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인생, 그 속에서 은혜를 찾다

본문 : 룻기 1장 19-22절

설교자 : 이병권

룻 1:19-22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히 있는데도 아직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인생에서 너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기에 아직은 은혜를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은혜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인생, 그 속에서 은혜를 찾다”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인생에서 쉽게 잊어버리는 은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만약 인생에서 은혜를 발견하고, 그 은혜에 제대로 반응하고, 그 은혜를 사모하며 산다면, 우리는 훨씬 더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나오미와 그녀의 며느리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의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19절에 그 두 사람이 길을 떠나서 베들레헴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귀향에 대해서 다른 언급 없이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여인의 귀향길은 쉬운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모압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대략 80에서 100킬로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한 시간에 4킬로 정도를 걸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나오미와 룻의 경우는 여자인 것과 나오미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마도 한 시간에 3킬로도 가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만약 하루에 8시간을 걸었다고 가정을 하면 모압에서 베들레헴까지 이 여인들은 4일에서 5일을 계속 걸어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강이 있고 험한 길도 있고, 시간이 더 걸렸을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여행길입니다. 그렇게 힘들게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을 떠난 지 10년의 시간이 흘렸습니다. 나오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낯익은 고향의 풍경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한가롭게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오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 나와서 말합니다. “이게 누구야? 정말 나오미야?” “어머머, 진짜 나오미 맞아?” “어쩜, 이렇게 됐니?” 그들의 하는 말은 놀람의 표현이었습니다. 10년 만에 보는 나오미는 많이 변해있었던 것입니다. 그동안의 고통과 수고, 세월의 흔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함께 떠났던 가족들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나오미로 인해 그 성읍이 떠들썩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이 같은 반응에 대해서 나오미가 뭐라고 했을까요?

 

20절에서 21절에서는 나오미의 말이 나옵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는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하고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오미 이름은 기쁨, 즐거움, 환희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오미는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제 나오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름이 바뀌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는데, 마치 그런 것처럼 나오미도 이름을 바꿉니다. 다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나오미가 스스로 자기 이름을 바꾸고 있습니다. 자기 상태가 변했기 때문에 이제 자신을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는 겁니다. 마라는 씁쓸함, 고통, 괴로움 이런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오미는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주변에는 자신을 나오미라고 불러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지금 사람들로부터 자기 이름을 직접 들은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 “나오미”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지금 자신의 처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기에 그녀는 자신의 이름 “마라”라고 바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말했지만, 성경은 단 한 번도 나오미를 마라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미는 여전히 나오미로 나옵니다. 나오미는 스스로를 “마라”라고 ‘고통’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녀를 “나오미”로 ‘기쁨’이라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나오미는 이어서 자신을 마라라고 이름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전능자, 다시 말해 하나님이 자신을 심히 괴롭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고향을 떠날 때는 풍족하게 떠났었는데 지금은 텅 비어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재산이 풍족하게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사람들, 가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떠날 때는 자기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갔는데 지금은 그들이 다 죽고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비었다고,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 하면서, 그 인생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 특별히 안 좋은 일들의 주체로 전능자를 말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있는 괴로운 일이 그냥 우연히 일어나거나 다른 거짓된 신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주체가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전능자의 주권적인 섭리 안에서 일어났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나오미는 또한 자신을 징벌하신 분을 여호와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호와는 하나님이 사람들과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지키시는 관계적인 속성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나오미는 여전히 상처가 남아있고, 여전히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오미는, 적어도 이 모든 일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장의 마지막입니다. 22절입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22절은 1장의 마지막이자, 2장의 서두이기도 합니다. 자기 시어머니에게 헤세드의 사랑을 베푼 한 여인과 봄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보리, 추수할 것으로 가득한 밭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뭔가 소망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1장은 이렇게 소망의 향기를 물씬 풍기면서 끝이 납니다.

 

그렇다면 나오미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식하지 못하고, 자주 놓치는 그런 은혜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인생에서 찾아야 할 은혜에 대해서 세 가지 정도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인생에서 찾아야 할 은혜는 일상적인 돌봄의 은혜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며느리와 함께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뭔가 특별한 것이 보이십니까? 별다른 내용이 없습니다. 사실, 그것이 은혜입니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 것이 은혜라는 겁니다.

 

