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정의의 시국선언
설교자 : 조정의

지금은 국가 초유의 사태라고 하여 많은 미디어에서 연일 정치와 사회 문제들을 심각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관련한 비리와 권력 남용 등의 문제로 전국 곳곳에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대규모 촛불시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이 오늘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훨씬 더 비인격적이고 폭력적인 사건, 더 큰 사회 문제들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하지 않았던 분야의 공부를 했습니다. 그동안 귀기울이지 않았던 정치계의 다양한 뉴스들을 섭렵하고, 현 사태를 분석한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패널이 나와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했습니다. 팀 켈러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유명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내린 결론은, ‘모르겠다’입니다. 저는 정치 사회 전문가도 아니고 법률 전문가도 아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드릴 수는 있으나 저는 목회자로서 개인의 견해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라고 하여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정책이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한쪽 견해를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로서 저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 아래서 지금의 현안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목회할 대상은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성도들이기에 우리가 이 시국에서 잘못하고 있는 점들, 또는 잘못 할 수도 있는 문제들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시국에서 어떻게 정의를 실현해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빌 3:20)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구약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체류자)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예수님이 하신 정치적인 발언 중에 가장 저를 충격 받게 한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더 이상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 국가적인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우선순위를 가져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기 전에 하늘나라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과 대한민국의 법이 충돌한다면 하늘나라의 법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 나라와 의입니다(마 6:33).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을 헌신적으로 돕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나 만일 그 사람의 자녀가 집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러한 우선순위를 바로 갖춰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실 때 목적하신 것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딛 2:14)입니다. 대한민국에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 참여할 때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노력하는 선한 일의 일환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안중에 없고 이 세상에 것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치와 사회를 아는 일보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더욱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죄와 싸우기 보다 세상의 죄를 비판하는데 힘을 쏟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정에 하나님과 원수된 자녀가 있는데 국민의 원수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촛불시위나 정치적인 참여에 대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우선순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임할 수 있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어떤 사람은 ‘국가 없이 종교가 있을 수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과거에는 국가가 없는 시대가 있었고 거대 제국이 있었던 시대, 그 제국이 나눠진 시대가 있었으나 이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대로 이뤄가셨고 지금도 이뤄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결정하는 정치적 선택이나 정책의 결정에 모든 것이 걸려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멸망할 이 세상에 거주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견고한 나라입니다. 정치와 사회 문제에 있어서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나라는 영원토록 변하지 않고 멸망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현실을 부정하게 하거나 사태를 방관하게 만들기 보다는, 올바른 우선순위와 균형을 가지고 사태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2.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불의에 대한 정의를 외칩시다(시 33:5)

우리는 불의에 대해 정의를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여호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 33:5). 최근에 미국에서는 대선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많은 언론에서 ‘힐러리와 트럼프 중 누가 덜 악하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기독교 목회자들 중에도 공화당과 민주당 중 누가 더 성경의 기준으로 악한 정책을 가지고 있느냐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공화당은 가진 자를 위한 정치, 차별, 억압, 부패가 있었고 민주당은 동성애, 낙태를 보장하는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사안에 대해 정의를 외칠 때 실수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에 따라 어느 쪽은 심각한 문제라고 보고 어떤 쪽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집니다. 의혹을 낳고 있는 대통령에 대해서 판결이 내려진 것이 아닌데 죄인 취급을 하고, 반대로 이는 역대 대통령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라고 말하면서 의혹을 가지는 것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부에 순종하라”(롬 13:1-3)는 명령으로 정치 지도자의 불의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꺼리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성경의 올바른 적용이 아닙니다. 성경은 정치 지도자의 죄에 대해서 묵인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도 헤롯의 문제를 질책했고 예수님도 당시 세워진 종교 지도자들에게 가장 심한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의 불의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외쳐야 할까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세상의 불의에 대해 말할 때 기억해야 할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과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롬 3:23; 6:23). 세상은 죄에 대한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어떤 사람은 죄인이고 어떤 사람은 봐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사태에서 염려가 되는 것은, 기득권을 악의 실체로 바라보고 국민을 순수하고 죄 없는 피해자로 몰아가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 앞에 죄인입니다. 그들이 범하는 죄의 질이 다르고 경중이 다르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외쳐야 할 정의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저희 집 앞에 큰 길이 생겼는데 감시 카메라도 생겼습니다. 출퇴근 시간에 많은 차들이 감시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우회하여 가는데 가끔 우측에서 내려오는 차와 부딪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신호위반 정도는 큰 범죄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세상의 정의라면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이번 일로 검찰청에 들어가면서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내가 죽여주겠다’며 굴착기를 가지고 검찰청에 들어간 사람이 있습니다. 기물 파손 죄로 많은 돈을 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그 사람을 칭찬하고 금전적인 도움을 주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큰 죄를 바라보면서 이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런 기준으로 죄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갈릴리 사람 중 몇 명이 빌라도의 손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 당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죄가 너희보다 더 중한 줄 아느냐?고 물으시면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3:1-3). 하나님의 기준은 회개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도 하나님의 앞에서 죄인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을 간과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대통령은 아무리 회개해도 구원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정치 지도자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랬듯이 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저 역시 많은 보도들을 보면서 분노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원하시는데 저런 불의를 행하다니’라는 공분이 들다가 이상하게도 점점 시간이 갈수록 그 공분은 증오로 변해갔습니다. 올바른 것으로 시작해도 나중에는 더러운 말을 섞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우리 연약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를 범하면서 죄와 싸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모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누구보다 죄를 꾸짖으셨습니다. 죄인과 세리들에게 죄악된 삶에서 돌이키라고 하셨고 종교지도자들에게 외식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인을 진실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루살렘의 회개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저주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죄 없는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죄인을 대하셨다면, 연약하고 죄 많은 우리는 죄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겠습니까? 불의에 대한 정의는 반드시 죄인에 대한 긍휼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3. 복음의 능력을 전파합시다(마 5:14)

