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운 주의 만찬(1/2)

본문: 고린도전서 11장 17-26절

설교자: 조정의

교회의 연합은 기적이다. 생각, 성격, 취향, 인종, 국적, 신분, 성별 등 많은 것이 서로 다른 수십, 수백 명의 무리가 하나가 된다는 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하신다. 복음이 교회를 연합하게 한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다(엡 4:3). 각자의 생각 차이, 성격과 취향 차이, 성별과 출신, 신분 차이가 분명 존재하고, 그 다름이 갈등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의 모든 지체가 그리스도께 기쁨으로 순종한다면, 복음에 합당한 사랑으로 서로를 대한다면, 성령의 능력으로 연합을 지켜낸다면, 교회는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진리와 사랑의 연합 공동체를 이루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찬란히 드러낼 것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교회에 분쟁과 파당이 있다는 건, 그만큼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권위가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을 거스르는 셈이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다. 그들은 자기 지혜를 자랑하며 지혜 없는 자들과 자신을 구별했다. 그들이 더 뛰어나다고 여기는 일꾼을 이용해 파를 나눴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갈등이 있었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 무질서한 경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심각한 차별이 있었다. 그 문제가 가장 적나라한 모습으로 드러난 건 그들이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때였다(20절). 그리스도와 복음이 선포되는 가장 유익해야 할 교회의 예배가 도리어 해로운 모임이 됐다. 매우 긴급하고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주께서 직접 징계하실 정도였다(30절).

앞서 바울은 그가 전하여 준 대로 전통을 지키는 고린도 교회를 칭찬한다고 했다(2절). 그러나 그들이 교회에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드리는 모습은 도저히 칭찬할 수없는 큰 문제를 지녔다(17, 22절). 그 문제를 다뤄 그들의 해로운 모임이 유익한 모임이 되기를, 진실로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복음이 성도들 안에 풍성한 지혜와 능력을 공급하여 파당의 문제가 해소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바울은 본문을 기록했다. 성령께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를 살피게 하시고 우리가 교회로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 모두의 유익이 되게 하시길 원한다.

1. 문제의 본질: 교회를 나눈 파당(17-19절)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17절). 바울이 칭찬할 수 없었던 “이 일”은 23절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 이후로 설명하는 일 곧 주의 만찬이었다(20절). 바울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분명히 그들에게 유익이 될 주의 만찬 전통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실천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모여서 드리는 주의 만찬은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을 가져다줄 뿐이었다(17절). 바울은 문제의 본질이 분쟁이라고 진단했다.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18절). “먼저”는 ‘으뜸가는’, ‘가장 중대한’의 뜻을 갖는다. 고린도 성도가 교회에 모일 때, 교회라는 장소에 모인다기보다는 교회로서 함께 모여 공적인 모임을 가질 때를 뜻한다. 바울은 이미 글로에의 집 편으로 고린도 성도들 간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1:11-17). 그런데 그 분쟁이 하다 하다 이제는 교회의 공적인 예배 중에도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바울은 그가 들은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말이라 신뢰하며 받아들였다. 고린도 교회가 모여 주의 만찬을 나누는 모습에서 분명히 분쟁이 가장 중대한 문제로 드러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분쟁이 문제의 깊은 뿌리였다.

분쟁은(스키즈마) 기본적으로 ‘찢어짐’, ‘나눠짐’을 뜻한다(마 9:16, 옷이 “해어짐”, 요 7:43, “쟁론”). NIV성경은 이를 ‘차이’, ‘다름’(difference)로 번역했다. 분쟁이 차이와 다름에서 시작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필연적으로 파당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성도가 복음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면, 서로가 달라도 그리스도께 굴복하는 마음이 같으면 충분히 아름다운 연합을 이룰 수 있다. 문제는 차이와 다름을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로 삼을 때, 성령께서 복음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힘보다 더 큰 반항심으로 서로를 판단 및 차별하는 정욕을 따를 때 발생하는 것이다.

교회에 파를 나뉘게 할 요소는 정말 많다: 지역, 출신 교단, 인종, 성별, 리더십 가족이나 친척, 학력, 신분, 부, 결혼 여부 등. 서로 다른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위해 싸우면 틀림없이 분쟁이 일어난다. 그래서 바울은 분쟁 중에 있던 빌립보 교회에 이렇게 명령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서로 섬기면 분쟁은 사라지고 친밀한 연합이 이루어진다. 아무리 서로 다르더라도.

그리고 결국엔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선포하신 그리스도께서(마 16:18) 자기에게 굴복하여 같은 마음으로 연합을 이루는 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19절). 바울은 지금 교회 중에 파당이 있어야 좋은 거라고 말한 게 아니다. 우리의 완악함 때문에,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주께서 그런 자들을 반드시 징계하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겸손히 섬겨 하나가 되려는 이들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실 것이란 말이다. 구약시대 고라와 다단과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분쟁을 일으켰을 때, 함께 분쟁에 참여한 이스라엘 지휘관이 이백오십 명이었다(민 16장). 하나님은 세 사람의 주동자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한 지휘관 전부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셨다(만 사천칠백 명, 49절).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은 고린도 교회 분쟁을 일으킨 자들에게 질병과 사망의 징계를 내리셨다(30절). 그렇게 복음으로 연합을 이루는 자들을 의를 나타내셨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친히 자기 교회를 거룩하게 하신다. 아들 예수의 겸손과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자들을 반드시 징계하신다. 교회 안에서 파를 나누고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회개해야 한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며, 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자매 되었음을,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바로 주의 만찬이었다. 그것이 만찬이 주는 유익이었다.

