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전도의 인물들
본문: 사도행전 16장 6~34절
설교자: 최종혁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복음 전도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부담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전도의 중요성”에서 배웠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분명한 명령을 주셨는데 제자인 우리가 그 명령에 아무런 부담을 못 느낀다면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멸망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보며 아무런 부담이 없다면 그 역시 정상은 아니다. 진심으로 천국과 지옥을 믿고 있고, 영원한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곳을 향해 아무것도 모르고 가고 있는 사람을 보며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복음 전도에 대한 부담은 거룩한 부담이다.

그런데 이 거룩한 부담이 단지 부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전도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만 전도를 하지 못해서 느끼는 부담이다. 이럴 때 우리는 그 부담을 좀 줄이고자 여러 핑계와 같은 말을 한다. “저는 선천적으로 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힘들어요. 거절당하는 것이 두렵고 그 후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아직은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할 지 잘 모르겠어요. 좀 더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아마 많은, 어쩌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그나마 자신을 위로하며 전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담 혹은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대부분 “결국은 핑계죠. 좀 더 영혼들을 사랑하고 주님 말씀에 순종해야죠.”라는 결론을 내린다.

사실 위에 언급한 핑계 같은 말들이 전혀 의미가 없는 말들은 아니다. 그런 부분들이 실제로 전도를 하려고 할 때 어려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바로 잡으면 그것들이 꼭 어려움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바로 복음 전도에 대한 시각을 성경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전도가 전도지 뭐 크게 잘못 생각할게 있냐 싶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복음이 실제로 어떻게 확장되어 가고 영혼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잘못된 부담이나 죄책감을 가질 수도 있고 반대로 잘못된 기대나 성취감에 빠질 수도 있다. 사도행전 16장 6-34절의 말씀을 통해 복음의 역사가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을 생각해 보자.

사도행전 16장은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 여행의 사역지를 둘러보려고 하다가 바나바와 갈라서고 실라, 디모데 등과 함께 따로 2차 전도 여행을 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6절에서 34절은 그가 어떻게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관문에 있는 빌립보 지역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복음이 전파되고 영혼이 구원 받는 역사에 관여하는 세 등장인물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과 사탄, 그리고 사람이다. 이 전도의 인물들(?)이 전도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중심으로 실제 복음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살펴보자.

1. 하나님 – 복음을 확장함 (6-15절)

하나님은 복음의 역사에 있어 가장 주체적인 역할을 하신다. 바로 복음을 확장하는 일이다. 다른 모든 일들도 그렇지만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시면 단 한 영혼도 구원 받을 수 없다. 영원 전에 구원을 계획하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그 구원 계획을 이루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지금 영혼을 구원하는 일도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다는 말이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영혼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보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믿지 않는 자가 그 전해진 복음에 반응하게 하신다.

A. 하나님은 믿는 자들이 복음을 전하도록 인도하신다 (6–10절)

6절 : 아시아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성령”이 막으심

7절 : 비두니아로 올라가고자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으심

8-10절 : 결국 환상을 본 후에 “하나님”이 마게도냐로 부르신다고 결론을 내림

바울은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하고 하나님은 막으셔서 다른 곳으로 인도하신다. 왜 하나님은 바울이 아시아로 가는 것을 막으셨을까? 바울이 잘못된 동기로 아시아로 가려고 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바울이 원했던 것은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행하지는 않았다. 단지 바울은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계획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고 자신의 지혜안에서 계획하고 움직였을 뿐이다. 여기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바울이 아시아가 아닌 마게도냐에서 복음을 전하기 원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확장하는 주체로서 원하시는 대로 바울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바울이 아시아가 아니라 마게도냐로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하셨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비슷한 일들을 자주 볼 수 있다. 8장을 보면 예루살렘에 믿는 자들에게 핍박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핍박으로 인해 성도들은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행 8:4). 핍박을 당한 성도들은 괴로웠고 그 때문에 흩어져야 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렇게 복음이 필요한 곳에 일꾼을 보내셨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빌립이다(행 8:26–40). 여기서는 아주 더 구체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 하나님은 빌립을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베드로도 그러했다(행 10). 하나님은 베드로를 고넬료라는 이방인에게 보내신다. 그것을 원하지 않았던 베드로를 보내기 위해 3번이나 같은 환상을 보여주어야 했다. 또한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로서 세움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행 13:2).