이 두 여인의 여행에 대해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여행하기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미리 알아 볼 수 있고, 손쉽게 여행을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이동할 때도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서 차를 타고 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당시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길이 제대로 닦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잘못하면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짐승이나 강도의 위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문제없이 두 여자가 무사히 고향 땅에 도착합니다. 이게 우연히 이렇게 된 일일까요? 우리 인생에서 우연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이나 특별한 일만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매일의 삶에서 우리를 돌보시고 그 섬세한 손길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일상적인 돌봄의 은혜입니다. 룻기를 보면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사건이 없습니다. 특별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합니다. 일상에서 누리고 있는 은혜가 너무도 큽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이 너무 어두워서, 너무 바쁘게 살아가느라, 혹은 우리가 너무 둔감해져서, 너무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일상에서 경험하는 많은 일들을 은혜라고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 일상에서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십시오. 우리를 이끄시고 돌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혜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 은혜를 찾고,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편안히 잠자리에 눕는 것 은혜입니다. 집에 먹을 음식이 있는 것 은혜입니다. 오늘 하루 아무런 사고 없이 지낸 것 은혜입니다. 치료를 받아서 병이 낫는 것 은혜이지만,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한 것은 더 큰 은혜입니다. 자녀가 방황하다가 돌이켜 변화되는 것도 은혜이지만,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잘 커주는 것은 더 큰 은혜입니다. 성경적인 교회를 찾아서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찾은 것도 은혜이지만, 그런 어려움 없이 당연한 듯이 자연스럽게 교회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 수 있는 것도 은혜이고, 때로는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까, 이게 얼마나 귀한지 모르고 사는 것도 은혜입니다. 몇 달 동안 노력해서 몸무게를 줄이는 것도 은혜이지만, 그렇게 먹으면서도 몸무게가 더 늘지 않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채워주시는 은혜, 그 돌보심의 은혜를 은혜로 알면 우리의 믿음이 더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더 믿는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일상적인 돌봄의 은혜를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눈을 크게 뜨고 그 은혜를 찾아보십시오. 찾으려고 하면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로 가득합니다. 차분히 앉아서 그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인생에서 찾아야 할 은혜는 일상적인 돌봄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인생에서 찾아야 할 은혜는 사람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이 은혜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텅 비어서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함께 했던 남편과 두 아들이 다 죽어서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일까요? 나오미에게 안 보였는지 모르지만, 사실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에게는 룻이라는 복덩이가 있었습니다.

 

21절에 나오미가 자신이 비어 돌아왔다고, 텅 비었다고, 빈손이라 말하지만, 22절에서 룻기의 저자는 마치 나오미의 그 말을 수정이라도 하듯이 나오미가 며느리인 룻과 함께 있음을 알려줍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나오미는 비어 돌아왔다고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고백했지만, 하지만 룻이라는 커다란 은혜가 그녀 곁에 있었습니다. 나오미에게 룻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단지 그것을 보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것처럼 룻으로 인해 나오미의 인생은 바뀝니다.

 

여러분, 나와 함께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내 가까이 붙여주신 사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인지 모르고 그냥 사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여러분, 지금 옆에 계신 분을 한 번 보십시오. 은혜의 선물이 보이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길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은혜입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만들고, 여러분의 인생을 더 의미 있게 해주는 사람이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분의 남편, 여러분의 아내일 수 있습니다. 배우자는 웬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여러분의 자녀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물론 선물 같지 않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선물입니다. 또는 그 사람은 믿음의 친구나 교회 성도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주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그 은혜를 소홀히 여기거나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옆에 붙여주신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게 여러분도 은혜가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찾아야 할 은혜는 일상적인 돌봄의 은혜와 사람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우리가 인생에서 찾아야 할 은혜는 고난의 은혜입니다. 이상합니다. 고난과 은혜라는 말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인생에서 정말 찾기 어려운 은혜인지도 모릅니다.

 

나오미를 보십시오.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많이 괴롭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흉년을 피해 멀리 외국 땅에서 10년 동안 이방인으로 사는 것, 그것도 어려운 일인데, 남편과 두 아들도 다 죽었습니다. 우리는 나오미가 겪은 괴로움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그 괴로움을 주신 분을 하나님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가련한 여인에게 고난을 허락하셨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다 알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나오미를 돌이키기 위해서, 나오미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나오미는 지금까지 모압이라는 우상이 가득한 땅에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서 생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나오미가 우상으로 가득한 땅에 있는데 계속해서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아무런 문제없이 그렇게 잘 살았다면, 과연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까요?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난을 견디는 사람은 있지만, 번영을 견디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 될 때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쉽게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그것은 룻기와 같은 배경을 가진 사사기를 볼 때 너무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괴롭힘은 돌이킴을 위한 부르심이며 회복을 위한 은혜입니다. 변장한 축복입니다.

 

그럼 나오미가 이 고난을 은혜로 생각했을까요? 나오미의 고백을 봤을 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어려움이 있으면 원망하기가 쉽습니다. 그것을 은혜로 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잘못된 일을 하는데, 잘못된 길을 가는데,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 있는데, 그런데 하는 일마다 잘 된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그것이 은혜일까요? 아니며 어떻게든 돌이키게 하는 것이 은혜일까요?

 

솔직히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데 하나님이 가만히 계신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더 두렵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신다고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여러분을 인도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 길에서 멀어진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돌이키게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그냥 내버려두길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고난이라는 회초리를 사용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그 고난의 이유를, 그 뜻을 다 알지 못할 때도 있지만, 하지만 하나님은 뜻 없는 고난을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지금 그런 고난을 경험하고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어떤 경우는 직접적인 잘못이 없는데도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경우든지 간에 만약에 고난이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아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조금 더 가까이 두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얼마나 가난하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주시기 위해서 때때로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혹시 지금 고난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은혜입니다. 변장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그 은혜에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회개할 일이 있으면 회개하시고 돌이킬 일이 있으면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고난을 인내하십시오.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인생에서 쉽게 놓치는 은혜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돌보심이었고,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때로 우리가 겪게 되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은혜로 알아차리기를 원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그렇게 인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곳곳마다 살펴보고, 그 은혜를 깨닫고, 그래서 그 은혜에 올바르게 반응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그 은혜 안에서 더욱 복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그 은혜를 넘치게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