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자유, 이런 거였어?!
본문: 갈라디아서 5장 13~15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실제로 내가 경험하는 것이 다를 때,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른 현실을 만날 때 오늘 제목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겪는 많은 일들이 사실은 우리의 예상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기대를 하면 그 다름 때문에 혼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자유가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든 그건 내 자유다’라고 말합니다. 사전에서도 자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 우리가 사용하는 자유라는 말의 의미가 이러하기에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에 대해서도 우리가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주님이 허락하신 자유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주님이 자유를 주셨는데 갈라디아 교회는 그 자유를 잘못 이해해서 ‘오해’하기도 했고,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해서 ‘오용’하기도 했습니다.

자유에 대해서 잘못된 두 양극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쪽은 자유를 오해해서 자유를 빼앗긴 채 자유를 사용하지 못합니다. 다른 한 쪽은 자유를 오용해서 잘못된 목적으로 자유를 함부로 사용합니다. 오해와 오용, 양 쪽 모두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오해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통해 누구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기에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를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시도, 그 다른 복음에 속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자유를 ‘오해’하지 말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 자유에 대해서 명령합니다. 이번에는 그 반대측면에서 자유를 ‘오용’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유를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종으로 살다가 자유를 얻었다고 한다면, 오랜 세월동안 갇혀서 지내다가 자유롭게 풀려났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얻은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죠? 자유를 얻는 것과 그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를 얻었을 때,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어진 자유를 잘못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한 예로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 대부분은 결국 더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갑자기 생긴 많은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고 잘못된 목적으로 돈을 사용하다가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자유가 그러합니다. 우리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면 우리에게 주어진 정말 소중한 자유를 잘못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 주신 자유를 가지고 범죄 하는 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 쉽게 말해 ‘자유 사용법’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유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받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에 대한 목적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를 허락하신 분의 목적에 따라 그분의 계획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부르심이라고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13)

바울은 형제들에게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자유를 위해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자유에 대한 목적과 계획은 우리를 부르신 분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분의 뜻에 따라 자유를 이해하고 자유를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에 대한 오해나 오용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자유를 주신 분이 무엇을 위해 주셨는지, 그 목적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르신 분의 목적과 다르게 잘못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따라 어떻게 자유를 사용해야 하는지 ‘자유 사용법’에 대해서 오늘은 두 가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자유를 위한 부르심에 따라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첫째는 육체의 기회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13)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육체에 기회를 주는 자유가 아닙니다. 여기서 육체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타락한 본성을 위해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욕심을 위해서, 죄를 짓는 일에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나오는 기회라는 말은 군사적으로 유리한 장소나 작전 기지를 가리킬 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을 내어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본성이 원하는 대로 자유를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고 죄가 승리하도록 그냥 두고 보지 말고 통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를 위한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죄를 짓기 위해 주어진 것도 내 마음대로 하라고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나의 이기심, 나의 본성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체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계속해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추구하기보다 자유를 오용하도록 잘못 사용하도록 부추깁니다.

그래서 기회를 주면 안 됩니다. 틈을 보이면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언제든 넘어갈 수 있습니다. 내 육체를 따라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고 내 죄악된 본성을 따라 자유를 잘못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통제하는 자유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육체가 원하는 대로, 죄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의 목적에 따라 통제하는 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그것이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육체가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자유를 잘 통제하고 계십니까? 언제든지 불쑥 튀어나올 수 있는 육체를 다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잘 다스리지 않았을 때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자유가 육체의 기회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입니다. 바울은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은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 속에 있는 본성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통제하지 않으면 야생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의 본성에 따라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 싸우다가 결국 같이 망하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마치 야생동물의 싸움을 묘사하면서 조심할 것을 경고합니다. 서로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며 물어뜯으려고 하는 사람들, 만약 성도들이 통제되지 않은 모습으로 육체가 원하는 대로 자유를 사용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이빨을 드러낸다면 어떻겠습니까? 교회는 동물의 왕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야생 동물원이 아닙니다. 이빨을 감추고 통제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경우든 서로가 조심하지 않고 자유를 잘못 사용하면 함께 망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조심하라”는 명령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통제하는 자유입니다.