이렇듯 하나님은 원하시는 대로 사람들을 복음을 위해 보내셨다. 때로 사람들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체 다른 장소로 보내지기도 했다. 때로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의 계획과 달랐다. 때로 하나님의 계획을 사람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복음을 확장하는 주체이시기 때문이다. 복음을 확장하는 것은 우리의 뜻이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된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우리를 어느 특별한 장소로 보내주시기를 바라고 기다려야 할까?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첫 번째, 사도행전은 놀라운 일로 가득하지만 사도들이 하나님의 그런 특별한 인도하심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없다. 그들은 언제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움직였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복음전도)에 따라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여기 바울의 경우가 그렇다.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을 때, 그곳에 가만히 있으면서 ‘그럼 제가 어디로 가야할지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다. 두 번째 비두니아로 가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그럼 두 번째니까 그곳에 가만히 있었을까? 아니다. 그는 드로아로 내려갔다. 계속해서 계획을 세우고 움직였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분명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 전도의 뜻이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필요한 곳에 보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는 말은, 우리는 이미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있어 전도지(사역지)가 아닌 곳은 없다. 여기서는 내가 전도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기만 하시면 그곳에서는 내가 열심히 전도하겠다는 생각은 틀렸다. 그러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어느 곳이든 그곳이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곳이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나는 어쩌다가 이런 집안에 태어나게 됐는지, 나는 어쩌다가 이런 직장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됐는지, 고민할 필요 없다. 하나님은 그곳에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신 것이다. 전도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고 주권적으로 필요한 곳에 우리를 보내셨다. 바울을 마게도냐로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셨음을 잊지 말라. 우리가 고민할 것은 ‘어디서 복음을 전할까’가 아니라 ‘이곳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까’이다.

B.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이 복음에 반응하도록 마음을 여신다 (11–15절)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바울은 빌립보에 도착한다. 바울은 그 지역에서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다 했다. 기도할 장소를 찾아 나섰고 강가에 앉아있던 여자들을 만나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중에 한 여인(“루디아”)의 마음을 여신다(14절). 그 결과 루디아는 구원을 받고 침례를 받는다.

루디아 한 사람만 바울이 전한 복음의 말씀을 들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많은 사람 중에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다. 왜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자들을 선택하셨고 그들이 복음에 반응하도록 하신다.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선택의 교리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국 한 영혼이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주권적으로 택하시고 그에 따라 그가 복음에 반응하게 하심으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람이 아무리 설득력 있게 말해도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지 않으시면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전하는 자, 전도자가 구원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던 자가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쉽게 말해 내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 말씀에서도 바울이 루디아를 구원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전도자가 구도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자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와 경고를 동시에 준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니, 지금 이 사람이 거절했다고 해서 그것이 최종적인 거절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내가 이 사람을 보는 것은 마지막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는 과정 중에 나는 하나의 돌 계단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최종적으로 복음을 전해 구원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 너무 초조해 하거나 할 필요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된다.

또한, 나를 통해 누군가가 구원 받았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을 구원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이니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구원시킨 사람이 몇 명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굳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그 귀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신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복음 전도 사역에 있어 하나님의 역할만 제대로 이해해도 여러 오해와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다(롬 1:1). 그 복음을 전하는 전도 사역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라.

복음을 확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모든 일이 우리 입장에서 잘 풀릴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사역에는 또 다른 등장인물, 사탄이 있고 그의 역할이 있다.

2.  사탄 – 복음을 방해함(16-24절)

사탄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사역을 방해한다. 복음의 메시지를 대적하고 복음의 메신저를 대적한다.

