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 확고한 믿음의 고백, 침례
본문: 로마서 6장 3~5절 외
설교자: 최종혁
은혜 받기 싫어 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마땅히 받아야할 것보다 적게 받는 것은 참지 못하지만 더 받는 것은 기꺼이 참을 뿐 아니라 좋아한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누구나 은혜 받기를 원하고 그래서 구한다. 그런데 몇가지 역설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원하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로 선택한 수단들에서는 멀어져 있는 경우다.
둘째로 어떤 성도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원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세번째는 하나님이 아닌 은혜만 구하는 경우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끊임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원하며 그렇게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편들에 자신을 계속해서 노출시킨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에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할 뿐 아니라 교회에서 전해지는 말씀에 귀 기울인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우리를 들으시기 때문에 혼자 기도하고 함께 기도한다. 찬양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하게 하며 우리의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찬양한다. 교제는 성도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히 말로서 나누는 것이고 봉사는 행함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여서 즐겁게 교제하고 봉사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은혜를 내려주시는 수단이다. 통로다. 여기로 은혜의 강물이 흘러간다.
이 중 어떤 것은 개인적인 측면이 강하고 어떤 것은 공동체적인 측면이 강하다. 혼자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혼자 교제하거나 섬길 수는 없다. 이런 은혜는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 각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주요 수단이다. 교회가 아니면 절대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교회에서 멀어지면 자연스럽게 은혜에서도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특히 교회의 지체로서만 누릴 수 있는 중요한 은혜의 방편 두 가지가 있다. 바로 교회의 의식인 침례와 만찬이고 이 두 은혜의 방편에 대해 이번 주와 다음 주에 함께 생각해보려고 한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의식은 사실 귀찮은 면이 있다. 그래서 마음만 제대로 있으면 됐지 겉으로 보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형식적’이라는 말이 있는 이유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이는 것에 참 민감한 사람들이다. 보이는 것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받는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는 정말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도 얼굴이 우락부락하면 가까이하기 쉽지 않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아도 멋지고 예쁜 사람이면 사실을 부정하고 믿어주고 싶기까지 하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영이신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보이는 것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의미를 전하시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때로는 어떤 상징 같은 것을 주셨고, 특별히 ‘약속’에 관하여서는 의식이나 절기를 주신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하시면서 그에게 “할례”라는 의식을 행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 후로 할례를 행할 때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그 의미를 설명 했을 것이다. “유월절”도 마찬가지다. 평소와는 다른 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은 유월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스라엘 백성이 드려야하는 여러 제사들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되었고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그 의미를 드러내는데 있어 중요했다. 단순히 의식을 행하는 것이 의미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런 의식을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나님도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고 그들이 그렇게 순종할 때 그들을 만나주시고 은혜를 베푸셨다.
오늘날 그 모든 구약의 의식들은 사라졌다. 그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가르키고 있었고 지금은 이미 그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기에 그 의식들이 가지고 있었던 일차적인 의미가 사라졌다. 대신 예수님은 교회에게 두 개의 의식을 행할 것을 명하셨다. 바로 침례(마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와 만찬(눅 22:10,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이다.
두 의식은 형식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기초하며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만찬은 교회가 한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으로 공동체적인 요소가 강하고 침례는 개인이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으로 개인적인 요소가 좀 더 있다. 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침례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초점을 맞춘다. 만찬이 그리스도 자체를 더 드러낸다면 침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드러낸다. 이런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배타적이지는 않고, 두 의식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구약의 의식들이 아직 오시지 않은 예수님과 이루어지지 않은 그분의 사역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교회의 의식은 오신 예수님과 이미 이루어진 그분의 사역을 바라보며 동시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대하게 한다.
이 시간에 주로 다룰 내용은 어떻게 침례가 은혜의 방편이 되느냐다. 다르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어떻게 침례식을 통하여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각 성도에게 은혜를 베푸시느냐다. 이에 답하기 위해 먼저는 침례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실제로 침례를 행하는 것이 교회와 성도 각자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 보자.
I. 침례 문답
A. 침례는 입교식인가?
침례를 내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하여 교회를 다니기로 결정한 것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입교식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믿다가 이제부터 교회 다닐건데 침례 받으면 되냐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침례에 약간은 이런 의미가 들어 있을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침례는 입교식은 아니다. 지난 주까지 절에 나가다가 가족들이 교회 가자고 하니까 이번 주부터 교회에 나가고 정식으로 나가기 시작하려면 침례 받으면 되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침례는 나의 선택의 표시가 아니라 순종의 표시다. 침례가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가 침례를 통해 믿음의 열매를 보이는 것이다.
B. 침례는 죄를 씻는가?
우리가 물에 대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씻음”일 것이다. 물로 우리는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믿는 자의 침례는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의식이 아니다. 정화의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더러운 것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 즉 죄다. 그 죄는 물로 씻을 수 없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희생 제사를 드렸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침례를 행하면 그때 그때 죄가 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는 물로 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야 한다.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요일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침례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로 믿는 자의 죄가 씻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지 실제로 죄를 씻어주지 못한다.
