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은사를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사용하라
본문: 고린도전서 14장 1-25절
설교자: 조정의
신령한 것에 대하여(12:1)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간절히 알려주기 원했던 모든 지식은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된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1절). 성령께서 나누어주신 신령한 은사는 교회가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라고 은사의 우선순위를 세운다. 모든 은사가 다 성령이 주신 것이고(12:11), 교회를 세운다는 면에서 같은데(12:7), 어떤 근거로 우선순위를 세운 것일까? “유익”이다(3, 4, 5, 6, 12, 17절).
고린도 교회는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였고,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다(1:5, 7).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받은 성도가 많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은사를 사용할 땐 중요한 우선순위를 따라야 했다. 바로 더 많은 성도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 가운데 분쟁을 가져온 방언과 예언의 은사 활용에 성경이 어떻게 질서를 잡는지 살펴보고, 우리가 교회로서 성령이 주신 은사로 서로 사랑하며 섬길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목표를 세워보자.
1. 모든 은사는 유익하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바울이 방언을 예언보다 못한 은사로 평가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혹은 예언은 유익하지만, 방언은 무익하다고 판단했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하나…”(5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8절). 바울은 과장하여 모든 성도가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성령께서 모든 성도에게 방언의 은사 주시기를 바란다는 말이 아니다(고전 12:30). 그만큼 방언이 무익하거나 해로운 은사가 아니라 유익한 은사라는 말이다. 방언의 은사가 실제로 교회에 유익하기 때문에 바울은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게 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바울은 나아가 방언과 같은 영적인 은사가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권했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12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이다. 방언은 교회를 ‘세우고 견고하게 하는 일에 분명히 유익’하다. 하지만, 반드시 조건이 따른다: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5절b). 여기서 방언보다 예언을 특별히 더 추구하라고 권면한 바울의 의도가 드러난다(“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1, 5절). 통역 없이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고 그래서 예언보다 뒷순위가 되는 것이다.
2. 모든 은사가 주는 유익이 같은 건 아니다
그러면 통역이 없을 때, 방언은 왜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할까? 그 답은 아주 쉽다. 알아듣지 못해서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9절).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를 계속 듣는 것은 유익한 일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일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열심히 내도 허공에 말하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가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7~8절에서 이를 악기에 비유한다: (피리, 거문고, 나팔). 생명 없는 악기도 소리를 낼 때 음의 분별을 나타내야 한다. 그래야 피리인지 거문고인지 알 수 있다. 나팔도 분명한 소리를 내야 신호를 알아듣고 전투를 준비할 수 있다. 생명 없는 악기도 그런데, 영생하시는 성령께서 주신 은사로 분명하지 않은 말과 분별하기 힘든 소리를 내는 것은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우린 뜻을 전달하기 위해 혀로 소리를 낸다. 그래서 뜻이 전달되지 않는 방언은 아무 유익이 없는 소리다.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10-11절).
통역이 없다면 방언은 분명 예언에 비하여 유익을 덜 주는 은사가 된다(2-4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방언도 예언도 모두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결국 하나님께만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행위가 된다. 은사를 활용하는 자기는 유익해도 교회는 유익을 얻지 못한다. 반면 모두가 알아듣는 언어로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위로와 권면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더 유익한 은사가 된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가 있는 자는 자기 은사 사용하는 데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통역하기를 기도해야 한다(13절).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해야 한다(28절).
성경이 말하는 방언의 은사는 이처럼 성령의 능력을 받아 외국어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은사다. 그래서 통역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는 자들은 누구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소리로 하나님께 영으로 말하고 기도하는 신비로운 행위를 방언이라고 믿고 실천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려고 본문을 이용한다(2, 14-16절, “영으로”). 방언을 우리 마음과 정신의 통제 밖에서 일어나는 영적 교감, 교통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은 정확히 반대를 말한다. 성령의 은사는 마음을 지나쳐 영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과 마음 모두를 통하여 사용된다. 황홀경에 빠져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쏟아내는 이교도의 방식과는 분명히 달라야 하는 것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14-17절). 방언의 은사를 받은 성도는 성령이 주신 은사로 신령한 일 즉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성도를 축복하는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방언을 알아듣지 못해 유익을 얻지 못한다는 마음의 분별 혹은 판단이 선다면 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다. 아무리 나는 성령의 은사로 감사를 잘 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면 하지 않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9절). 다섯 마디와 일만 마디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2000배). 그만큼 유익이 덜 되는 은사는 덜 사용하고, 더 되는 은사는 더 사용하라는 것이다.
