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은혜, 그 크기에 놀라다
본문 : 룻기 4장 13-22절
설교자 : 이병권
룻 4:13-22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놀라십니까? 최근에 여러분을 가장 놀라게 한 일은 어떤 일입니까? 살다보면 우리는 놀랄만한 일을 자주 만납니다. 옷을 입다가 갑자기 늘어난 뱃살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날씨와 관계없이 언제나 축구를 하는 형제님들의 열정에 놀라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트에서 별로 산 것도 없는데 계산대에 나온 금액을 보고 놀라기도 합니다. 살면서 우리를 놀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이런 종류의 놀람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놀라워해야 하는 것을 하나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야 합니다. 자꾸 자꾸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야 하며,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변할 수 있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자격 없는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계속 묵상하고, 그 은혜에 푸욱 젖어서 살아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놀란 적이 있으십니까?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자주 그 은혜에 놀라고 계십니까? 필립 얀시가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이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이 책을 번역하면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원래 이 책의 제목은 조금 공격적인 제목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은혜, 뭐가 그렇게 놀랍습니까?”라는 제목입니다.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다고 말합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며, 아무런 감흥 없이, 그냥 의미 없이 쉽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 말에 대해서 도전하는 겁니다. 뭐가 그렇게 놀랍냐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습니까? 그러면 뭐가 얼마나 놀랍다는 겁니까? 도대체 왜 그렇게 놀랍다고 말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룻기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보여줍니다.
저는 오늘 룻기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 은혜에 놀라게 되기를 바랍니다. 룻기 열 번째 시간,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은혜, 그 크기에 놀라다”입니다.
그럼 먼저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룻기를 읽어왔는데, 오늘 그 아름다운 결말이 맺어집니다. 드디어 보아스와 룻이 결혼을 합니다. 룻기의 1장은 어떠했습니까? 그 시작은 장례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멀리 이방나라에서 나오미의 남편이 죽고, 또 그녀의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룻기의 마지막은 어떠합니까? 장례식에서 결혼식으로 바뀝니다. 슬픔의 자리가 기쁨의 자리로 변하는 반전의 드라마가 된 것입니다.
사실, 두 사람의 결혼을 보면서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보아스는 상당히 나이가 많았을 텐데, 나이 차이가 얼마나 될까? 보아스는 아내을 잃고 지내던 홀아비였을까? 아니면 아내을 두고, 또 다시 룻을 아내로 맞이한 걸까? 룻기의 저자는 이런 내용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했다고만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에만 관심을 모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결혼한 보아스와 룻에게 더 기쁜 일이 생기는데 룻이 임신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가 생겼습니다. 13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룻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셨다고 말하면서, 그녀의 임신이 하나님의 간섭하심,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룻은 모압에서 말론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룻의 헌신된 사랑과 순종에 대한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이에 베들레헴 마을의 여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오미를 축복합니다. 여기 여인들은 나오미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나오미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오미의 완전히 바뀐 지금 형편을 보고 함께 기뻐합니다. 나오미에게 상속자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진심으로 나오미를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이 아이가 나오미의 삶에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끊어져 버린 나오미 집안의 대를 이어 줄 것입니다. 또한 늙은 나오미를 보살펴 줄 것입니다. 쉽게 말해, 미래에 대해서 어떤 소망도 없이 텅 비어 있었던 그녀의 삶이, 이 아이로 인해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인들은 룻을 두고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라고 말합니다. 일곱 아들이 부럽지 않은 복덩이 며느리라는 것입니다. 일곱이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완전함’, ‘최고’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일곱 아들이란 말은 이 땅에서 부모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을 상징하는데, 며느리 룻은 그보다 더 큰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나오미에게 룻은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복덩이 며느리 룻은 나오미에게 아기를 안겨줍니다.
16절을 보면 나오미는 룻이 낳은 아기를 받아 그의 양육자가 됩니다. 특별히 여기서 “아기”라는 단어는 룻기에서 두 번 나오는데, 1장 5절에 나오미의 두 아들이 죽었다고 기록했을 때 “아들”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여기서는 “아기”로 번역되었습니다. 1장에서 어미보다 먼저 죽어 어미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했던 “아이”, 이제 4장에 와서는 기쁨과 회복을 주는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의 죽음으로 시작된 룻기는 아이의 출생으로 마무리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나오미가 이 아이의 양육자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나오미가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을 보면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어려운 점은 뒤에 나오는 족보에서 알 수 있지만, 이 아이가 엘리멜렉이나 말론이 아닌 보아스의 아들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견해는 나오미가 말 그대로 유모의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요즘 맞벌이 하는 자녀를 위해 할머니가 대신 아이를 봐주고 손주를 키우는 것처럼, 그런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기업 무를 자로서 땅을 되찾아주는 것과 수혼의 의무를 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 견해는 10절에서 보아스가 장로들 앞에서 했던 고백과 맞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룻기 보면, 이 두 가지 개념이 어느 정도 같이 나오기 때문에 어떤 것이 맞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양자로 삼았다고 보는 견해가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견해를 가질 때 생기는 어려운 점이 상대적으로 무난하기 때문입니다.
