, 우리가 악한 싸움을 싸우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내 욕심을 위한 일을 할 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는 일을 할 때 그 때부터 우리가 하는 일은 선한 일이 아니라 악한 일이 됩니다. 결국 그렇게 사는 것은 내 삶에 있는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대우를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시고 그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쉽게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말하면서 정작 내 마음 중심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양심을 속일 수 있습니다. 내 욕심을 감추고 겉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잘못된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목적과 마음의 동기를 숨기고 아닌 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지 아니면 악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지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그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서 선한 싸움을 계속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러한 수고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시고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을 주님이 아십니다. 그러니 선한 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주님을 위해, 끝까지 주님과 함께 싸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