C. 침례는 죄인을 구원하는가?
침례가 믿음의 고백으로서 구원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은 침례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기초하여 구원을 받는다. 여기에 우리가 무언가를 실제로 행하는 행위가 포함되지 않는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 자신이 그곳에 성도들에게 침례를 베풀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고 말했다(고전 1:14). 만약 침례로 구원을 받는 것이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강도도 침례 받지 못했지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구원은 언제나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 우리는 무엇을 해서 구원 받지 못한다. 침례도 마찬가지다.
D. 그럼 침례는 무엇인가?
침례는 참된 믿음의 눈에 보이는 고백이다. 진정으로 회개한 자들이 교회와 세상에 자신의 믿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기에 믿음의 열매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대명령은 이렇다.
마 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명령을 보면, 가서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제자로 삼고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가서 제자를 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게하는 것이면 충분해 보이고 그것이 자연스러운데 그 중간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 것을 명하셨고 제자들은 사도행전에 보면 이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순종이 그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한다. 그 첫번째 순종으로서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침례를 명하신 것이다. 단순히 믿음에 대한 고백이 필요하다면 간증을 들어봐라라고 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은 침례를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마음의 순종을 통하여 그 진실된 믿음을 보여주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침례는 믿음의 말 없는, 하지만 강력한 선포다.
그래서 우리는 침례를 행한다. 모든 교회는 그 모습은 좀 다를 수 있어도 이런 주님의 분명한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모습(형식)으로 하든 그 모습이 드러내는 의미는 동일해야하고 그래야 침례는 교회 안에서 주님께서 의도하신 역할을 감당하여 은혜의 방편이 된다.
II. 침례 역할
침례 자체에 어떤 마술같은 영적인 힘이 있거나 하지 않다. 의식 자체는 한 사람이 여러 혹은 많은 사람 앞에서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의 명령에 따라 침례를 행한다는 것이 특별하고 그 순종의 행위 가운데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며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 특별하다.
침례가 하는 역할의 핵심은 침례가 드러내는 믿음의 내용에 있고 그래서 그 내용을 우리가 바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침례가 드러내는 믿음의 내용은 한 마디로 복음이다. 침례를 통해 우리는 그 복음을 우리의 믿음으로 고백하며 더욱 큰 확신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침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다.
A. 믿음의 내용
침례가 보여주려는 믿음의 내용은 복음이다. 구체적으로 침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영적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복음을 선포한다.
‘침례’라는 원어 자체의 의미가 ‘담그다, 잠그다’이고 그래서 염색을 하거나 물 등에 무언가를 완전히 담그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믿는 자의 침례도 ‘믿는 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보여주는 의식이다.
롬 6:3, 4, 5 – 합하여 세례를 받음, 연합한 자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혹은 동일시 되는 것을 영적세례라고 한다. 이 영적세례는 믿고 구원받을 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회적인 사건이고 그 결과가 지속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연합이 끊어질 수 없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묻히고 함께 살았다. 침례식이 바로 내가 이것을 믿고 이런 일이 내 안에 일어났습니다라고 선포하는 의식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더 구체적인 복음의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① 죄인임을 선포
먼저 침례 받는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선포한다. 그리스도는 왜 죽으셨을까?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다. –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이유였다. 의인으로서 죄인을 대신하신 것이다. 그 죽으심에 내가 합하려면 그리스도께서 대신 서신 그 죄인의 자리가 바로 내 자리였음을 인정해야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던 이유는 죄인인 내가 죽어야했기 때문이다. 나의 죄에 대한 댓가가 죽음이기 때문이다(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구원 받았다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천국에 갈 수 있게 인도해주시고와 같은 좋은 것들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먼저 이런 죄와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믿는 자는 자신이 바로 그런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자들이며 침례를 통해 그것을 공적으로 선포한다. 믿음을 고백한 자가 물속에 잠길 때 그는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나에게 당연한 것은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②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 되었음을 선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에는 죄 문제에 대한 동의와 동시에 해결 방법에 대한 동의도 포함되어있다. 어쩌면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대부분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동의를 보인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그 해결을 바르게 찾지 못한다.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문제의 해결이 내가 아닌 하나님에게 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어떤 상황이나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다.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 문제는 죄인인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나의 노력으로 나를 구원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도 없다. 영적으로 무능력한 이런 상태를 성경은 “허물과 죄 가운데 죽은”(엡 2:1) 상태라고 말한다. 영적으로 죽었기에 우리는 무엇을 해서 구원을 쟁취할 수 없다. 우리의 가장 선한 행위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순수하지 못하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셔야만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구원 받은 자는 침례를 통하여 바로 그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다. 내가 더 착해서, 내가 더 똑똑해서, 내가 더 부유해서,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있어서, 나의 어떠함이나 내가 더 무언가를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구원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됨을,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은혜 입은 자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침례는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력을 인정하고 만인 앞에서 드러내는 일이다. 사람들 앞에서 물에 젖은 모습을 보이는 것 때문이 아니라, 숨기고 싶은 나의 죄외 무능력을 인정하여 한없이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순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며 오직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③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감을 선포
침례는 물에 들어가 잠기는 것 뿐 아니라 물에서 나오는 모습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전달한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영적 침례를 언급한 근본적인 이유도 사실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었다.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계속 죄 가운데 살 수 있는냐는 질문에 대해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그 이유로서 제시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죄에 대하여서도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을 때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 새로운 삶을 산다(롬 6:4).
