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 영원히 함께 할 노래, 찬양
본문: 골로새서 3장16절 외
설교자: 최종혁
지난 두 시간에 걸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리시는 수단인 말씀과 기도에 대해서 배웠다. 아마 성도들 중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고 은혜를 누리는데 있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어렵다는 생각은 있을 것이고 그래서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설교자들이 많이 했다.
그에 비해 찬양은 어떤가? 노래를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 찬양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성경에는 노래하라는 명령이 많이 있지만 그것을 짐으로 느끼는 경우도 없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찬양을 해야 한다는 명령이나 당위성을 강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단순히 노래가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편으로서 찬양이 중요함을 알고 그래서 더 찬양을 좋아하게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노래가 좋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하나님이 좋아서 찬양을 좋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실 찬양을 은혜의 방편이라고 지칭하는 데 있어 근본적인 의문이 생기도 한다. “찬양의 대상은 하나님이신데 왜 우리가 찬양을 통해 은혜를 누려?” 어느정도 맞는 말이고 당연히 필요한 질문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다른 모든 은혜의 방편도 동일하다. 설교 시간은 어떤가? 그 시간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듣는다. 아멘으로 화답한다. 누가 영광을 받는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런 면에서 설교 시간도 예배 시간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풀고 계시고 우리는 그것을 누린다. 기도는 어떤가? 기도도 궁극적으로 우리 중심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구할 뿐이다. 그래서 기도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런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찬양도 그렇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드러내고 높이는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은혜를 주신다. 아마 찬양은 우리가 좀 더 직접적인 예배의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우리가 무언가 유익을 얻는다고 말하면 어색함을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이 아니라면 우리가 찬양을 통해 유익을 누린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최우선에 두고 일하시지만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최선을 추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말 안에 ‘나야 뭐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말이지’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최선이고 최고의 길이다. 그 안에 우리의 참된 행복과 만족이 있다. 찬양도 마찬가지다. 찬양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은혜가 부어지는 수단이 된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은 찬양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 이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기에 앞서 ‘노래’의 특징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찬양이 노래를 통해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노래의 특징
일단 노래는 서두에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굉장히 보편적이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문화권을 가도 노래가 없는 곳은 없다. 지금은 더욱이 이런 노래를 즐기기 좋은 시대가 되었다. 예전에는 수준 높은 노래를 듣는 것은 가진 자들의 특권이었고 서민들은 가끔 경험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만 생각해보면 월 1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얼마든 좋은 노래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어디서든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현재 그렇게 하고 있다. 거리에 나가면 특히 젊은 사람들은 다들 귀에 뭐 하나씩 꽂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 노래를 듣는다.
그만큼 사람들은 노래를 좋아한다. 듣는 것도 좋아하고 부르는 것도 좋아한다. 공통적으로 그렇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음악을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음악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중독성이 있지만 그 자체로서 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좀 더 좋은 표현으로 바꾸면 음악은 우리에게 선물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야고보서 1장 17절의 말씀에 따르면 그런 좋은 선물은 모두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즉, 노래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일반 은혜의 하나다. 누구든 노래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고 그래서 사람들은 노래를 보편적으로 좋아한다.
그럼 노래는 도덕적으로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니 무조건 좋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중 어떤 것들은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도덕적으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노래도 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선을 위한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악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노래 자체는 도구일 뿐이고 우리는 이 도구를 잘 사용하기 위해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세가지 정도 노래의 특징을 잘 알아야 한다.
A. 노래는 음악과 가사로 구성된다.
B. 노래는 이성적이기보다 감성적이다.
C. 노래는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집단적이기도 하다.
노래는 가사와 음악이라는 내용과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우리의 감성을 표현하기도 하고 더 자극하기도 한다. 또한 노래는 한 집단의 하나됨을 보여주는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찬양의 특징
그렇다면 찬양은 일반적인 노래와 비교하여 어떤 특징이 있을까?
A. 부르는 사람 – 하나님의 백성
먼저 찬양은 하나님의 백성 즉, 구원 받은 자들의 특권이다. 성경, 특히 시편을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을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모든 피조물의 마땅한 의무이기에 당연한 명령이다. 시편의 마지막인 150편 6절은 이렇게 말한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찬양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만이 드릴 수 있다. 찬송가를 구원받지 않은 가수가 부른다면 그것은 뛰어난 노래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찬양이라고 할 수 없다.
