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예수님이 오시기 전, 모든 사람들은 어둠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어둠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사는가’하면 자신 안에 있는 육신의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종교생활이나 자선사업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저희 옆집에 살았던 개 양로원을 하시는 분은,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될까 하고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택한 일이 개들을 모아다가 죽을 때까지 편히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일을 선택했던 것은 그가 어둠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 삶의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에게는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없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편히 살고 싶어 합니다. 평생을 병원에서 살고 싶은 사람도, 천막에서 살고 싶은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편히 잘 먹고 잘살고 싶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결혼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될까 하는 생각만 가득했던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4,25)” 그 역시 우리와 동일하게 육신의 정욕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주님을 위해 살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고 구원해주지 않았다면 그는 교회와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자로 일생을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 중에 괴수라던 그를 구원해주시고 빛을 비춰주신 주님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면 그는 영원토록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그가 말한대로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수많은 하늘의 기업을 상속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것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삶을 쏟아 붓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살아갈 때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또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누구를 위해 하는 것입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것은 진정한 삶의 이유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먹어도 주를 위해, 안 먹어도 주를 위해,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해 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정말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바로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이 알지 못하고, 그와 같이 보지 못하며, 그처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눈을 밝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와,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자신의 행복보다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더욱 중요시했습니다. 또한 ‘부르심’에 대해 늘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엡2:11)” 구약성경에서는 우리를 거름더미에서 꺼내 방백들과 함께 앉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헐벗고 굶주리고 두들겨 맞고 정처 없고 천막 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갓 결혼한 사람들은 콩깍지가 씌어서 배우자를 어떤 상황에서도 평생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콩깍지가 벗겨지면 여러 가지 이유로 이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시간이 갈수록 알면 알수록 더욱 사랑이 깊어지고 그에게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는 아직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께 빠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는 만큼 우리는 알지 못하고 그가 보는 것처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의 영광이 더욱 가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가 보는 것만큼 본다면 미련 없이 이 땅의 삶을 포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바라며 살았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놀라운 것은 지금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보다 사도 바울이 고통 중에 느낀 기쁨이 더 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는 일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부터 시작되는 모든 일들을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주님께 영광이 될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론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온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고, 자신의 삶의 목표를 그리스도의 영광에 두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내 몸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삶을 선택한다면, 여러분은 사도 바울과 같은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보는 것을 보고 그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기 위해 힘쓰십시오. 주님의 사랑, 하늘의 영광, 영원한 삶 등의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통해서 그와 같은 것들을 볼 수 있기를, 그래서 여러분의 삶을 주님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