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운 주의 만찬(2/2)
본문: 고린도전서 11장 27-34절
설교자: 조정의
고린도 교회가 주의 만찬을 먹고 마시기 위하여 모일 때마다 서로에게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을 끼친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 사이에 있던 분쟁과 파당이었다(18-9절). 특별히 부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 사이에 차별, 무례함, 배려 없음, 멸시, 판단, 사랑 없음이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하는 낯부끄러운 모습으로 나타났고(21절)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성도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심각한 죄였다(22절).
그래서 바울은 일 년 반 동안 부지런히 가르치고 훈련했던 주의 만찬의 본래 의미와 그에 합당한 실천을 그들이 되찾기를 간절히 바랐다(23-26절). 그리고 결론적으로 매우 실제적인 미봉책을 제시했다: “33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을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33-34절). 1) 서로를 기다려 줄 것, 2) 너무 배고프면 집에서 먹고 모일 것. 일단 이렇게만 해도 안팎으로 판단 받는 모임은 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더 깊은 분쟁의 뿌리와 그 증상은 직접 와서 바로잡으려고 했다.
바울은 서로를 판단하지 않고 배려하는 모임이 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각 성도가 주의 만찬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지 않길, 그래서 주의 징계를 면하기를 바랐다. 본문(27-32절)은 오늘날 우리가 주의 만찬을 대하는 자세를 매우 진지하게 점검하도록 돕는다. 떡과 잔을 나누기 전 매주 선포하는 ‘구원받은 성도가 자기를 살피고 참여하겠습니다’라는 말의 참 의미와 중요성을 배워서 우리 모임이 해롭지 않고 유익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1. 주께 받는 징계(30-32절)
우리가 주의 만찬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주께서 그것을 매우 심각한 죄로 판단하고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 적지 않은 성도들이 주님께 심판을 받아 병들고 연약해지고 심지어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30절). 잠자는 자는 성도로서 육신의 죽음에 이른 자를 가리킨다(고전 15:18,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 “그러므로”는 그들이 받은 징계에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심.’
성도들 중 기력을 잃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죽음에 이른 자가 있으면 죄 때문에 하나님께 징계받는다고 봐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욥이 온몸에 종기가 생겨 고통에 울부짖게 된 것은 그의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욥의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다고 착각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라고 오해했다(사 53:4). 하지만,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성도가 당한 고난을 죄와 함부로 연결 짓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주께서 때로는 죄를 직접 다루신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경우가 그랬다. 그들이 주님의 심판을 받은 것은 정확히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31절). 여기서 “판단”은(크리노) “판결”, “유죄 선고”, “심판”을 뜻한다. 그들은 주님께 유죄 선고 나아가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을 살폈다면.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들을 지금 심판하신 것은 그들이 자신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 너무나 분명했다.
자신을 살피지 않아 주의 심판을 받는다? 정확히 어떤 경우를 말하는가? 주의 몸을 분별하지(살피다)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판단)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29절). 그러니까 살핀다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먹고 마시기 전에 자신을 정밀 검사한다는 뜻이고, 그렇게 하지 않고 함부로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심판을 자초한다는 것이다(스스로 주의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 여기서 심판은 영원한 심판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벌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도 자신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다. 그래서 성도에게 내려진 심판을 징계라고 부른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라고 하면서(히 12:5),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라고 하나님의 본심을 밝혔다(히 12:6). 물론 징계 자체가 즐거운 것은 아니다. 병들고 아프고 죽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주님이 주신 징계의 목적이 우리의 선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12:11).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판단(심판)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었다(32절). 목적이 무엇인가?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영원히 정죄하고 심판하실 때, 그들이 함께 멸망 받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프고 병든 자는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시려는 것이고, 죽은 자는 살면서 더 심각한 죄로 자신과 교회를 파멸로 인도하는 것을 막으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간과 그 가족을 전멸시켜 이스라엘 전체에 죄가 퍼지는 것을 막으셨고(수 7장), 미디안 여인과 행음하는 자기 백성을 비느하스의 손에 들린 창으로 찔러 죽여 이스라엘 전체에 퍼지던 염병을 막으셨다(민 25장). 그러면 주께서 고린도 교회 내리신 징계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고 유익할까?
바울이 그 합당한 태도를 제시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 15:4).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경험한 주님의 징계를 우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바울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징계를 언급하며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지 말자’라고 권면했다(고전 10:8-10).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라고 말했다(고전 10:11).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무분별하게 주의 만찬을 대하지 말자. 자신을 살피지 않고 함부로 만찬을 먹고 마심으로 주의 심판을 자초하지 말자. 주님의 징계를 절대 가볍게 여기지 말고 돌이키자.
2. 주의 몸을 분별(27-29절)
자, 그러면 어떤 죄로부터 돌이켜야 할지 그 죄를 더 깊이 들여다보자. 우리가 살펴볼 죄는 바로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죄다(27절). 죄는 그것을 저지르는 대상에 따라 죄의 크기와 심각성이 결정되는데, 27절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라고 무섭게 경고한다. 우리는 떡과 잔이 주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물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물건을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중요하게 구별하셨다. 그래서 웃사는 언약궤를 손으로 만졌다가 죽임당했고(대상 13:10),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분향했다가 여호와의 불에 삼킴을 당했다(레 10:1-2). 떡과 잔도 그렇다. 가볍게 여기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더라도 이것은 심각한 범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찢기시고 흘리신 생명을 멸시하는 것은 그분의 희생적인 사랑과 은혜를 배반하고 싸구려 취급하는 배은망덕한 죄다.
