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에게 필요한 것, 믿음
본문: 창세기 47장 28절~49장
설교자: 이병권
오늘은 지난 시간에 살짝 언급만 했던 47장 마지막 부분부터 48장과 49장까지 야곱의 마지막 행적을 한꺼번에 살펴보려고 합니다.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고 생각할 수 있는 교훈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에 있어서 죽음을 앞둔 야곱의 세 번의 만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47장에 나오는 첫 번째 만남은 요셉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48장에 나오는 두 번째 만남은 요셉의 두 아들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49장에 나오는 세 번째 만남은 열 두 아들과의 만남입니다. 이렇게 야곱은 요셉을 부르고, 그러고 나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부르고, 마지막으로 열두 아들을 부릅니다. 그런 후에는 하나님이 야곱을 부르십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게 됩니다.
그럼 각각의 만남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만남부터 보면 47장 28절에 그 배경이 나옵니다.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47:28)
야곱이 애굽 땅에서 지낸 시간이 어느덧 17년이 지났습니다. 야곱의 나이 147세가 되었습니다. 요셉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 요셉의 나이가 17세였습니다. 야곱은 애굽으로 오기 전에 요셉과 함께 17년을 지냈고, 애굽으로 오고 나서 요셉과 함께 17년을 지냅니다.
야곱은 죽을 날이 가까워진 것을 알고 요셉을 부릅니다.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47:29) 지금 야곱이 하고 있는 일은 이전에 아브라함이 했던 일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종에게 했던 것처럼, 야곱은 요셉에게 엄숙한 맹세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엄숙한 맹세를 통해 자신을 여기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있는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장사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애굽은 임시 처소였습니다. 그가 잠들기 원했던 땅은, 그가 바라봤던 땅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야곱은 임시로 거하는 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바라봐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믿음이 그러합니다. 믿음은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참된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보이지는 않는 것을 향해 시선을 고정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을 바라보지 않고, 여기에 소망을 두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보게 하고, 그곳에 마음을 두게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요즘에는 캠핑을 좋아하고 즐겨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캠핑을 왜 하는 걸까요? 생각해보면, 편하고 좋은 집을 나두고 괜히 사서 고생하는 일입니다. 불편하게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자처하면서 즐거워할까요? 집에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이것을 좀 다르게 생각하면, 집이 있기 때문에 캠핑이 즐거운 것입니다. 집이 없다면, 편하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없다면 어떨까요? 365일을 캠핑하며 지내야 한다면 어떨까요? 즐거울까요?
이 땅에서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우리에게는 진짜 집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그곳에 우리 주님이 계시고, 그곳에서 우리가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는 우리가 임시로 머무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즐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가 아닌 정말 좋은 곳, 이곳과는 차원이 다른 곳, 참된 만족이 있는 곳, 우리에게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사는 동안 불편함이 있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즐거울 수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여기에 잠깐 있다가 갑니다. 그러니 여기가 전부인 것처럼 너무 이곳에 매달리며 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곱은 애굽이 잠시 머무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약속의 땅을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명세했을 때 야곱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침상 머리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이렇게 야곱과 요셉과의 만남은 끝이 나고 두 번째 야곱의 만남이 48장에 이어집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요셉은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야곱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병상에 있던 야곱은 힘을 내어 요셉과 그의 아들들을 맞이합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말합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48:3-4) 야곱이 여기서 말하는 가나안 땅 루스는 벧엘의 옛 이름입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신 것을 요셉과 그의 아들들에게 다시 들려줍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지요? 아버지가 자녀와 손자에게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말씀, 약속의 말씀을 전해주는 겁니다.
여러분은 훗날 나의 인생을 돌아보며 정리할 때 자녀들이나 손주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기 원하십니까? 우리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내가 믿고 의지하는 주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그분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지, 얼마나 신실하신 분이신지, 이야기 할 것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약속의 말씀을 전한 야곱은 이어서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48:5) 야곱이 하는 말이 갑자기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손자를 자기 아들로, 양자로 들이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손자는 앞으로 할아버지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할아버지로 불러야 할까요? 아버지로 불러야 할까요? 그러면 자기 아버지를 형님이라고 불러야 될까요? 이 무슨 일입니까? 야곱은 요셉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그냥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병이 깊어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서 하는 말일까요?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양자로 들이는 것은 그들에 대한 양육권을 자기가 갖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하는 말은 손자에게 아들로서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손자이지만, 야곱의 다른 아들들과 동일하게 아들로서 가지는 상속권이 허락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아들의 위치에 두면서 자연스럽게 장자가 가질 수 있는 두 배의 상속권을 요셉에게 준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가나안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그들의 이름으로 땅을 분배받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10) 옛적에 이삭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야곱도 동일한 상황입니다.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하는 상태로 자녀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야곱은 이삭과는 달리 영적인 눈은 밝았습니다.
