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은사와 사랑2
본문: 고린도전서 13장 8-13절
설교자: 조정의
성경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구절 중 하나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이다. 연애편지, 사랑의 문자, 결혼식 청첩장에 자주 사용되는 이 구절의 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쉽게도 많지 않다. 최악은 이 구절을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을 지지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기독교 진영에서 종종 이 구절을 사용하며 기독교 믿음보다, 기독교가 바라는 천국 소망보다 사랑이 제일이라고 성경이 가르치는데 어떻게 서로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을 정죄할 수 있냐고 비난한다. 한때 복음주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목사였던 롭 벨은 ‘사랑이 이긴다’라는 제목의 책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둔 믿음이나 그분의 약속에 둔 소망 없이도 하나님 사랑은 모든 죄인을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끔찍한 주장을 했다. 우린 말씀의 참 의미를 은사와 사랑의 문맥에서 파악해야 한다.
바울은 먼저, 사랑 없이 은사가 사용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못 박았다(1-3절). 그리고 사랑으로 은사를 사용하는 방식이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4-7절). 마지막으로 본문에서(8-13절) 바울은 은사보다 사랑을 더욱 추구해야 할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바울은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사랑을 제쳐두고 서로 자기 은사를 드러내기 위한 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사랑을 우선하고 있는지 깊이 돌아보게 하시기를 구한다.
1. 이유1: 은사는 끝나도 사랑은 영원하다(8절)
은사보다 사랑이 더 중요한 이유는 은사는 일시적이고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에콰도르 선교사 짐 엘리엇이 했던 유명한 말,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지 않다’는 은사와 사랑의 중요성을 가릴 때, 충분히 적용할 만한 기준이 된다.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8절).
사랑도 은사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으로 영원하고(요일 4:8), 은사는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교회에 주신 선물로 기한이 있다. 예언과 지식은 ‘폐할 것이다’(카타르게오). 이 은사들이 어느 날 비활성화 되고 작동을 멈출 것이라는 의미다. 지금까지 성령께서 예언으로 전달하신 지식이 무의미해질 것이란 말이 아니다(벧후 1:21). 예언과 지식의 은사가 중지될 것이란 말이다. 방언도 ‘그칠 것이다’(파우오). ‘마치다’, ‘끝나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예언과 지식은 수동태로서 외부에 의하여 멈출 것을, 방언은 중간태로 한정된 지점에 이르면 스스로 멈출 것을 각각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예언이나 지식을 주지 않으실 때가 올 것이고, 방언은 필요하지 않게 되어 스스로 멈출 때가 올 것이란 말이다(고전 14장).
하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거나 변질되지 않고 영원하다는 말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요일 4:7, 16):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은 무리로서 하나님 사랑 안에 영원히 거하고 하나님께 속한 사랑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한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은사를 주신 것이다. 언젠가 도구는 불필요해지고 하나님 안에서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근데 영원한 사랑보다 그 사랑을 세우기 위한 일시적 도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교회 각처에 일꾼이 참 많이 필요하다. 제 기능을 하는 지체로 모두 일해야 한다. 그런데 일을 잘 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을 이루는 것이다. 사랑은 업적과 성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나 자랑, 교만, 무례함, 이기심, 분노, 불의, 행악을 버리고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친히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과 언행이 우리가 교회로서 하는 모든 일 가운데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섬기는 곳에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일 중심, 사람 중심이 아니라 언제나 사랑 중심으로 섬기라.
2. 이유2: 은사는 부분적이나 사랑은 온전하다(9-12절)
은사보다 사랑이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은사는 제한적이지만 사랑은 온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지식)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9-10절). 교회가 은사로서 사용하는 지식과 예언은 제한적이다. 아무리 탁월한 은사를 받은 사도라도 하나님의 지식을 다 알 수는 없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앞서 바울은 은사가 폐할 것이라고 했다. 부분적으로 하던 것과 비교되는 온전한 것이 올 때 그렇게 된다. 그러면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언제인가? 11-12절이 답한다.
먼저, 11절은 온전한 것이 올 때 부분적으로 알던 것을 버리는 이유를 장성한 사람이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을 버리는 것을 예로 답한다.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어린 아이와 같다. 하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면 어린 아이와 같은 생각과 이해와 말을 모두 버리는데, 이는 온전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관하여 부분적으로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데 필요한 은사는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때, 불필요해질 것이다.