2. 문제의 현상: 해로운 주의 만찬(20-22절)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모여서 하는 주의 만찬은 참된 의미에서 ‘주의 만찬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20절, 새번역). 주의 만찬은 초대 교회가 모여서 드린 예배의 중심적 요소였다(행 2:42; 20:7).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기념하던 유월절 식사를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새롭게 제정하셨는데, 형식적으로는 양고기와 나물, 떡과 포도주를 마시는 연회 형식이었다. 오늘날 만찬 예배와 애찬이 조화를 이루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중세 시대 이전에는 교회 소유의 건물이 드물어 부유한 성도의 집에서 모임을 갖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부자의 집엔 손님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트리클리니움)이 있었는데, 많은 성도가 모이면 아마도 정원(아트리움)까지 확장하여 주의 만찬을 먹었을 것이다. 먹을 음식으로 “각각 자기 만찬을” 가져왔는데, 정확히 자기 먹을 것만 챙기기보다는 늦게 오거나 음식을 가져올 수 없는 형편의 성도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여유롭게 챙기는 것이 기대됐을 것이다. 분명 각자가 아닌 함께하는 식사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사회적으로 미천한 자(노예), 경제적으로 빈궁한 자들을 특별히 배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부유한 자들에 비하여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었고(늦음). 매번 음식을 가져올 만큼 상황이 좋지 못했다. 세상은 그들을 차별하고 업신여겼지만,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교회는 먹고 마시는 일에도 세상과 분명 달라야 했다. 말 그대로 애찬이니.

하지만 고린도 교회 중에 있던 분쟁은 주의 만찬도 엉망으로 만들었다. 부유한 성도가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고 이후에 도착한 빈궁한 성도가 먹을 것을 남겨두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굶고 어떤 사람은 과식했다. 어떤 사람은 마실 포도주가 없었고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마셔서 취했다(21절). 바울은 주의 만찬이 이런 식으로 매번 이루어지는 현실에 경악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22절). ‘너희들 교회 밥 먹으러 와?’라고 강하게 책망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고 빈궁한 성도들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꾸짖는다. 주의 만찬을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이들에게 바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아무리 주의 만찬 형식을 갖췄고 떡과 잔을 나눈다 해도 이런 방식으로 하는 것을 도저히 칭찬할 수 없었다: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3. 문제의 해결: 유익한 주의 만찬(23-26절) 

현재 발생한 주의 만찬의 해로움을 제거하고 다시금 주의 만찬의 유익을 누리게 하는 방법은 주님이 의도하신 만찬의 목적과 의미를 되찾는 것이다. 이 편지는 사복음서 전에 쓰인 것으로 바울은 제자들을 통하여 구전으로 전달된 만찬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되새겨주길 원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23절). 주의 만찬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최초로 제정되었다(23절). 주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과 나누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말씀하셨다(24절). 식후에 잔을 나누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라고 명령하셨다(25절; 마 26:26-9; 막 14:22-6; 눅 22:14-20). 이것은 권장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 명령이다.

만찬의 시작부터(축사하시고, 24절) 식후 마지막 잔까지(식후에) 주의 만찬을 먹는 모든 시간에 기념해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이 그 몸과 피로하신 일이었다. 주님은 그이 찢기심으로 우리 각 사람을 구원하여 한 몸이 되게 하셨다(고전 10:17). 주님은 그 를 흘리심으로 우리 각 사람을 구원하여 새 언약의 공동체가 되게 하셨다(눅 22:20). 주의 만찬은 말이 아니라 예식으로 전하는 설교다. 우리는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함께 선포한다. 주님의 일방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하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져다주었고, 주가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연합할 것을 결단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분께 소망을 두며 그리스도가 우리를 차별 없이 희생적으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를 사랑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매주 우리는 이 의미를 되새기는 주의 만찬을 행한다. 주가 오실 때까지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기념하면서.

주의 만찬이 본래 의미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고린도 교회처럼 만찬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면서, 성도에게 모멸감을 주면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기념하는 떡과 잔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고 마실 수 있는가? 그래서 바울은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죄를 짓는 것이며 하나님이 이를 반드시 징계하신다고 경고했다(27, 30절). 폴 가드너는 이렇게 말했다: “이 경고의 취지에 비추어 보면, 현대 교회의 많은 교인이 주의 만찬에 그렇게 무심코 참여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확실히 성찬식을 주재하는 목사는 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 확인되는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평이라는 언약의 복에 기쁨을 표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업신여기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에게 임할 언약의 심판도 함께 경고해야 한다”(“강해로 푸는 고린도전서”, 디모데, 562p).

두 가지 측면에서 스스로 돌아보기 원한다. 첫째,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파당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마음속으로 판단하고 편을 가르고 차별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다면 그 무서운 죄를 즉시 회개하라. 그리스도께서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려 하나가 되게 하신 한 몸을 나누려는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성도와 갈등 가운데 있거나 주의 만찬을 함께 먹는 배우자와 분쟁 중에 있다면 당신이 떡을 떼어 입에 넣고 잔을 들고 마실 때마다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주의 만찬이 당신을 위하여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하기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면서 일백 데나리온 빚진 성도를 기꺼이 용서하기로 회개하며 결단하는 자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둘째, 우리는 주의 만찬에 무심코 참여하고 있지 않은가? 주의 만찬 시간을 생략하고 늦게 교회 오거나, 참여하더라도 아무런 생각 없이 진지한 감사나 기쁨, 감격이 전혀 없이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독교형제단의 만찬 방식만 성경적인 것은 아니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이 주어졌는데도, 형식적이고 수동적인 시간이 되어버린다면, 우리에게도 유익하지 않고 주님도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