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본문 : 시편 57편

설교자 : 최종혁

 

아마 현 시점에서 ‘재앙’이란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 먼저 떠올린 것은 ‘코로나’일 것이다. 우리에게 불쑥 찾아온 코로나는 벌써 7개월이 넘게 육체적 어려움에 경제적 어려움을 넘어서 관계적 어려움과 정신적 어려움까지 가져오고 있다. 다들 ‘언제까지’라는 말을 달고 살고 있다. 그야말로 재앙이다.

여기에 더하여 최근 몇몇 교회들이 코로나 확산의 매개가 되기도 하면서 교회를 향한 시선은 책망과 비난을 넘어 조롱과 경멸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상태다. 복음을 전하기는커녕 교회라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게 현실이다.

거기에 더해서 지금은 교회가 교회로서 어느 장소에 모이는 것을 정부에서 금하고 있다. 습관처럼 주일을 준비하고, 주일에 모였던 성도들은 처음에는 어색함을 느꼈지만 점점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가는 것 같다. 구역집회나 연령별 소그룹도 모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단체 채팅방도 대화가 끊어진지 오래되었다. 주일 오전에 한 시간 반 가량 진행되는 온라인 예배를 제외하면 어떤 분들에게는 하나님, 예수님, 교회 등이 점점 삶에서 희미해져가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시편 기자, 특히 다윗의 답답함이 더 이해가 된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끝내주셨으면 좋겠고 그래야만 할 것 같다. 교회가 힘을 잃고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 것 같은 이런 상황을 견디기가 힘들다. 하나님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맞섰던 엘리야에게 단번에 응답해주셨었다. 그런데 지금은 바알의 선지자들을 향했던 엘리야의 조롱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고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지금의 이 재앙이 지나가긴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재앙을 어떻게 보내느냐다. ‘우리가 뭐 어쩔 수 있나, 그냥 끝날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는거지. 어떻게 보내냐는 생각은 사치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힘든 상황에서 충분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우리의 생각이 정말 거기서 그냥 끝난다면,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떤 변화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고 주일에 교회에 나가는 것 정도였는가? 그렇다면 지금처럼 주일이 없어진 것 같은 이런 시기에 하나님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분이 맞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재앙을 어떻게 보내야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모든 것에 뜻을 두고 행하시는 분이시고, 그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렇게 해야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돈을 어떻게 쓸지, 재능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을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재앙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코로나 뿐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재앙들에 대해서 이런 고민을 해봐야 한다.

시편 57편이 바로 이 주제에 관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교훈을 준다.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어떻게’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전에 좀 더 근본적인 것을 생각해 보자. 바로 목적이다.

목적을 먼저 바로 알자(5, 11절)

먼저 중요한 것은 궁극적인 목적을 바로 아는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어떻게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길을 가는 목적에 따라 가는 길이 달라지고 길을 가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과 같다.

가족끼리 즐거운 시간을 가지기 위해 여행을 떠난 상황이라고 생각해보자. 아쉽게도 다른 가족들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지 길이 많이 막힌다. 더구나 운전하던 아빠가 길을 잘못 들어서 도착지까지 가는 시간이 1시간이 늘었다. 여느 때같으면 짜증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애초에 ‘가족끼리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생각하면 그냥 웃으며 그 짜증을 이겨낼 수도 있고 하나의 추억으로 만들 수도 있다. 차에 있으나 여행지에 있으나 가족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만들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만약 회사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길을 떠났는데 위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는 그냥 웃으며 넘길 수 없다. 어떻게든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할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의 책임도 져야한다. 궁극적인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차이는 생길 수 밖에 없다.

