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진, 안락함을 뒤로하다
본문 : 룻기 2장 17-23절
설교자 : 이병권
룻 2:17-23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21]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22]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요즘 메르스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사람들이 메르스의 위험 때문에 염려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정말 위험한 건데,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방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겁니다.
그게 뭘까요?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안락함”입니다. 혹시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에이 뭐야? 별거 아니네.’ 혹은 ‘좀 과장해서 말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합니다. 안락함 그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안락함에 있을 때, 방심해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심각한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안락함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서, 이걸 잘 다루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러한 수많은 예를 성경에서는 물론, 뉴스를 통해서도 계속 접할 수 있습니다. 로또에 당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불행한 삶을 살게 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신실하게 의지했던 다윗이 어떨 때 죄에 빠졌습니까?
안락함은 좋은 것이지만,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안락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서 때로는 정말 위험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뭔가 편하고, 여유로워진 상태, 어려움이 별로 없는 상태, 이런 상태는 참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해이해지기도 하고, 나태함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간절함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절실히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내 삶이 잘 굴어갈 것 같은 겁니다.
물론, 누가 감히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은 겁니다. 어떤 중요한 선택을 하고, 어떤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언제나 내가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있는 겁니다.
이것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안락함을 누릴 때, 풍족하고 어려움이 없을 때, 하나님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는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괜찮은 겁니다. 우리는 좀 살만해졌고, 그래서 많은 경우에 크게 아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 겁니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적당히 있고, 적당히 잘 돌아가고, 별 문제가 없으면, 오히려 영적으로 나태해질 수 있고, 위험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럼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말해 등 따시고, 배부르고, 살만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영적인 위험에서 벗어나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그에 대한 교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전진, 안락함을 뒤로하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룻과 나오미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모압에서 돌아왔을 때에 비하면 정말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 때 상황에 비하면, 배부른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본 것처럼, 룻은 보아스의 호의로 그의 밭에서 이삭을 주웠습니다. 하루 종일 주운 이삭을 떨고 보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었습니다. 대략 15에서 20킬로 정도 되는 양입니다. 룻은 첫날부터 정말 엄청난 양을 거두었습니다. 두 여인이 한동안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많은 양입니다. 룻은 그것을 가지고 와서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라 보아스가 대접했던 음식, 그 볶은 곡식도 가지고 와서 나오미에게 주었습니다.
나오미의 휘둥그레진 눈과 아주 흥분된 표정을 상상해보십시오.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와~ 대박!” 나오미는 감탄과 놀라움으로 룻에게 묻습니다.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19). 아마 굉장히 빨리 말했을 거 같습니다. 룻이 대답할 틈도 없이 말입니다. “웬일이니, 웬일이야! 어디, 어디서 주웠어? 어디서 일했니? 어떻게 주웠데? 누가 이렇게 많이 줍게 했니? 그 사람은 복 받을 사람이야!” 우리네 어머니들에게서 볼 수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나오미는 룻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를 배려한 사람을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누구의 특별한 도움 없이는 하루 동안에 이렇게 많은 곡식을 주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질문에 룻은 그 사람의 이름이 보아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더 흥분해서 말합니다.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20). 나오미는 여기까지 말한 다음, 그러고는 뭔가 중요한 생각을 한 듯,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이렇게 말을 이어갑니다.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20).
여기서 룻기에서 아주 중요한 말인 “기업 무를 자”가 나옵니다. 기업 무를 자는 친족 중에서 대가를 지불하고 나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은 다양했습니다. 팔린 땅을 다시 사는 것뿐만 아니라 종으로 팔린 사람을 사오기도 했습니다. 또한 형제가 자녀 없이 죽었을 때 그 과부와 결혼해서 가계를 이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살인당한 친족의 원수를 갚아주기도 했고, 이러한 다양한 책임을 기업 무를 자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가까운 친척인데 이렇게 룻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을 볼 때,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3장에서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나오미는 보아스가 땅을 다시 찾아주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며느리 룻과 결혼해서 가계를 이어줄 가능성까지 보았습니다. 나오미에게는 새로운 꿈이 생긴 겁니다.
나오미의 흥분된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룻도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갑니다.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21).
특별히 여기서 룻기의 저자는 여전히 룻을 “모압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룻기를 읽는 사람은 룻이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룻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방 여인입니다. 이것은 룻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보아스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압 여인인 룻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런데 룻의 말을 듣던 나오미에게 염려 되는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룻의 말 중에 “소년”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 겁니다. 그래서 룻이 조심하도록 시어머니의 따뜻한 조언이 이어집니다.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22).