3. 많은 유익을 주는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사용하는 일에 지혜가 없었다. 그들은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덕을 세우려고 경쟁했다. 이것은 단지 미련한 일이 아니라 불의한 일이다. 어리숙한 게 아니라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사랑은 자기 유익이 아니라 다른 성도의 유익을 구한다.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다. 그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 어리석음을 버리고 성숙함을 입어야 했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해야 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20절).
그들이 배워야 할 방언에 관한 하나님의 지혜가 구약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21절, 사 28:1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하나님은 말씀 앞에서 완고한 마음, 듣지 않는 귀를 가진 자기 백성을(믿지 아니하는 자들, 22절) 위하여 “다른 방언”, “다른 입술”이라는 표적을 사용하길 원하셨다. 놀라운 표적을 보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돌이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방언을 주신 주목적이다. 방언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 뜻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회개와 구원을 가져다주는 유익한 은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그런 용도와 목적으로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은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는 상황을 가정한다(23절). 그러면 유익이 있을까? 없다. 오히려 “미쳤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왜 그런가? 알지 못하는 자들(하나님 말씀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자: 미련한 자, 행 4:13)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조금도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방언을 이해하지 못해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 볼 때, 풍성한 방언은 오히려 ‘미친 것’처럼 보일 뿐이다. 교회는 이교도 모임과 별 차이가 없는 종교 단체로 보인다.
똑같은 상황에서 방언이 아니라 예언이 사용됐다면 어떨까?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24-25절). 예언은 주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을 위한 은사이지만(22절),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될 때, 알지 못하는 자들 또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도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일이다(요 16:8). 성령님은 성도가 예언의 은사를 통하여 그분을 나타낼 때,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들의 죄를 드러내시고 그들로 의로운 판단 앞에 서게 하시고 그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신다. 결국 그 영혼을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고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만들며, 우리 가운데 확실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고 진실로 고백하게 하신다. 자, 결론적으로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방언도 예언도 모두 성령의 은사고, 모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것이니까 누가 얼마나 어떻게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 결론은 분명하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절).
성령께서 교회에 선물로 주신 모든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교회에 유익을 주고 교회가 믿는 도리 가운데 굳게 서고, 서로 위로와 권면과 축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주고받게 하려는 것이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다. 교회는 그 목적에 합당하도록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더 많은 유익을 교회에 줄 수 있도록,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더 합당하도록. 육신의 재능과 기술이 탁월하다고 교회 일을 함부로 맡기면 안 된다. 오히려 덕을 세우는 일에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충분히 유익을 줄 수 있는 일로 교회를 섬기도록 해야 한다.
어떤 교회는 모든 거듭난 성도를 강단에 세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게 한다. 성령께서 각 성도에 주신 다양한 지혜를 다채로운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먼저는 성령께서 가르치는 은사를 모두에게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다음으로는 가장 최대로 교회가 유익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어떤 교회는 헌금을 많이 하거나 교회 생활을 어느 정도 성실하게 하면 집사나 권사 같은 직분을 맡긴다고 한다. 왜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성령께서 모든 사람에게 직분을 맡기지 않으시기 때문이고,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말씀의 기준에 따라 직분을 맡길 때, 교회가 가장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교회는 반드시 이 원칙을 따라야 한다. 누군가를 세우는 일, 어떤 일을 맡기는 일, 맡은 일을 그만두거나 다른 일로 섬기는 일 등 모든 것은 반드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일이 되어야 한다.
어떤 이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계산적이지 않고 다만 희생적인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철저히 가치를 계산한 순종이었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높여드리는 선택이었고, 아버지가 택하신 자들의 모든 죗값을 치러 믿는 그들에게 부어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값을 계산한 순종이었다. 예수님의 순종이 희생적인 사랑인 이유는 계산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 유익보다 아버지와 교회의 유익을 훨씬 가치 있게 계산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주께서 주신 신령한 것들로 서로를 섬기는 우리 교회도 그분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방언도 예언도 모두 신령한 것이고 유익을 주는 것이며, 바울 자신도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말하고 많은 예언을 한 사람이었지만, 교회에 가장 유익이 되도록 은사를 사용하라고 명령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훨씬 가치 있게 계산하라는 십자가 사랑의 요구다. 교회는 반드시 이 원칙에 따라 세워져야 한다. 우리가 서로의 유익을 최고로 구할 때, 교회는 사랑으로 서고 주께서 역사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