B. 부르는 내용 – 하나님의 말씀
이 내용이 세상의 노래들과 찬양을 근본적으로 구분짓는다. 찬양이 찬양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노래하는 그 내용에 있다. 찬양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 꼭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의미다.
어떤 찬양은 말씀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시편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찬양들은 그런 찬양이 많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305장)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는 가사는 에베소서 2장 1-10절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고 우리가 그 은혜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이 찬양은 그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304장)에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성경에 이런 표현이 있지는 않다. 요한복음 끝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그 일이 많아서 다 기록하면 세상에라도 그 책을 둘 수 없다는 표현이 나오기는 하지만 동일한 맥락은 아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분명한 성경의 메시지를 전한다.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눈물 많은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나라에서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계 21:4). 하지만 그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기쁨과 감격이 가득한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찬양에는 성경 말씀이 그대로 들어 있을 수도 있지만 설교처럼 말씀에 대한 해석이나 교훈이 들어 있기도 하다. 쉽게 말해 찬양의 내용은 성경의 메시지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존재와 속성, 하나님의 뜻, 사랑과 은혜, 구원, 성도의 마땅한 삶, 영원한 나라 등 성경이 말하는 메시지가 찬양의 내용이고 그런 면에서 다른 노래와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C. 부르는 목적 – 하나님의 영광
노래에는 여러 목적이 있을 수 있지만, 찬양에는 분명한 한가지 목적이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찬양의 목적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마침내 구속받은 자들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에베소서 1장에서는 성부께서 교회를 창세 전에 택하시고 성자께서 그의 피로 죄 사함을 얻게 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목적을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찬송이 꼭 노래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찬양이 포함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찬양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드러내고 높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찬양은 그 특징에 따라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 혹은 그런 행위.
그럼 이제 노래인 찬양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편이 되는지에 대해 답할 준비가 되었다.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찬양
A. 찬양은 우리가 말씀에 화답하게 돕는다
찬양이 노래로서 가지는 특징은 가사와 음악이 있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찬양의 내용, 즉 바로 앞서 말한 성경의 메시지를 찬양이 담고 있다는 것이 찬양이 은혜의 방편이 되는데 있어 가장 핵심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가장 핵심적인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남행열차를 아무리 마음을 다해 불러도 그것이 은혜의 방편이 되지는 않는다. 아리랑이나 애국가도 마찬가지다. ‘찬양’이라고 불리지만 성경적이지 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노래도 마찬가지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분변하여 성도들에게 선포될 때 은혜의 방편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찬양은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만큼 은혜의 방편으로서 의미가 있다.
설교는 말씀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깨닫게 하여 그 말씀에 화답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찬양도 마찬가지로 말씀에 화답하게 하는데 그 방식은 설교와 다르다. 때론 찬양을 하다가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찬양은 그 깨달은 의미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게 한다.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 때, 그에 합당한 반응이 그 말씀으로 가르치고 서로 권면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이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처럼 말씀을 담고 있는 찬양도 그렇다. 찬양은 두 가지 면에서 말씀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말씀에 화답하게 하는 은혜의 방편이 된다.
찬양을 통해 말씀을 확신하고 선포한다.
우리가 함께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이라고 찬양할 때 우리는 단순히 어떤 단어를 앵무새나 기계처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임을 알고 그에 대한 확신 가운데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을 높일 뿐 아니라 세상 중에 그런 하나님을 선포한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 없네”라고 찬양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그런 분이심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 다윗을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보호하신 하나님 등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떠오를 것이다. 다 아는 얘기일 수 있지만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더욱 하나님이 그러하시다고 확신하게 된다. 나만의 고백이 아니라 함께 찬양하는 모든 사람의 하나된 고백이기에 그 확인이 더욱 커지는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이 한 목소리로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은 강력한 선포가 된다.
때로는 말씀의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찬양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때로는 연약한 성도에게 힘을 주기도 하고 넘어진 성도를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성령께서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로 성도들이 드리는 찬양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찬양을 통해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한다.