A. 사탄은 복음의 메시지를 대적한다(16–18절)

앞의 사건과 같이 바울은 기도하는 곳으로 가고 있었는데 말씀에 마음을 연 사람 대신 이번에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난다(16절). 이 여종은 크게 소리 지르며 바울을 괴롭게 했다. 귀신들린 여종은 첫 눈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 귀신은 여종을 폭력적으로 만들지도 않았고 아프게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언함으로 그 주인들에게 이익을 주었다. 17절에서는 오히려 바울이 구원의 길을 전한다고 선포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특별히 이 여종이 계속해서 바울을 따라다니며 소리 지른 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방해하고 대적하는 일이었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 이 표현은 당시 ‘성경의 하나님’만을 칭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인들에게는 ‘제우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극히 높은 신은 그였다.

“구원의 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연상케 하는 말이지만 당시 이방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많은 ‘구원자들’이 있었다. 당시 황제들도 스스로를 “구원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여종이 한 말은 보기에 따라 맞는 말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고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지금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듣는 사람에게 그 말은 매우 일반적이어서 원하는 대로 듣고 해석할 수 있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들어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또한 심판하실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이 여종이 계속해서 바울을 따라 다니며 같은 말을 반복해서 소리 질렀기 때문에 그 메시지가 전달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 귀신을 쫓아내야만 했다(18절).

이 여종을 통해 사탄이 했었던 일이 매우 교묘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사탄은 순수한 복음의 메시지를 교묘하게 흐린다.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조금씩 그 초점이 맞지 않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별로 좋아 하지 않는 것들을 복음에서 뺀다. 죄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 그에 따르는 회개의 촉구, 지옥의 심판을 아주 살짝만 언급한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구원의 결과로서 얻을 수 있는 복에 대해서는 과장하고 변형한다. 마치 이 땅에서 크게 원하는 성공을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어떤 복음은 그저 어느 순간 예수님 믿는다고 말만 하면 어떤 삶을 살든 관계없이 그 사람은 천국에 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반대로 어떤 복음은 뭔가를 열심히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사탄은 이런 일을 잘한다. 우리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잘 안다. 우리를 어떻게 속일 수 있는지 잘 안다. 그렇게 복음을 과장하고 복음을 변형한다. 복음을 전한다면 이런 거짓 복음의 방해에도 준비를 해야 한다.

B. 사탄은 복음의 전달자를 대적한다 (19–24절)

사도 바울이 여종을 사로잡았던 귀신을 쫓아내고 그 주인들은 수입이 끊어지자 바울과 실라를 잡아 장터로 끌고 간다(19절). 그들은 또한 거짓에 기초해 고소하였고 결국 바울은 감옥에 갇힌다. 바울이 했던 일은 나쁜 일이었을까?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까?

그가 했던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복음을 전한 일이고, 하나는 귀신 들려서 자기 삶을 잃은 사람을 도운 일이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정말 큰 위협이 되거나 소동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여러 날 동안은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18절). 하지만 그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문제가 되었다. 귀신들린 여종을 통해 수입을 얻던 사람들이 문제를 삼은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이 귀신을 쫓아 주었다고 고소할 수 없으니 그가 전한 복음을 문제 삼았다.

사탄은 이렇게 사람들을 이용해서 복음 전하는 자를 대적한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게 하고 복음을 거절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정확히 반대하는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복음 전하는 자를 대적하게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로 가려고 했는데 사탄의 방해를 받았다고 말한다(살전 2:18).

사탄은 여러 가지로 복음 전하는 자를 방해하고 대적한다. 직접적인 핍박도 있지만 오늘날에 사탄은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은 듯하다. 복음 전하는 자를 다른 일에 매어두는 것이다. 직장에 매인 사람도 있고 취미 생활에 매인 사람도 있다. 여행이나 다른 여러 즐길 거리들에 매인 사람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다른 일에 매이는 복음 전하는 일은 당연히 미루고 하지 않게 된다. 그래도 복음에 열정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내부의 적을 만들어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작은 것을 크게 보이게 하여 전도자들이 서로 마음이 갈라지고 복음 전하는 일을 뒤로 미루게 한다.

