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인생의 현실에 부딪힐 때
본문 : 창세기 17장
설교자 : 이병권
오늘은 “인생의 현실에 부딪힐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금까지 아브람에 대한 설교의 요약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어려움이나 갈등, 염려나 기다림을 만납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은 달갑지 않습니다. 현실이 우리에게는 인생의 역풍으로, 장애물로, 오르막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에 부딪혀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힘든 현실 때문에 막막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쳐갈 수 있을까? 고민이 됩니다. 말 못할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 현실에 대해서 마음을 놓아버립니다. 힘이 드니까,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를 때도 있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힘겨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여기 모든 분들이 현실을 뛰어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람이 처한 현실이 나옵니다. 그의 현실은 그를 격려하기 보다는 그를 낙심시킵니다. 현실은 그를 넘어지게 할 만들만큼 거칠게 그를 몰아갑니다. ‘그냥 이정도 까지 했으면 됐지’하고 안일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아브람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1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나이는 99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람의 나이를 언급하며 시작합니다.
본문 앞에 있는 16장의 마지막을 보면,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아브람 나이가 86세였습니다. 그럼 지금 그 후로 몇 년이 흘렀습니까? 13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아브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성경의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도 아브람은 특별한 사건 없이 이스마엘이 자라는 것을 보며, 그 즐거움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나이가 99세가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더 이상 자녀를 생각할 수 없는 나이입니다.
하나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조급하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이스마엘, 아브람은 그 이스마엘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씨가 이스마엘인가? 혹시 사래를 통해 아들을 주실까? 아니야! 그러기에는 우리 둘은 너무 늙었어. 불가능한 일이야!‘ 지금 99세인 자신에게 있는 아들은 여종을 통해 얻은 이스마엘 뿐입니다. 아브람은 점점 더 믿음이 약해지고 거의 포기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더욱이 아내 사래는 임신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른 바람은 없고 그냥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 오랜 침묵을 깨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조금도 없으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지금 이 시점에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까요?
하나님은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을 때, 아브람에게 ‘내가 너의 방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전쟁에서 얻은 재물을 기꺼이 포기하고 돌려주고 났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상식적으로 아이를 낳을 소망이 없을 때, 인간적인 힘으로는 아이를 낳을 방법이 없는 그에게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지금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어려운 현실은 그 현실을 뛰어 넘어 역사하는 능력의 하나님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안 된다고, 할 수 없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십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것은 ‘내 앞에서 행하라’와 ‘완전하라’는 두 개의 연속적인 명령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가 완전할 수 있도록, 내 앞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구별된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며 사는 것과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다릅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때 시험을 치면, 보통 감독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수님이 시험 문제를 주고 칠판에 라틴어로 된 두 글자만 쓰고 가십니다. 그것은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인데,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시험을 치라는 것입니다. 비록 감독하는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에 그러한 마음으로 시험에 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을 보십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그 분을 의식하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을 때 우리의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 때에도 하나님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현실을 만나게 되더라도 하나님을 의식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명령이고, 이 원리는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 것들, 나의 바람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 내가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들,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여러 방해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다양한 현실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현실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그 때에도 우리를 알고,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는 의식하지 않을 수 있지만, 생각하지 못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담스러운, 마치 늘 감시를 받는 죄수의 삶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을 불편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늘 나의 곁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기쁨의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 하나님 앞에서 걸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축복된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니 내 앞에 현실을 바라볼 때, 내가 한 없이 작게만 느껴지고, 나의 연약함과 반복되는 실수로 마음이 무너질 때, 나를 옭아매는 현실 앞에 주저앉을 때, 계속 부딪히는 현실의 무게에 지쳐있을 때, 그러 할 때에라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기준을 낮추지 않으십니다. 기준을 우리에게 맞추기 위해 기준을 낮추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완전함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 앞에 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내가 변해야 합니다. 과거의 나와는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새 마음과 새 힘으로, 새 일을 행하도록, 죄의 습관을 버리고, 헛된 욕망과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생명이 있는 자답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분에 맞는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뢰함으로 조급한 마음으로 버리고, 세상적인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포기하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고 넘어질 때가 많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현실에 그냥 안주하지 말고,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매몰되지 말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하고 그분 앞에서 살기를 결단하십시오.