음악의 강력한 기능 중 하나는 가사를 기억하기 쉽게 해준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암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많은 시간이 지났어도 노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말은 같은 것을 계속 들으면 짜증나고 지겹지만 좋은 노래는 일부러 계속해서 더 찾아듣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 내용을 이해할 뿐 아니라 단어 하나 글자 하나까지 외우게 된다. 많은 문화권이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거나 어떤 가르침을 주기 위해 노래를 사용하는 것도 노래는 무언가를 반복하면서 기억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찬양은 말씀을 기억하고 반복해서 묵상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설교의 대부분의 내용이나 어떤 문구 하나를 다음 주까지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설교의 끝에 부를 찬양은 모두가 기억할 것이고 그 찬양이 이 설교의 내용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도록 모세에게 노래를 만들어 가르치라고 하셨다(신 31:21). 그 노래의 멜로디를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대중이 함께 부르기 쉬운 멜로디였을 것이다. 모든 노래가 기억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 기억하고 싶은 멜로디가 있다. 그런 찬양들이 건전한 성경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우리는 그런 찬양을 통해 많은 은혜를 누릴 것이다. 왜냐면 그런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우리 앞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찬양을 통해 말씀에 더욱 확신을 가지고 되고 말씀을 기억하게 되니 결과적으로 그 말씀을 실천하고 삶에 적용하는데 찬양은 큰 역할을 한다. 찬양할 때 뿐아니라 삶에서도 말씀에 계속해서 화답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B. 찬양은 우리가 말씀에 공감하게 돕는다
특별히 찬양은 노래로서 여러 감정을 자아내거나 표현한다. 시편을 읽어 보면 시인들이 다양한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쁨, 괴로움, 절망, 소망, 감사, 불평, 확신, 두려움 등 많은 감정들이 그 안에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감정 없는 로봇이 아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저 로봇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그런 면에서 찬양은 우리가 성경의 메시지를 감정적으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런 감정을 표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기쁨을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통하여 표현할 수 있다. 그 감사의 마음을 “사랑이 예 오셨네”를 통하여 이해하고 표현한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라고 말을 듣는 것과 그것을 노래하는 것은 다르다. 노래를 하면 천천히 가사를 곱씹으며 그 안에 있는 생각 뿐 아니라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다. 특히 멜로디와 가사가 잘 어울리면 더욱 그렇다. 찬양이 우리가 말씀에 공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그런 감정은 진리 위에 있는 감정이어야 의미가 있다. 전능하시며 자존하시는 주권자 하나님을 마치 우리가 없으면 뭔가 부족한 것처럼 묘사하는 소설 같은 설교를 듣고 그런 노래를 부르며 감동하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그것으로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은혜는 아니다.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거짓을 통해 은혜를 주시지 않으신다.
감정에 대해서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감정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일부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하는 것이 합당한 것처럼 우리의 감정도 그렇게 되는 것이 합당하다. 문제는 감정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데 있다. 즉 찬양을 했는데 눈물도 안나고 별로 기쁘지도 않더라라고 하며 찬양이 은혜롭지 못했다고 쉽게 말하는 것은 문제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찬양 하는 가운데 눈물을 흘리거나 기뻐하거나 감사하거나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찬양이 담고 있는 메시지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다.
C. 찬양은 우리가 말씀으로 하나되게 돕는다
찬양을 통해 우리는 하나된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그런 하나됨을 찬양을 통해 더욱 견고하게 쌓아가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앞서 살펴 봤던 골로새서 3장 16절 말씀의 문맥은 이런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만유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옛 사람의 행위를 벗고 새 사람의 행위를 입어야 한다(1-11절). 12절부터는 교회로서 필요한 새 사람의 행위가 언급되어 있는데, 한 마디로 “하나됨”이다. 관계의 문제가 있을 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으로 서로 용납하고 용서해야 한다.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여 온전하게 매야한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하여서 한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지켜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16절의 말씀이 주어졌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말씀을 통해서 온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 때 교회는 정말 한 새 사람으로서 세상 가운데 선포될 것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으로 권면하고 찬양한다. 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한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서로 세워주고 한 아버지의 자녀로서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찬양은 우리의 하나됨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고 우리를 더욱 하나되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특히 노래에는 이런 힘이 있다. 함께 노래할 때 우리는 이런 힘을 느낀다. 단기 선교를 가거나 하면 잘 모르는 그곳의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때가 있다. 언어도 달라서 잘 소통도 되지 않아 말씀을 듣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함께 찬양하는 것은 가능하다. 심지어 서로의 언어로 찬양을 해도 같은 멜로디로 찬양하면 한 마음으로 찬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군인들에게는 군가라는 것이 있다. 평소에 밥 먹으러 갈 때도 군가를 부르곤 하는데 그럴 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 하지만 40km 혹은 그 이상의 행군을 하며 ‘전우’들과 함께 부르는 군가는 느낌이 다르다. 함께 악을 쓰며 부르는 군가는 듣기에 좋지 않지만 힘이 난다. 누구 하나 낙오되지 않고 함께 이 일을 마치고 싶은 마음이 솟아 오른다. 그래서 나도 힘들면서 옆 사람의 짐을 들어준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힘내라고 격려하고 등을 밀어준다.