야곱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왼쪽에 있는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므낫세에게 왼손을 향합니다. 므낫세가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왼손을 그의 머리에, 그리고 오른손을 에브라임 머리에 얹고 그들을 축복합니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48:15-16)
야곱은 세 번에 걸쳐서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그 세 번의 표현을 살펴보면 첫째로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우상을 섬기며 살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셔서 그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뿐만 아니라 이삭의 삶을 인도하시고 그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 그들이 신뢰하며 섬겼던 그 하나님을 야곱도 평생에 걸쳐 섬겼던 것입니다. 야곱은 그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여기서 자신을 기르신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이 목자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자신을 돌보시고 먹이신 하나님, 평생 목자로 살았던 야곱이 ‘참 목자’이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그러한 복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셋째로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
갑자기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 왜 천사가 나오는 거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야곱이 말하는 핵심은 천사, 그 자체가 아니라 천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위기에 처한 그의 백성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를 구하기 위해 천사를 보내시고 그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표현들은 야곱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험악한 인생의 여정동안, 오랜 시간에 걸쳐 하나님을 경험하며 다듬어진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야곱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것을 보던 요셉은 장자인 므낫세를 두고 에브라임을 먼저 축복하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교차되어있는 아버지의 손을 제자리에 두려고 합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말합니다.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48:18)
이 장면은 야곱의 과거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삭이 장자인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을 때 야곱은 속임수를 사용해서 형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속임수가 없습니다. 야곱은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48:19)
야곱은 평생을 통해 이것을 배웠습니다. 자신은 축복을 받기 위해 자기의 눈먼 아버지를 속였지만, 이제 축복을 전해주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형보다 동생을 큰 자로 축복합니다. 다시 한 번 축복이 동생에게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개적으로 이 일이 이루어졌고 가족 간에 벌어지는 가슴 아픈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과거의 일이 생각나서 마음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내 생각이 조금 더 자랐을 때, 이전에 내가 했던 일을 떠올리며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아!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아마 야곱에게는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챈 일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 하나님을 신뢰했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우리도 그런 후회와 자책으로 마음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거를 묵상하며 괴로워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죄책감을 떨쳐버리고, 가슴 아픈 경험으로 배운 교훈을 마음에 새기는 일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를 교훈삼아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삶의 순간마다 이전과 다른 결과를 낳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참 감사한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 잘못이나 실수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마지막, 세 번째 만남은 49장입니다. 야곱이 모든 아들을 부릅니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49:1) 야곱은 자기 아들들을 불러 후일에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말합니다.
여기 나오는 “후일에”라는 표현은 미래의 정해지지 않은 시간을 말합니다. 이 말은 가까운 미래를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지만 먼 미래를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49장에 나오는 야곱의 예언은 이해하기에 어렵습니다. 그 예언이 성취되는 시기가 다양하게 나타나며, 비유적인 표현이 많고, 또 대부분 역사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이 야곱의 예언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짧은 예언이 있고 긴 예언이 있습니다. 아들에 대한 간략한 특징을 말하는 짧은 예언이 있고, 그 아들의 능력과 영향력을 언급하는 긴 예언이 있습니다. 긴 예언은 르우벤, 시므온과 레위, 유다 그리고 요셉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럼 먼저 르우벤입니다. 르우벤은 장자로서 두 배의 상속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끓는 물과 같이 통제되지 않는 충동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르우벤이 자기 침상을 더럽혔다며 그를 책망합니다. 르우벤은 이 죄로 인해 장자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역대상 5장 1절에 보면 르우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됩니다.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대상5:1)
다음으로 시므온과 레위가 같이 언급이 됩니다. 그들은 무법을 행했고 잔인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공의롭지 못한 일을 행했기에 그에 대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들은 그 행한 일에 따라 가나안 땅에서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유다에 대한 것인데, 야곱은 유다가 자기 형제들을 통치하고 그들에게 칭찬받을 것을 예언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통치가 유다를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예언하는데, 왕을 상징하는 규와 통치자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야곱이 하는 예언들 간단히 정리하면, 야곱의 아들들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결과로 이스라엘 각 지파의 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49:28)
야곱이 말한 일부 예언은 저주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서 비롯된 축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야곱이 아들들에게 예언한 것은 상당 부분이 그들의 인격과 삶의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심은 대로 거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행한 일은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남기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긍정적인 영향을, 어떤 이들은 부정적인 영향을 남긴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들을 축복한 야곱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험악한 인생을 살았던 야곱은 이렇게 나그네의 삶을 마칩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입니다. 야곱의 생애에서 그의 믿음이 가장 잘 드러났을 때는 언제일까요? 어떤 사건들이 생각나십니까? 그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간절히 축복을 구했을 때일까요? 아니면 벧엘로 돌아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을 때일까요? 아브라함과 비교하면 아브라함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건이 있는데, 야곱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건이 잘 생각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야곱의 생애 가운데 오늘 본문,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장면을 선택합니다. 히브리서 11:21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11:21)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의 사건들을 연달아 기록하면서 야곱에 대해서는 이 사건을 선택하여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형이 아닌 동생을 더 큰 자로 축복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상식과 관습에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야곱을 바로 잡으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이렇게 한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상식이나 관습과는 다른 하나님의 뜻을 만나기도 하고, 나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뜻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렇게 교차되어 있는, 엇갈린 축복의 손을 만납니다. 내가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됩니다. 내가 계획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 삶이 흘러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자주 우리가 생각하는 순서를 바꾸시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는 것들을 앞에 두시고, 우리가 많은 애정을 쏟는 것들을 뒤에 두십니다. 우리가 애지중지 하는 것들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시는지 모릅니다.
어떨 때는 우리가 열정으로 추구했던 일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반면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을 통해 풍성한 은혜를 얻게 하십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간절함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맡기지만, 하나님의 오른손은 다른 곳을 향할 때도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요셉처럼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장자가 누구인지,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마음에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좋아하는 것, 간절히 바라는 것, 그분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몰라서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거나, 몰라서 다른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몰라서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뜻을 만나더라도 믿음으로 그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거절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신 계획과 그 뜻에 따라 주권적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이 변하지 않는 진리를 붙들고 어떤 일을 만나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믿음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