부정적인 경고에서 시작한 바울은 긍정적인 명령으로 나아갑니다. 자유를 위한 부르심에 따라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자유 사용법,둘째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13)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표현하는데 여러 가지 역설적인 말씀들이 많습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막10:43).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생명을 보전할 것이다(요12:25).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지혜로운 자가 된다(고전3:18). 바울은 고린도 후서에서 이렇게 고백하기도 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이런 역설적인 말씀을 보거나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역설적인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보면 모순입니다. 틀린 말입니다. 어떻게 자신을 낮추는 자가 높은 자가 됩니까? 어떻게 자신의 약한 것이 강함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생명을 얻는다는 겁니까?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가만히 생각하면 이것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살아가면서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또 하나의 역설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종이 되기 위해 자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자유와 종이 되는 것은 서로 반대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얻었는데 그 자유로 다시 종이 되라고 합니다. 자유를 가지고 있는데 다시 종이 되는 것, 어떻게 가능합니까?

사랑으로됩니다. 바울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역설적인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종노릇하는 삶은 사랑으로 실천되기 때문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삶의 기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자유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가진 자로 사는 것은 역설적으로 종이 되어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역설적인 진리는 주님께서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셨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섬기는 일에 사용합니다.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이 되지 않는 것을 말이 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마음에 부어져서 그 사랑이 내 마음에 가득 넘쳐서 나도 그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서로의 종이 됩니다. 사랑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우리는 나의 이기심을 내려놓고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우리는 나의 교만한 마음을 꺾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은 우리를 더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합니다.

사랑하면 섬길 수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를 위해 희생합니다. 남편을 사랑하면, 아내를 사랑하면 섬길 수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성도를 사랑하면 위해서 종노릇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나를 사랑하사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을 사랑하면 나에게 있는 자유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자유를 그렇게 사용하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었으니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목적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한 사실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은 잘 기억하는데 무엇을 위해 자유를 얻었는지는 잘 잊어버립니다. 자유를 얻은 것만 기억하고 자유를 가지고 해야 할 일은 잊어버립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라고 그런 목적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입니다.

마치 일부 정치인들이 선거 때에만 국민의 종이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때가 많습니다. 잊고 사는 것입니다. 계속 사랑으로 섬기는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가 원하는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육체가 원하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쾌락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돈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성공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노예가 되어서 거기에 매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속아서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결국 헛된 것에 얽매여서 노예로 살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셔서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를 섬기며 이웃을 섬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잠시 종이 되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사랑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사랑으로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섬기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이 명령에 따라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며 산다면, 그렇게 우리가 이 명령에 순종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온 율법을 성취하게 됩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온 율법을 순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14)

율법의 모든 말씀이 사랑으로 섬기는 삶으로 요약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섬기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고 그러한 순종은 온 율법을 성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를 얻어서 그 자유를 가지고 말씀에 순종합니다. 주님이 자유를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그 목적을 성취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사랑으로 섬길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육체의 종이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에게 종이 될 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섬기는 자유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예수님과 한 여인의 만남을 생각하면서, 특별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아침부터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 적대적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끼어듭니다. 그리고는 한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바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뭐라고 쓰십니다. 그런 후에 몸을 일으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어른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주변을 둘러보시고 여자에게 물으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이 여인은 자신의 죄로 인해 죽을 수도 있었던 위급하고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은혜로 인해 건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죄로 묶여있던 그녀에게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가서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하여라. 너는 이제 자유로우니 인생을 최대한 즐기도록 해라.” 예수님의 자비와 은혜가 가득한 이야기가 이렇게 마무리 되었나요?

죄를 범한 여인이 용서를 받고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예수님은 그녀가 이전과 다른 삶을 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자유를 오용하지 않도록 육체의 기회로 사용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주님이 부르신 목적에 맞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자유는 통제되어야 하며 사랑으로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자유 사용법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주님께서 먼저 자유를 사용하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자신의 모든 권세를 내려놓으셨고 그 모든 능력을 육체의 기회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섬기셨습니다. 사랑으로 종이 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면서 그 자유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있는 자유를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육체를 위해서 사용할 수도 있고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사용하든지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의 사랑을 더 생각하면 할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면 할수록, 그분의 사랑이 내 마음에 가득할수록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나의 자유를 사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지금 나의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어떠한지 점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자유를 부르심에 따라 사랑으로 섬기는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