12절에서 다시 한번 이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세기 로마 시대 사용된 청동 거울은 반사율이 매우 낮아 희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은사를 통해서 우리가 아는 주님은 그렇게 부분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고, 온전히 주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은사와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충분한 도구이지만,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에 비하면 제한적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친히 만나게 될 때,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될 그날(엡 4:13), 부분적인 은사는 모두 사라질 것이고, 교회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영원히 거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사모하며 기다린다. 부분적으로 주를 아는 기쁨을 누리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교회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그날이 온전한 것이 올 때라면, 그때까지 예언과 지식의 은사는 계속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확실한 예언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발견하도록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시고 부지런히 전파하는 과정을 통하여 성령이 교회를 진리 안에 자라게 하시고 보호 및 인도하시는 것이 예언과 지식의 은사라면 그렇다(존 맥아더). 그러나 만일, 예언과 지식의 은사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또 다른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아서 전달하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다(R. C. 스프로울, 계 22:18-19).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언이 모두 끝났다고 말한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히 2:3b-4). 베드로도 이렇게 말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이제 너희에게 알린(부정과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0-12).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들은 하나님의 음성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성경의 모든 예언”이라고 말했다(벧후 1:17-20). 성경에 기록된 확실한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벧후 1:21).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예언을 전하라고 하지 않고 “말씀을 전파하라”고 엄히 명했다(딤후 4:2). 이제 교회에 필요한 말씀의 은사는 가장 확실한 예언인 성경의 모든 예언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부지런히 전파하고 가르치고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는 은사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벧후 3:18).
온전히 하나님을 알게 될 그날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희미하게 안다면,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한 노력을 덜 해도 될까? 어차피 부분적으로 안다면, 덜 알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사랑하는 연인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하여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는 데 있어서 가장 유익하고 충분한 도구다. 당신의 은사를 통하여 성도를 사랑으로 섬기라.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되기를, 하나님의 사랑이 동력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확실하게 알게 하는 말씀을 사모하고 부지런히 읽고 배우라. 부분적으로 주를 아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온전히 그분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3. 이유3: 그런즉 제일은 사랑이다(13절)
은사보다 사랑이 우선인 마지막 이유이자 결론은 이것이다: “그런즉…제일은 사랑이라”(13절).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사랑이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을 포함한다(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믿음이시라’, ‘소망이시라’라고 증언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증언한다(요일 4:16). 하나님께 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을 만나는 그날 온전히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 제일이다. 최우선이다.
며칠 전에 미국에서 은퇴한 한 목사님과 영상통화를 했다. 그분은 ‘과거로 돌아간다면 다시 목회하고 싶은가?’라고 누군가 물을 때 ‘예 그리고 아니오”라고 답한다고 했다. 목사와 교사의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소명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특권이고,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가르치며, 성도를 온전하게 세우는 일은 정말로 선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오래 참아야 하는 일이다. 때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언제나 온유해야 하는 일이다. 권위를 사용하여 나를 변호하고 억울함을 해소하고 싶을 때도. 시기하거나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나보다 더 뛰어난 은사를 가진 사람을 보더라도. 나를 죽이고 남을 살려야 하고, 나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앞세워야 한다. 계속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져도. 항상 친절해야 하고 분이 나도 다스려야 한다. 상대방은 무례하게 대하고 분을 표출해도. 언제나 진리를 말해야 한다. 상대방이 못 받아들이고 오해하고 비방한다고 해도.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특성은 목회의 은사를 받고 섬기는 성도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봉사의 일에 힘쓰는 성도에게 요구된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은사를 통하여 다른 성도가 유익을 얻을 때 진심으로 기뻐하지만, 정작 그 은사로 섬기면서 사랑이 요구될 때, 쉽게 낙심하고 포기한다. 참아야 할 일이 생길 때, 온유해야 할 때, 나를 알아주지 않거나, 다른 사람이 더 인정받을 때. 그러면 더 이상 섬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랑을 제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사용하여 섬기신 분이다. 지혜와 권위가 담긴 가르침, 놀라운 병 고침과 기적들.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 믿는 자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분노하고 대적하고 무례히 행하고 죽이려고 하고 비방하고 조롱했다. 그때 예수님은 은사로 섬기는 것을 멈추셨는가? 아니다. 그분은 그때 더 큰 사랑으로 답하셨다. 더 온전한 사랑으로 원수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어떤 직장에서는 일할 때 반드시 입어야 할 의복이 있다(작업복, 유니폼). 교회에서도 일할 때 반드시 입어야 할 의복이 있다는 걸 잊지 말자.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입으신 옷으로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의 옷이다. 이 옷을 온전하게 매는 띠는 사랑이다. 교회에서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섬기든지, 사랑을 옷 입자. 그래서 말에나 일에나 그리스도 사랑이 드러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