재앙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일단은 궁극적인 목적을 바로 알아야 이 재앙을 어떻게 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재앙을 만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그래서 최대한 빨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재앙 중에는 어떤 일을 해도 그 목적은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

재앙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의 대부분이 사실 이런 내용이고 하나님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시 50:15)고 말씀하신다. 재앙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이 죄는 아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죄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을 때 생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던 것은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어려움 없는 삶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두고 그 땅에 들어가기를 거절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그들이 애굽을 나오며 기대했던 삶에 고통(재앙)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재앙 중에 궁극의 목표로 삼아야할 것은 무엇일까? 성경에서 이 답을 찾는 것만 것 쉬운 것이 없다. 스스로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드러내시어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은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예배할 의무가 있다(사 43:7; 계 4:11). 그것이 우리 모두의 존재의 이유다. 우리는 스스로 삶의 목적을 정하고 ‘자기 발견’, ‘자아실현’ 같은 것을 해야한다고 배우며 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발견해야할 자아, 실현해야할 자아는 하나님 안에 있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목적을 정하신다.

그래서 구원의 목적도 동일하다. 우리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구원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구원을 받았다(엡 1:6, 12, 14; 벧전 2:9). 결국 우리 모든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롬 14:7-9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그렇다면 재앙 중 우리가 궁극의 목표로 삼아야할 것도 하나님의 영광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시편 50편 15절에서도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궁극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시편 57편에서도 다윗은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후렴구에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5, 11절)

하늘보다도 높으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늘 높이 오르셔서 온 세계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주목하여 보고 그렇게 하나님이 높임 받으시기를, 예배 받으시기를 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다윗이 언제나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고 지금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이 때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윗에게 재앙이 찾아왔다(1절 끝). 이 재앙은 골리앗처럼 싸워서 이기거나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피해야하고 지나가기를 기다려야하는 재앙이다. 마치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가 그저 큰 피해만 주지 않고 지나가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다윗은 이 상황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나를 삼키려는 자”(3절)

다윗이 재앙이라고 표현한 것은 자연재해는 아니었다. 그를 삼키려는 자, 그를 괴롭게하는 자가 있었다. 그 무리들을 다윗은 “사자들”, “불사르는 자들”이라고도 표현한다(4절). 불사르는 자들은 삼키는 자들을 의미할 수 있는 단어다. 어떤 의미든, 다윗은 이들을 “사람의 아들들”이라고 비유를 오해하지 않도록 한다. 이들은 사람들인데, 마치 날카로은 이빨과 발톱으로 사람을 사냥하여 먹으려는 짐승처럼 다윗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말은 창과 화살,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에게 날아들었다. 다른 시편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단순히 다윗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이 말들은 다윗의 평판을 무너뜨리고 관계를 무너뜨리고 삶을 무너뜨리는 말들이었따. 그래서 다윗은 단지 그들이 그렇게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는 식이 아니라 자신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워”있다고 표현을 한다(4절).

6절에서는 이들이 자신의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고 자신의 앞에 웅덩이를 팠다고 말한다. 앞에서는 포식자로서 자신을 괴롭게 하는 자들을 표현했다면 여기서는 사냥꾼으로 묘사한다. 앞에서는 무기를 들고 사냥을 하는 것처럼 묘사했다면 여기서는 그물과 함정을 계획적으로 준비하여 사냥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들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다윗은 불안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자신을 좇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골리앗이라면 다윗은 싸울 수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칼과 창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사울이었다. 자신이 섬기던 주인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통치자였다. 그와 칼을 들고 싸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상황은 다윗에게 재앙이었다. 그저 잘 지나가주기만 바래야하는 재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재앙이라는 것도 하나님 때문에 찾아온 재앙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해서 왕으로 기름부으시지 않았다면 사울이 굳이 다윗을 죽이려고 이렇게 혈안이 되어서 찾아다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먼저 왕이 되고 싶다고 했던 것도 아니었으니 다윗 입장에서는 억울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다윗은 이 재앙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다윗의 목적이었다면 그냥 “나 왕 안 해”라고 말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피할 수 없는 이 재앙 속에서 그 책임을 하나님과 사울에게 돌리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분노와 원망과 불평으로 쏟아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이스라엘의 대적인 블레셋으로가서 세력을 키우고 사울을 몰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편에서 그는 이 재앙 중에 궁극적인 목적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여전히 이 재앙 중에서도 하나님이 높이 들리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선포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재앙 중에서 잊지 말아야할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다. 최우선순위다. 다른 어떤 것도 이것보다 먼저 오게해서는 안된다.