복음 전파에 있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사탄의 역할이다. 사탄은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 꾸준히 복음의 메시지와 복음의 메신저를 대적한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당연히 그런 방해가 있을 것임을 알고 대비해야 한다. 부정적인 반응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계속해서 전파되게 하시고 영혼을 구원하신다. 전도자를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믿지 않는 자의 마음을 여신다. 사탄은 정반대의 일을 한다. 복음을 방해한다. 전도자를 대적하고 믿지 않는 자의 눈을 흐리게 만든다. 그럼, 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3. 우리 – 복음을 전달함(25-34절)

바울은 매를 맞고 발에는 차꼬를 찬 채 감옥에 갇혔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좌절하고 슬퍼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왜 이런 일을…”하고 원망하지 않을까? 바울과 실라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한밤중에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양했다(25절). 그 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고 문이 다 열렸고 사람들의 매인 것이 다 풀렸다.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최대한 빨리 그리고 멀리 도망했을지 모른다. 바울과 실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상황을 보고 간수가 자결하려고 했을 때 바울과 실라는 그를 구했다. 육적으로도 구했고 영적으로도 구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울과 실라가 도망하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바울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감옥에 있었지만 그는 죄수가 아니었다. 만약 그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다면 옥이 열렸을 때 도망하기를 힘썼을 것이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자였다. 그랬기에 그는 여기서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감옥에서 보낸 바울의 편지를 보면 이런 바울의 자세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와 복음을 위해 갇힌 자된 나 바울은” 그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감옥에 갇혔고 그렇기 때문에 감옥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바울 뿐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초기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그렇다. 그들은 정말 딴 세상의 사람들처럼 거침없이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들어가서 매를 맞고, 경고를 듣고 풀려 나와서 곧 바로 또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난 받고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에 대해서 기뻐했다(행 5:41). 그래서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행 5:42).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 대해서 사람들은 “전염병”같은 자라고 했다(행 24:5). 전염병이 전염되는 특성이 있는 것처럼 바울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전했다.

우리는 왜 이렇게 그들과 다를까? 단지 그들은 주님을 직접 보았고 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일까? 그들은 직접적인 명령을 받았고 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인가? 사실 초대교회 중에서 많은 수는 직접 예수님을 보지 못했고 그 명령을 듣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에게도 이적과 기사도 특별한 것이었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때는 준비된 영혼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준비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집이나 가정에서 쫓겨날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환경의 차이는 전도를 어떻게 하느냐와 관련된 것이지, 전도를 하느냐 마느냐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바울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전도하기에 힘썼다. 그것이 주님께서 주신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우리의 역할이기도 하다. 우리는 ‘증인’이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 들은 것, 아는 것을 그대로 말하면 된다. 증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부수적이다. 조리 있게 말하는 것, 설득력을 가지는 것 등은 있으면 좋을 수도 있지만 필수적이지 않다. 하지만 정확하지 않게 말하는 증인은 증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말하지 않는 증인도 마찬가지다. 증인은 말해야 하고, 그 내용이 정확해야 한다.

이것을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

첫째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고난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열매를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정확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보고 들은 것을 가감 없이 전해야 한다. 듣는 사람을 고려하는 것은 좋은 태도지만, 단지 듣는 사람이 불편해할 것 같아서 복음의 핵심 요소를 빼거나 축소해서는 안 된다. 오해할 여지를 일부러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께서만 변경할 수 있으시다. 우리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도전

복음 전파 사역에 있어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고 사탄은 대적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사탄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역할의 한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고전 3:6-7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이 했던 일,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씨를 심는 일이다. 올바른 복음의 씨를 심는 일이다. 그 씨가 싹이 나고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사탄이 있지만, 또한 그 씨를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의지해서 이 복음의 씨를 뿌린다.

씨가 자라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일이고 그렇기에 기쁜 일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소관에 있는 일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주신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올바른 씨를 뿌렸는지에 대해서 물으실 것이다.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책임은 물으실 것이다. 나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알 수도 없다. 하지만 내가 복음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에 말과 삶으로 얼마나 충성했는지는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고전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우리가 바르게 전하는 그 복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가 영혼을 구원한다. 그 영광스러운 복음 전하는 일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셨다. 두렵고 떨림으로 이 귀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