우리가 함께 하는 찬양도 이런 역할을 한다. 우리의 찬양은 하늘로 올라가기도 하지만 우리가 있는 이 곳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성도가 한 마음으로 한 목소리로 찬양할 때 우리는 하나됨을 나타내기도 하고 더욱 하나되고자 하는 결심을 하기도 한다.
시편을 보면 이런 요소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함께 시편으로 찬양할 때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찬양하기도 했다.
시 118:1-4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3]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4]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면서 이 찬양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함께 그렇게 할 것을 격려하며 시작한다. 같은 하나님을 경험한 자들로서 하나되어서 그렇게 찬양할 것을 격려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기 원한다. 특히 그런 경험을 함께 한 사람들은 함께 한 경험 속에서 가졌던 생각들, 감정들을 공유하며 더욱 그 경험을 풍성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정상이다. 그렇게 하나됨을 선포하고 더욱 하나되는 것이다.
물론 노래 자체가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되어 함께 찬양할 때 우리는 그렇게 하나됨을 선포할 뿐 아니라 그 하나됨을 더욱 느낄 수 있다.
정리 : 찬양은 어떻게 은혜의 방편이 되는가? 먼저 찬양은 가사와 곡을 통해 말씀을 화답하도록 돕는다. 또한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말씀으로 하나되게 돕는다.
찬양을 더 잘 할 수 있는 방법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찬양을 누리라. 그렇게 하기 위해…
A.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라
찬양은 그 가사가 말씀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담고 있는만큼 은혜의 방편으로서 의미가 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찬양을 듣든지 부르든지 혹은 함께 부르든지 가사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혹 성경적으로 합당하지 않은 내용이 있다면 가사를 수정하거나 빼는 것도 필요하다. 전반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멜로디가 좋더라도 부르지 않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또 하나, 가사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 가사가 어떤 성경 말씀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고 찾아서 읽어 보라. 그것이 찬양을 통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 안에 풍성하게 거하게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B.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라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감정을 우상화 할 필요도 없고 부정적으로 볼 필요도 없다. 감정은 상황에 대한 개개인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느끼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말고 또한 판단하지도 말아야 한다. 하지만 함께 찬양할 때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찬양을 함께 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C. 연합에 주의를 기울이라
우리가 함께 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경기장에서 함께 한 팀을 응원해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렇게 한 마음으로 소리를 내고 노래를 하는 것은 하나됨을 선포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찬양으로 우리는 서로에게도 말한다. 찬양 시간은 누가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느냐 대결하는 시간이 아니다. 누가 노래를 더 잘 부르고 높은 음을 낼 수 있고 화음을 넣을 수 있느냐를 뽐내는 시간도 아니다. 찬양을 하며 다른 성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라. 때로는 내 노래를 멈추고 성도들의 하나된 목소리를 들어보라. 그럴 때 오히려 더 진심으로 찬양할 수 있을 때도 있다.
어쩌면 교회에서 찬양하는 것이 예배군 훈련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만큼이나 어색한 분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되어 함께 찬양하도록 명령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은 별로 찬양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자녀를 잃은 부모라면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에 “내 영혼 평안해”를 함께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성도를 세워주는 말씀의 능력이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 함께 찬양하고 있는 성도 중 누군가와 하나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찬양이 우리의 하나됨을 나타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찬양이 끝나자마자 그 성도와 화해하겠다는 결심을 해야할 것이다.
신기하게도 연합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찬양이 분열의 아픔을 가져오기도 한다. 특히 음악적 취향이 그런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다. 고작 나의 음악적 취향으로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희생하셔서 하나되게 하신 교회에 분열을 가져오지 말자.
도전
노래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이 분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서도 노래를 하게 될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모든 노래는 찬양이 될 것이다.
어떤 분은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부르는 모든 찬양은 영원한 나라에서 부를 찬양을 준비하는 리허설과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지금 부르는 이 찬양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온전한 예배가 되기 때문에 단순히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산다. 사실 우리는 이미 영원을 살고 있다. 우리가 지금 함께 하는 이 찬양은 우리가 영원히 함께 할 노래이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노래다. 구속 받은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우리들의 노래다.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양이다. 영원한 나라에서 새 노래로 모든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찬양할 그 때까지 오늘 이 땅에서 우리가 그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을 통해 누리며 하나님께 더욱 영광 돌릴 수 있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