그래서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자기를 살피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28절). 자기를 살피는 것은 떡과 잔을 대하는 사람의 마땅한 태도다. 자기를 살핀다는 것은(도키마조) 자신을 ‘면밀히 조사하’고 ‘검증’한다는 의미다. 어떤 시험을 통과한 제품에 품질보증 마크를 찍는 것과 같다. 그러면, 떡과 잔을 대하기 전에 어떤 시험을 통과해야 할까? 자신을 면밀히 조사했을 때, 어떻게 하면 검증된 걸까?
먼저, 문맥 안에서 살펴보면 자기를 살핀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삶의 점검이 아니라 성도와의 관계 점검이다. 바울이 문제 삼은 고린도 교회 주의 만찬은 개인적으로 죄 많은 삶을 살다가 떡과 잔을 자체 비판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도가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차별하고 편을 가르는 문제였다. 그리스도의 몸이 찢겨 하나 되게 한 지체들이 스스로 찢어지고, 그리스도의 피로 한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을 스스로 깨는 것의 문제였다. 그것이 주의 만찬을 흉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살핀다는 것은 먼저 언약의 공동체 안에서 여전히 갈등 가운데 있고 분쟁 가운데 있는 관계가 있을 때, 그것을 회개하고 돌이킨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5:23-24).
고린도 교회의 경우 부자들은 가난한 성도를 차별하고 멸시한 죄를 돌이켜 회개해야 했다. 하나님 앞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성도를 찾아가 용서를 빌어야 했다. 가난한 성도들은 그들과 갈등 관계에 있던 부유한 성도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할 수 있어야 했다.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한 죄를 하나님과 잘못한 성도들 앞에서 자백해야 했다. 자기를 살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하는 것이다. 잘잘못을 따지거나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주의 몸과 피로 이루신 언약 공동체에 해를 끼치고 있는 죄가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관계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맺는 것이다. 상대방이 화목을 거부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할 수 있거든…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명령한다(롬 12:18). 그러나 상대방이 나를 용서하지 않고 자기 죄를 자백하지 않고 화해의 손을 계속 뿌리치면, 화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주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것은 합당한가? 만일 화평을 이룬 상태에서만 떡과 잔을 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모든 사람과 전부 화평을 이루어야 하는 불가능한 과제에 도전해야 할 것이다. 주의 만찬에 합당한 태도를 내가 갖추는 게 중요하다. 만일 죄를 범한 대상에게 충분히 잘못을 구했고 용서를 빌었으며 계속해서 화목을 이루려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품는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과 은혜에 합당한 자로서 떡을 먹고 잔을 마실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는 마음과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떡과 잔을 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과 은혜에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용서받은 자가 그 은혜에 감격하면서 여전히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증오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마 18장).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주의 만찬을 대한다는 것의 확장된 의미엔 분명히 자기 개인의 삶을 돌아보는 것도 포함된다. 떡을 먹고 잔을 마시기 직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평가하는 게 아니다. 60점 이상은 먹고 마실 수 있고, 그 이하는 넘어가는 방식으로 주의 만찬을 대하는 게 아니다. 개인의 삶을 돌아볼 때도 주께서 몸과 피를 내어주심으로 이루신 복음에 합당하게 살기 원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만찬도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하나의 설교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설교를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인가? 한 주간 제법 잘 살아낸 사람?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은사를 맡기신 자를 통하여 성경의 본래 의미를 풀어 설명하시고 그 기쁘신 뜻대로 살라고 명령하실 때, 들을 귀 있는 사람은 겸손히 그 말씀을 듣는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반항심과 완고함을 버리고, 기쁨으로 그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결단한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피로 맺으신 교회가 함께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또 다른 설교를 선포할 때, 합당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함께 외치는 그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한 목소리로 선포한다. 주께서 죽으심으로 이제 나는 죽었다고 선포한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겠다고 선포한다. 주님이 죽음으로 사하신 죄를 미워하겠다고 선포한다. 주님이 부활로 나에게 주신 새 생명을 전부 주님께 드리겠다고 선포한다. 주가 오실 그때까지 계속해서 주를 사랑하고 주님께 충성하겠다고 선포한다. 그것이 우리가 떡과 잔을 대할 때 항상 고백하는 바다.
매주 설교를 들을 때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완악함과 반발심은 분명히 영혼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그러면 매주 또 다른 설교인 만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겠는가? 떡을 먹지 않고 잔을 마시지 않는 것은 단지 입에 음식을 넣지 않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용서를 공급받지 않겠다는 반항이다. 그분의 몸과 피가 이루신 놀라운 복음의 능력대로 살지 않겠다는 고집이다. 그런 자를 하나님이 징계하신다고 해도 놀랄 것이 전혀 없다. 그래서 교회는 떡과 잔을 먹고 마시지 못하게 막는 것을 매우 무거운 교회 권징으로 사용해 왔다. 주의 만찬이 주는 유익을 간절히 사모하여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도록. 자신을 살펴 그 유익을 풍성히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