하나님은 이어서 아브람과 맺은 언약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들은 마치 하나님이 아브람의 언약에 대한 계약서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계약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아쉬울 것이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과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겸손하심과 사랑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십니다. 아브람은 ‘높임 받는 아버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열방의 아버지’, 많은 나라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이 그대로 살았다면 한 가문의 아버지로 부족함 없는 괜찮은 인생을 살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나라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리고 예수님까지 그의 자손으로 오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다 이해할 수도 없는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아브라함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의 이름은 지상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한 가문의 존귀한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품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갖고 이끄시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인생에 만나는 현실 앞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 가운데서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비록 내가 만나는 현실과는 잘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는 분이심을 알고 그 약속에 귀를 기울이고 신뢰해야 합니다. 현실이 우리 귀에 속삭이는 상식적인 소리보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진리의 소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꾸신 하나님은 그에게 언약의 표징에 대한 지침을 주십니다. 그것은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요즘 말로 하자면 포경수술과 같은 것입니다. 이 할례는 언약의 표징,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주석가는 할례를 가리켜 “몸에 새긴 하나님의 브랜드”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그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표시를 통해 ‘아! 나는 언약백성이지‘라고 자신의 신분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 받은 자들은 언약백성으로서 언약에 충실한 삶을 살며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한 할례는 포피를 벤 것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삶의 방식과 자신의 육신적 의지를 버리는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기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 되었고, 그 백성에게 훈장과도 같은, 이방민족과 구별하는 기준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할까요? 우리도 받아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받는 것은 몸의 할례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몸의 할례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은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고 명합니다(롬2:28-29).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의 딱딱한 껍질을 베어버리고 내 뜻과 의지와 욕심을 잘라 버리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림으로써 세우신 새 언약에 합당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마음의 할례입니다.
할례 받은 자들이 할례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부딪힐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 기억하는 가운데 그분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그 앞에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내가 누구인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나의 신분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현실의 무게를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신의 신분에 맞게, 구별된 백성으로서 사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며, “그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이스마엘을 비롯한 자기 집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기에 어땠을까요? ‘하나님,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만약 온 집안의 남자가 할례 받은 동안, 적들이 쳐들어오면 어떡합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냥 순종합니다.
그 때 마취약 같은 게 있었을까요? 제대로 된 수술도구가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이 이런 일을 했던 경험이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이 전쟁을 위해 훈련시켰던 자들이 318명인 것을 생각하면, 아브라함에게 속한 남자들의 수는 300명은 족히 넘었을 것입니다. 말이 300명이지, 한 사람당 진짜 빨리 해서 1분씩 걸린다고 해도 5시간 이상이 걸립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하루 종일 이일을 했을 것입니다. 온 집에 피와 고통의 신음소리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99세인 아브라함 자신에게도 할례를 행했습니다. 99세의 남자가 할례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역사상 가장 많은 나이에 할례를 받은 인물일 것입니다.
이 일이 쉬웠겠습니까? 이 일이 즐거웠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루 동안 자기 집에 있는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할례를 받는 남자들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갑자기 나이든 주인이 왜 이러시나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하신 그대로 행합니다.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 방식대로, 내 기준대로, 내 생각대로 하는 순종이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온전히 따르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한다고 말하지만 부분적으로 순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치원에 말 안 듣기로 소문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아이를 다스리기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날은 엄마가 아이를 유치원에 맡기면서 약속을 합니다. 오늘 선생님 말씀 잘 들으면, 용돈으로 1,000원을 주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유치원이 시간이 끝나고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아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스스로 한 번 생각해보렴, 오늘 넌 1,000원을 받을 자격이 있니?” 그러자 아이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엄마, 100원만 주세요.”
이것이 우리의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편리함을 좇아서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순종을 선택합니다. 그 정도면 괜찮다고 만족할 때가 많습니다.
순종은 힘들더라도 대가가 있더라도 온전히 하는 것입니다.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피곤할 수도 있습니다. 불편한 일을 해야 할 수도 있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삶입니다.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인생에서 어려운 현실이나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부딪힐 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의식한다면, 그래서 순종한다면, 우리의 삶은 변화될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살고 계십니까? 예배당에 있든지, 바깥에 있든지, 주일이든지, 평일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그 약속에 귀를 기울이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내가 어떤 자가 되었는지 기억함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주님의 함께 하심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인생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현실 속에서 우리를 더 예수님 닮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