이것이 침례가 만찬에 비하여 더욱 강조하는 부분이다. 침례는 우리의 옛 사람이 죽은 것 뿐 아니라 이제는 새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사실이자 다짐이다. 바울은 그래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라고 말하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고 말한다.
이루어진 사실을 사실로서 여기고 그렇게 살라는 말이다. 죄를 좋아하여 그것을 추구하던 옛 사람은 죽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복음의 능력으로 새 생명을 주셨기에 이제 그 생명 가운데 살아갈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 침례다.
그래서 침례를 통하여 우리는 이 말씀들을 말은 하지 않지만 크게 함께 선포한다.
롬 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벧전 2:24-25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것이 침례를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 믿음의 고백이며 세상을 향한 우리 믿음의 선포다. 침례를 받는 사람 뿐 아니라 침례를 행하는 교회도 모두 한 마음으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B. 믿음의 확신
우리가 이렇게 복음과 믿음을 선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확신이라는 은혜를 더욱 내려 주신다. 침례 받는 당사자 뿐 아니라 함께 하는 교회에게 그렇게 하신다.
침례를 받는 사람은 매우 기억에 남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물 자체야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지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혼자 물 속에 다른 사람에 의해 들어갔다가 나오는 경험은 자주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다. 분명 평생을 기억할 수 있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사실 구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침례도 그렇게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려는 장치다. 침례를 통해 복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침례자에게 침례는 공적인 증언으로서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 마 18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고 예수님은 그 고백을 교회의 기초에 두고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대로 성령님께서 오셨고 이 땅에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렇게 주님의 일을 하는 교회에게 예수님은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로서 주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한다.
그래서 교회가 한 개인에게 침례를 행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고백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그를 한 가족의 일원으로 한 몸의 지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회의 증언은 물론 절대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 땅에서 가장 객관적이고 공적인 증언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교회가 신중하게 분별하고 믿음 가운데 침례를 행할 때, 침례를 받는 사람은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물론 침례 자체를 확신의 기초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 침례는 우리를 구원하지도 않고 없는 믿음을 만들어 내지도 않는다. 다만 침례를 받는 사람과 침례를 행하는 교회가 올바른 믿음 가운데 신중하게 침례를 행했을 때, 그것은 가장 객관적이고 공적인 증언으로서 하나님께서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도구로서 사용하신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침례를 행하는 교회는 어떨까? 침례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없을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침례가 우리로 하여금 다시 복음을 주목하게 하고 기억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고 우리를 구원한 그 영광스러운 복음을 다시 한번 생생하게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침례다.
복음은 우리가 구원 받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날마다 필요하고 매순간 필요하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금 살아가게 한다.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한다. 복음을 잊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복음 없는 세상 사람들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게 된다. 아얘 거룩한 삶과는 관계 없이 살려고 하거나 혹은 율법적으로만 이것저것 뭔가를 해서 거룩해질 수 있을 것처럼 사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다. 법 없는 자처럼 살아서도 안되고 법으로만 살아서도 안된다. 은혜의 법 아래 있는 자로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와 합하는 영적 세례를 언급하면서 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살아야 하는지를 말한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자신을 여기고 의의 무기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바로 이 진리를 우리 눈 앞으로 가져다 주는 것인 침례다. 이 은혜를 다시 기억하게 해주는 것이 침례다. 이 능력을 다시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침례다.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경험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가 침례다. 그렇게 우리 믿음에 대한 확신이 더 자라고 그 확신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침례다.
침례식에 참여한다고 자동적으로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로서 침례를 통해 그것이 보여주는 믿음의 내용, 복음에 집중할 때 하나님은 이런 은혜를 주신다. 이것이 우리가 침례를 통해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다.
도전
사람은 반복하는 것에 무뎌지기 마련이다. 교회에서 침례식을 하면 그냥 하나보다 한다. 그냥 또 때가 됐나보다 한다. 물에 젖은 사람의 머리가 눈에 들어오고 차가운 물이 신경 쓰인다. 뜨거운 태양이 신경 쓰인다. 그냥 습관처럼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라고 노래한다.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행해지는 침례는 침례식을 행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침례는 우리 확고한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을 통하여 구원 받았음을 다시 기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 고백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다짐하는 결단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시 한번 나를 강권하고 그 은혜 아래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삶이 되기를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정말로 이 세상 가운데 복음을 외치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혹 지금 그 복음에서 멀어져 있다면 교회의 믿음의 고백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 주님의 명령에 따라 계속해서 침례를 행할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침례가 우리 확고한 믿음의 고백이 되어 더욱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함께 또 다른 침례식을 행하는 그 때, 우리 모두가 그런 은헤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