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재앙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본문: 누가복음 13장 1절-5절
설교자: 이병권
이태원 참사로 인한 충격과 슬픔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 땅에서의 사람의 생명은 그리 견고하지 않습니다. 재앙 앞에서 무기력하게 꺾일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사고로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을지, 어디서 어떤 일이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고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끔찍한 사건들,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는 사건들, 사건은 끊이지 않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런 소식을 듣게 되고 보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우리나라의 소식뿐만 아니라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알 수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재앙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수많은 재앙들을 간접적으로 보고 소식을 접하고 있지만, 정작 재앙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바꿀 수 있는 것도 없고 나아지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쓰린 아픔은 또다시 반복되고 재앙은 또 다른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이런 현실이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할 수 있는 건, 그런 재앙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전부인 것 같아서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재앙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계속되는 재앙들, 크고 작은 사건들 늘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거기에 마음 쓰고 싶지 않고 감정을 소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랑 관련된 일이 아니니까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겁니다. 사람에게 있는 죄의 본성이 이기심이기에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배려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자기만족과 이익을 우선시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재앙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나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이니까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으니까 무기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관심과 무기력도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서 재앙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재앙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재앙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마침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어떤 소식을 전합니다.
눅 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당시에는 지금처럼 뉴스를 쉽게 전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직접 사건이나 이슈가 되는 일을 전해야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 온 사람들이 그러한 메신저의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전한 소식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일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왜 죽임을 당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로마에 대항했던 자들이 아니었을까 정도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험악하고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빌라도가 로마에 대항하는 반역자들을 처형하는 일은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일이 벌어진 상황은 이 일을 특별하게 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전할 만한 소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섞은 일”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제물을 드릴 때 빌라도가 제물을 드리는 갈릴리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때 빌라도의 군사들이 와서 이 갈릴리 사람들을 죽입니다. 제물의 피와 갈릴리 사람들의 피가 함께 쏟아져 섞이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중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비극적인 참사일 뿐만 아니라 성전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특별한 일이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분노케 하는 일입니다.
성전에서 벌어진 이 일이 예수님께 전해졌고 예수님이 들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죽임 당한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은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이시고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번영과 평화를 가져오실 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제는 갚아줄 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성전을 모독한 빌라도와 이방인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성취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정작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목적으로 예루살렘에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반응하십니다. 언제나처럼 이 일을 통해 그들에게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진지하게 받아들어야 하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눅 13: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당시 사람들이 재앙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가지는 생각이 이러했습니다. 불행한 사고,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비참한 죽음은 심각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임을 당한 것은 그들의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올 만큼 그들의 죄가 심각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건이 뉴스 기사로 나온다면 이런 제목을 붙일 수 있습니다. ‘성전도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그들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한 것은 그들의 죄가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쉽게 하는 말이 이러합니다.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는 중에 저런 일을 당했을까!‘ 사람들이 이런 일을 잘합니다. 재앙의 원인을 희생자에게서 찾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정죄’입니다. 사람들은 배우지 않아도 정죄하는 일을 잘합니다. ‘저런 일을 당하는 건, 다 이유가 있어!’ 재앙의 원인이 재앙을 당한 사람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은 하나의 사건을 더 말씀하십니다.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이 사건은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 성벽의 남쪽과 동쪽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못이었는데, 이곳은 예루살렘 주민과 성전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의 쉼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희생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이 재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참사는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한 일과는 좀 다릅니다. 실로암의 참사는 누군가 의도해서 생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빌라도에 의해 죽게 되었지만 이 참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그로인해 열여덟 명이 죽었습니다.
어쩌면 이 일은 더 적극적으로 희생자를 정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의도된 일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하기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이 사람들의 죄가 심각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죄가 선을 넘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다못해 이러한 재앙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재앙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정죄합니다.
욥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연이어 찾아온 이해할 수 없는 재앙으로 인해 고통으로 신음하는 욥에게 친구들이 와서 했던 일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욥을 정죄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욥의 친구들이 했던 것처럼, 비슷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재앙으로 고통당한 사람을 위로하기보다 오히려 정죄합니다. 이 재앙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말은 진리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지혜도 아닙니다. 재앙의 원인을 희생자에게서 찾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압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정죄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고를 당하거나 갑자기 죽음을 맞는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재앙의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 죄로 인해 재앙을 당한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앙을 당함으로 놀라는 것이 아니라 재앙을 당하지 않음으로 놀라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재앙이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즉각적으로 다루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이 당하는 재앙에 대해서 그 원인을 욥에게서 찾았지만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이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에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 대해서 그 이유를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입니까? 자신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9:2) 맹인으로 태어난 것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니까 이와 같은 질문이 생기는 겁니다.
제자들이 했던 질문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재앙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기에 틀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맹인이 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맹인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십니다. 어떤 일로, 어떤 방법으로 나타내실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재앙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재앙을 대하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정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정말로 지은 죄로 인해 재앙을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재앙을 대하면서 해야 하는 일은 정죄가 아닙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이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이 여인의 죄는 사람들 앞에서 밝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정죄합니다. 율법을 따라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여인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8:11).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재앙을 대하면서 해야 하는 일은 정죄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반복하시며 강조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똑같은 말씀을 거듭하시면서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이 경고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눅 13:3,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우리가 재앙을 대하면서 해야 하는 일은 정죄가 아니라 회개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가 재앙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이며 재앙을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이 땅에서의 시간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땅에서의 시간이 조금 더 적게 있고 어떤 사람은 이 땅에서의 시간이 조금 더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얼마의 시간을 주셨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시간을 더 길게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재앙이라고 하면 보통은 이 땅에서의 시간을 빼앗아 가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가장 무서운 재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시간이 사라지고 이 땅에서의 삶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더 무서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시간을 생각하느라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소입니다. 시간의 끝에 이르게 되는 장소, 그 장소가 정말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다 다르지만 사람이 도착하는 장소는 다 같습니다. 모두가 같은 곳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됩니다. 다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앙으로 인해 조금 일찍 도착하는 사람이 있고, 재앙을 피해서 조금 늦게 도착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시간차이가 있을 뿐 장소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회개는 장소를 바꿉니다. 영원한 형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시간의 끝에 이르는 장소를 바꿉니다. 그래서 회개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부터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경고하십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우리에게 회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재앙을 통해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시간을 빼앗아 가는 재앙들, 사람들의 다양한 죽음을 보면서 나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시간이 끝나는 날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날, 나에게 재앙이 찾아왔을 때 이 땅에서의 시간이 끝을 알릴 때, 나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요?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재앙을 보면서도, 참사와 재난을 보면서도 정작 나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재앙을 대하면서 나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가장 끔찍한 재앙입니다. 재앙을 대하면서 가장 끔찍한 재앙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죽음을 생각하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영원한 장소를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인생의 마지막을 맞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아직은 시간이 있습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께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으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이미 회개함으로 구원받은 분이라 할지라도 회개는 필요합니다. 회개는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자세이며 삶의 습관입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회개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자주 넘어지고 죄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그래서 나를 살피고 돌이키는 일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나를 돌아보고 정직하게 나를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속이지 말고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회개가 회복입니다. 회개할 때 회복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회개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자가 되어서 날마다 회복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무엇으로 슬픔에 빠진 사람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참 위로가 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회개를 전하는 일입니다. 나의 자리에서 회개한 자로서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 그리고 이웃에게 내가 경험하는 회개를 전하는 것,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고 이웃을 위로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것도 회개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필요한 회개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회개할 뿐만 아니라 회개를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재앙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