우리는 복음을 들고 시위해야 합니다(마 5:14). 우리는 이 땅에서 조금 더 나은 사회 구조를 위해 노력하지만, 죄의 문제를 가진 채로는 이상적인 국가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세상은 영원한 멸망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침몰하는 배와 같습니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안전한 그곳,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중입니다. 이 시국에 어떻게 그러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요. 촛불 집회에 나가 ‘예수천당 불신지옥’ 피켓을 들고 있으면 될까요? 그건 지혜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가 선하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도록,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평안하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세상 사람들이 죄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둘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와 싸우고 서로를 사랑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며 참된 소망을 보여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수동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기도는 가장 중요하고 무엇보다 기초가 되는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시국에 세상 사람들은 낙담하고 충격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면서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물어올 것입니다. ‘너희들 안에는 과연 무엇이 있길래 이렇게 견고한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거룩한 삶은,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해 순종하는 것(법을 지키는 것)과 직장에서 주의 영광을 위해 성실히 일하는 것, 질서에 순응하는 것, 남편과 아내가 서로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것, 성도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겸손하며 서로에게 죄로 대응하지 말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삶의 모습을 힘있게 살아내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우리는 온전하고 경건하며 단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시국에 우리의 소망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마 28:19-20). 요즘 사람들의 관심 속에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과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자유와 평등을 중요시하고 국민들과 소통하는 모습에 우리 나라 국민들은 감명을 받지만, 정작 그 나라 국민들 중에는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악된 이 세상에 완벽한 지도자, 이상적인 리더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세상이 간절히 소망하는 그 나라에 이미 속해있다는 사실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소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침몰하는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아는 자는 그 길에 대해 말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자세로 혼란한 정국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사느냐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기억하자고 말씀 드렸고, 세상에 공의를 외치되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외치자고 말씀 드렸습니다. 또한 복음을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몇 년 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최근의 혼란스런 시국을 접하면서도 마음이 어려웠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복음이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여겨져서 당혹감이 일었습니다. 이 시국에 가장 문제가 되는 자도 구원받으면 영원한 천국에 가고 이 시국의 가장 불쌍한 희생자도 구원받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볼 때 뭔가 불의처럼 보이고 복음이 복음 같지 않게 들리는 이러한 메시지가 진정 모든 불합리한 현실을 압도하는 진리가 되는 것은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의로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은혜의 보혈은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다 씻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그들의 불의에 대한 심판은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에게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은혜로 모든 죄인의 회개는 그 죄의 크기와 관계 없이 더 큰 은혜로 인해 용납됩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죄만큼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그 죄가 우리 기준에 아무리 작게 보인다 해도 영광의 주를 거절한 죄에 대한 대가인 영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심판을 십자가에서 받으셨기에 우리는 세상의 모든 불합리함을 견딜 수 있습니다. 모든 심판, 공의, 자비가 그 십자가 위에서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시국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