이 목적이 분명할 때, 이 재앙을 어떻게 보내야하는지도 분명해진다. 이 시편에서는 다윗이 보인 두 가지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재앙 중에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을 높였고(1-5절), 그는 재앙 중에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하나님을 높였다(6-11절).

I. 신뢰(1-5절)

먼저 재앙 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기도로 하나님께 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1절)

다윗은 마치 사나운 폭풍 속에서 아기새가 어미새의 날개 아래 피하는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께로 피했다고 묘사한다. 폭풍이 오면 가장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것처럼 다윗에게 있어 이 재앙 중에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이셨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굴이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 있었다. 그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기 때문이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을 부른다. 이 시를 읽어보면 가장 특징적인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이 정말 자주 언급된다는 것이다. 세는 방식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20번 정도 하나님이 직간접적으로 언급된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다. 그의 다른 시편을 보면 때로는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많고, 그의 감정에 대한 묘사가 많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에는 그는 우선순위를 제대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 집중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이 재앙이 자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께도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을 쏟기보다 은혜를 구한다. 이 재앙에서 자신을 보호해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2절에 나온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2절)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언급한다. 첫번째는 그분이 “지존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가장 높으신 분이시다. 가장 높은 권세를 가진 분이 하나님이시다.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사울에 비할 수 없고 세상의 그 어떤 왕도 하나님보다 높지 않다. 하나님보다 강하지 않다.

두번째는 그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모든 것”이 강조되지는 않는다. 원문에는 없는 표현이 더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는 “나를 위하여 일을 끝내시는” 분이라고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끝내시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다윗은 그것이 나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음 받으신 하나님께서 결국 그를 왕으로 세우실 것에 대한 생각을 다윗이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렇게 다윗 개인에 대한 일들도 그 뜻에 따라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다윗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3절과 같은 일이 결국은 현실이 될 것을 기대한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3절)

하나님께서 결국 그를 구하실 것을 기대한다. “비방”은 나를 삼키려는 자가 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시는 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 경우는 “비방”이 아니라 책망이나 꾸짖음이 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내실지를 “(셀라)”와 문장의 순서를 통해서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무언가를 보내서 자신을 구원하실 것이라 기대하는데,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무엇을 보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수 있을까? 쉽게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의 메신저인 천사들이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서 다윗을 구원하실 수도 있다. 어쩌면 재앙을 경험하는 우리가 모두 바라는 것이 이런 것일지 모른다. 하늘에서 특별한 무언가가 와서 나를 이 재앙으로부터 구원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다윗이 기대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대신에 그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사랑(헤세드)과 그분의 변하지 않는 진리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10절에서 그가 찬양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그 진리는 궁창에 이르는데, 그것에 이 땅에 내려와 자신을 구원할 것을 기대한다. 지금의 이 재앙 속에서 그가 바라는 것은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동안 그에게 보여주셨던 그 사랑과 진리다. 그것을 지금 다시 깨닫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사자들 가운데 살고 있는 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며, 그를 삼키려는 자가 그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이 현재의 재앙으로부터의 구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4절과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면 기도로 하나님께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존하시며 나를 위하여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믿는다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그 인자와 진리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실 때, 결국 5절처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5절)

이렇게 이 재앙 중에도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시길 우리가 정말로 원한다면, 지금 우리가 할 것은 이것이다. 지존하신 하나님, 나를 위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인자를 기억하고 그분의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도로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게 된다. 여전히 사자들이, 불사르는 자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을지 모른다. 재앙은 여전히 그 위세를 떨칠지 모른다. 달라지는 것은 내가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재앙의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잊고, 하나님의 인자를 잊고 그분의 진리를 잊고 산다면 어떨까?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냥 아무 것도 아닌 분으로서 세상 속에서 드러날 것이다. 아무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분처럼 세상 가운데서 조롱 받게 될 것이다.