룻은 시어머니의 이 조언을 흘려듣지 않습니다. 그대로 순종합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23). 그렇게 룻은 보리 추수는 물론,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이삭을 줍습니다. 이 시기를 우리 달력으로 치면 4월 중순부터 시작해서 7주가 되는 기간입니다. 룻은 거의 두 달에 걸쳐서 보아스의 밭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럼 이 동안에 룻은 얼마나 많은 이삭을 주웠을까요? 매일같이 첫날에 주웠던 것처럼 많은 양의 곡식을 얻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대략적으로 생각해보면, 두 사람이 함께 그 해 겨울까지 넉넉히 먹을 수 있는 양을 주웠을 것입니다. 두 달을 이삭만 주웠는데 한 해 양식이 해결된 것입니다. 자기 소유의 땅이 하나도 없는 이방인 과부가 이처럼 많은 곡식을 얻게 된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두 과부, 나오미와 룻은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장에서는 보아스와 룻의 흥미로운 사랑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그럼 이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한 걸음 더 전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우리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룻이 밭에서 많은 양의 보리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나오미는 앞으로 얼마간은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럴 때 나오미는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했고, 그 은혜의 통로가 된 보아스를 축복합니다. 나오미는 두 번이나 반복해서 하나님이 그에게 복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 말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아스를 통해서 나에게 복을 허락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보아스에게도 복을 허락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에게 복이 주어졌을 때, 그 출처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복을 주셨는지 알고, 그 복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겁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은 쉽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합니다. 진짜 어려우면 하나님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이 해결되면, 그 긴장에서 풀려나면, 더 이상 그렇게 하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해마다 수능시험 때가 되면, 수험생 부모들은 정말 열심히 기도합니다. 큰 교회들은 특별 기도회를 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열심을 냅니다. 어떤 교회는 수능 당일에 수능 시간표에 맞춰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간절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수능이 끝나면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그런 열심으로 하나님을 기억하거나 영광 돌리지 않습니다. 수능을 위한 기도회는 흔히 볼 수 있지만, 수능이 끝난 후에 드리는 감사 기도회는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수능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팔공산 갓바위에 모여서 불상 앞에 절하며 소원을 비는 것과 뭐가 다를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을 간절히 찾다가, 그런 후에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안락함이, 편안함이 주는 위험입니다. 우리는 상황이 좋아지면,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복 주신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 분 없이도 살만하니까, 별 문제없이 잘 살 것 같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당부한 것입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1-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정확하게 그렇게 했습니다. 살만하게 되니까, 여기 모세가 하지 말라고 한 것을 다 합니다. 하나님 잊어버리고, 자기들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면서 우상을 좇아가는 겁니다. 복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말씀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인생에서 문제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닙니까? 그냥 큰 문제없이 잘 지내고 계십니까? 아쉬운 것 없이 잘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때가 오히려 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렇게 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만에 빠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시고, 복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공로를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여기까지 이끄시고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공로라고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복을 그 분의 의도에 맞게, 주님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더 큰 꿈을 꾸며 그 꿈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나오미는 룻으로부터 보아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가슴속에 새로운 소망을 품게 됩니다. 꿈이 생긴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기업 무를 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모르는 룻을 이 보아스의 밭으로 이끄셨다면, 그리고 보아스가 이방 여인 룻에게 이토록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면, 어쩌면 이보다 더 큰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직은 정확히 모르지만, 그분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는지, 어떻게 이루실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어쩌면 이게 그냥 몇 달 양식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큰 어떤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완전히 몰락한 것 같았던, 자신의 집안이 회복 될 수 있는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나오미로 하여금 꿈을 꾸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구체적으로 룻을 통해서 이 꿈이 실현되도록 노력합니다. 나오미는 지금 눈앞에 있는 풍성한 곡식으로 안주하지 않습니다. 룻을 통한 일시적인 안전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꿈을 꿉니다. 어차피 추수기는 끝이 날 것입니다. 이삭을 줍는 것도 끝이 날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보다 큰 꿈을 꿉니다.
우리가 안락함 가운데 있을 때 만나는 위험은 안락함, 그 자체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푹신한 소파에 눌러 앉아서 TV 리모콘을 들고 허니버터칩을 먹으면서, 그냥 그렇게 사는 겁니다. 우리의 소명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안락함에 길들여져서 사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락함을 주시는 것은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단지 안락함을 위해서, 안락함을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자원을 이용해서 더 크고 더 높은 삶의 목적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왜 사는 겁니까? 더 안락하기 위해, 더 가지기 위해, 더 얻기 위해 사는 겁니까? 지금 내게 있는 안락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사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내게 있는 안락함에 빠져서 그것으로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꿈을 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 꿈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이루어가며,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나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 주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매여 있는 꿈이 아니라, 이 나라에 속한 꿈이 아니라, 보다 더 큰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꿈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꿈을 위해 나의 자원을 드리고, 이 꿈을 위해 나 자신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을 위해 헌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냥 우리끼리 동아리처럼 모여서 우리끼리 좋아하고 우리끼리 즐기고, 그냥 우리끼리 편안하게, 아무런 부담 없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과 사랑과 임재와 통치와 그 영광을 위해, 우리가 받은 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는 일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쓰임 받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어떤 헌신이 요구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꿈을 품고서, 그 꿈을 실현해가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삶이 안락하고 편안할 때, 별 문제없이 괜찮을 때, 그 때에 하나님이 이러한 복을 주신 목적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 영광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안락함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반응에 따라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안락함을 어떻게 다루시겠습니까?
우리는 안락함을 진정한 축복으로 만들기 위해서 등 따시고 배부른 그 때에 복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며 그것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안락함이 주는 위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위험은, 안락함을 통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위험은, 안락함 그 자체로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락함을 주신 것은 그 복이 우리에게만 머물러 있기보다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뜻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그 의도를 이해하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십시오.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와 통치가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안락함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전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