마을의 여인들은 이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줍니다. “오벳”이라는 이름인데, “섬기는 자”, “종”이라는 뜻입니다. 이 오벳이라는 아이가 바로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입니다. 다시 말해,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평범보다 못한 이 집안에서 왕의 할아버지가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족보가 나오는데 다섯 절에 걸쳐 열 명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베레스로부터 시작된 족보는 보아스와 룻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인 다윗에게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룻기가 끝이 납니다.
그러면 그동안 함께 살펴봤었던 룻기 말씀들을 떠올리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룻기 전체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압 여자, 룻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 룻을 이스라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셨고, 보아스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엄청난 은혜를 그녀에게 주셨습니다. 또한, 과부되었던 나오미는 어떻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오미는 정말 비참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의 모습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나오미인가?‘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오미는 여인들이 부르는 찬양이 되었습니다. 여인들이, 하나님이 나오미에게 하신 일을 노래하며, 나오미를 축복합니다. 자기를 즐거움이라는 뜻의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괴로움이라는 뜻의 “마라”라고 부르라고 했던 여인이, 이제는 크게 웃으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텅 비어서 빈손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고 괴로워했던 여인이, 그 늙은 과부가, 이제는 일곱 아들 안 부러운 며느리를 통해, 그 품에, 그 손에 아들을 안고 있는 겁니다. 반전입니다. 이 모든 반전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룻과 나오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먹을 양식을 주시고, 다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자녀도 허락하셨습니다. 마을 여인들이 찬송하며, 하나님이 이 일을 하셨음을 고백했던 것처럼 룻과 나오미도 당연히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 알지 못했습니다. 다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그 크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정말 놀랍습니다. 어메이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그들이 생각하고 인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거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생계를 유지시켜주고, 엘리멜렉의 가계를 지속시켜주고, 가련한 과부들을 구해주는 정도의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사실을 몰랐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이방여자의 이름으로 성경을 기록케 하셨습니다. 모압 여인, 룻을 영원토록 읽힐 말씀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메시아의 족보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5절에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하나님은 룻기의 기록된 여러 사건들을 이끌어 가시면서 인류 구원의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일에 이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가늠할 수 없는, 높고도 깊은 은혜를 주신 겁니다. 룻이 천국에서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어땠을까요?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며,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내가 무엇이기에, 내가 한 것이 무엇이라고,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큰 영광을 누리게 하시는 걸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차원이 높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 이 땅에서는 결코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사용해서 어떤 드라마를 만들고 계시는지, 우리를 어떤 위대한 일에 엮여 놓으실지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실지 모르는 겁니다.
에드워드 킴벨이라는 주일학교 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 반의 아이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확실히 알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마다 아이들 한 사람씩 찾아가면서 그 은혜를 전하고, 구원을 점검했습니다. 그러던 중, 학교를 포기하고 삼촌의 구둣방에서 일하는 가련한 아이를 찾아갔습니다. 그 아이에게 복음을 전했고, 구둣방 작업실에서 그 아이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후에 그 아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됩니다. 그 아이가 D. L 무디입니다.
여러분,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에드워드 킴벨이라는 한 주일학교 교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동해서 뭔가를 했던 한 사람을 통해서 이 위대한 드라마가 시작된 것입니다. 에드워드 킴벨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교사를 했고 아이들을 사랑함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임한 은혜가 이 정도인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이 이렇게 쓰임 받을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는 몰랐습니다. 그 은혜를 다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놀랍습니다. 그래서 훗날, 우리가 온전한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분명히 알고, 보는 날이 되면 정말 크게 놀랄 것입니다.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놀라운 것이었나!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은혜의 크기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다 가늠할 수 없습니다.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통해 어떤 위대한 일을 이루실지, 어떤 은혜의 드라마를 써 내려가실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았고 누리는 은혜가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누리게 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지금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그 은혜를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은혜가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오미에게 그리고 룻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봤습니다. 그 은혜가 놀랍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는 크신 하나님의 은혜!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은혜의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도 허락하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하나뿐인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내 삶을 변화시킵니다.
많은 사람들이 뭔가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 인생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로또를 사기도 하고, 오디션 프로에 나가기도 하고, 성형을 하기도 하고, 스펙을 쌓기도 하고, 많은 돈을 벌기도 하고, 그런 꿈을 꾸며 삽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 인생을 가치 있게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바꿉니다. 우리를 새 사람 되게 하고, 새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고, 새 힘을 주는 겁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히면, 내 태도가 변하고, 내 말이 변하고, 내 행동이 변합니다. 그 은혜가 날마다 내 마음을 주장하며 역사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은혜가 내 삶을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존 뉴턴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방탕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거칠고 난잡한 삶을 살았습니다. 감옥에 가기도 했고 탈옥도 했습니다. 그러다 노예들을 사고파는 일에 종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노예무역을 끝내고,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폭풍을 만납니다. 배가 파선이 되고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그는 폭풍우 가운데서 기도드리며, 자기가 노예무역을 하며 지었던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그는 자격 없는 자신을 구원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변화된 삶을 삽니다. 그리고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송시를 씁니다. 그것이 “에메이징 그레이스”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열려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큰지 깨닫고 놀라며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우리 삶에 넘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 날마다 놀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사모하고, 그 은혜를 누리고, 그 은혜를 전하고, 그 은혜를 나누고, 그렇게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의 삶은 더욱 아름답게 변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