재앙 중에라도 삶의 목적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로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분을 높여야 한다.

II. 찬양(6-11절)

두번째로 다윗은 재앙 중에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하나님을 높였다.

다윗은 먼저 현재의 재앙을 다시 상기해보는 것으로 찬양을 시작한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6절)

다윗을 괴롭히는 자들은 매우 계획적으로 다윗을 사로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로 인해서 다윗은 “억울”하기도 했다. 낮아지다. 엎드리다. 비굴해지다와 같은 의미다. 그들의 계획이 잘 먹혀들어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그들의 자기 꾀에 빠진 적도 있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왔다가 오히려 무방비 상태로 다윗에게 노출되었던 것이 좋은 얘다.

다윗은 지금의 재앙을 돌아 보았다. 그것은 뭔가 너무 거대해서 항상 자신이 패배하고 피해만 본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가 보고 있지 못했을 뿐이지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를 보호하고 계셨고 승리하게 하셨다.

이에 다윗은 이번에는 기도가 아닌 찬양으로 하나님을 높인다. 7-11절은 아름다운 찬양시로서 오늘날에도 새로운 곡조를 통해 계속해서 찬양으로 드려지고 있다.

이 찬양에서 우리는 몇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첫번째는 다윗의 확고한 믿음이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7절 상)

다윗은 그의 마음이 확정되었다고 말한다. 확고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재앙 중이라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변할 이유는 없다. 여전히 그분은 지존하시고 나를 위해 일을 이루신다. 그리고 여전히 그분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에 그 확고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에 대한 의지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다윗의 찬양에 대한 의지는 매우 적극적이다.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7절 하)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8절)

다윗은 노래하고 찬송하겠다고 다짐하는데 그냥 기회가 되면,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깨운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는 것을 하게 활동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마치 죽어있는 것 같은 것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겠다는 말이다. 악기를 동원하고 모두가 잠든 새벽이라도 이 찬양을 멈출 수가 없다.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다음으로 다윗의 찬양은 공적이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9절)

숨어서 혼자만 찬양하겠다고 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도 찬양할 수 있지만, 다윗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말한다. 재앙 중에 있을 때 그는 사자들 가운데 살고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다고(4절) 말했지만, 이제는 그가 있는 곳을 만민 중, 뭇 나라 중이라고 말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끄러워할 분이 아니시며 오히려 자랑해야할 분이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10절)

하나님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그분의 진리가 온 세상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안다면, 우리는 찬양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의 찬양으로 하나님은 높아지실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11절)

재앙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재앙이 끝나고 할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변하지 않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적극적으로 분명하게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선포하며 찬양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을 높일 수 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재앙 중에 있을 때에도 우리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찬양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도전

살면서 많은 재앙 같은 일들을 만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무너지고 억울하고 답답하다. 분할 때도 있고 원망이 나올 때도 있다. 하지만 어느 때라도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합당하지는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주신 것은 무엇일까? 재앙 없는 평안한 삶일까? 아니다.하나님은 약속은 재앙 없는 삶이 아니라 그 재앙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재앙을 만날 때,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답답함을 조금은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무관심과 무개입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재앙은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려드릴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가 재앙 중에 그 목적을 잊지 않고 기도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여 하나님을 높일 때 그 목적을 이루게 될 것이다.

성경은 재앙을 나쁜 것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시는 모든 계획과 뜻에는 그런 재앙이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예수님도 그러셨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셨고 그것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었다. 베드로는 그것이 우리가 따라야할 본이라고도 말한다(벧전 2:21).

우리가 이렇게 재앙을 보지 못하면 결국 재앙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혹 지금 상황에서 고통스럽기만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면 잠시 멈춰서 이 재앙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우리에게 허락된 이 상황을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사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정말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리기 바란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가장 큰 인자와 진리를 예수님을 통하여 경험한 자들이다. 그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가 끝이 없음을 믿는다면, 기도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여 지금 이 재앙들이 지나가기까지 그런 하나님을 하늘 높이 들어올려 선포할 수 있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