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요셉, 그의 나이 열일곱
본문: 창세기 37장 1~11절
설교자: 이병권
오늘 본문은 야곱으로 시작하지만, 그 초점은 요셉에게 있습니다. 37장부터 창세기의 주인공이 야곱에서 요셉으로 바뀌고 있는데,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기록과는 다른 차이점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살펴볼 요셉 이야기는 다른 족장들의 이야기와 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이 다른지 먼저 살펴보고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첫째, 요셉 이야기는 내용이 더 깁니다. 분량이 많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요셉의 삶이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요셉 이야기는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요셉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요셉 이야기가 문학적인 내용으로만 봐도 그만큼 작품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에서 뛰어난 인물 묘사가 이루어지고, 인물간의 심리와 갈등이 긴장감 있게 전개되며, 위기와 그 위기를 이겨내는 감동이 모두 담겨있는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요셉 이야기는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셉 이야기에는 기적이나 종교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요셉에게 직접 말씀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요셉은 다른 족장들처럼 제단을 쌓는 일도 하지 않습니다. 어느 특별한 장소를 언급하거나, 하나님과 연결 짓는 일도 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직접 그의 삶에 개입하시지 않습니다.
넷째, 그렇지만 요셉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보다 신앙적입니다. 요셉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누구보다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찾으러 나서다가 방황하고 있을 때 형들이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을 만납니다. 구덩이에 갇혀 있을 때 마침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이 그곳을 지나갑니다. 요셉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요셉은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그래서 훗날 요셉은 형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8) 요셉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요셉의 삶에 역사하셨고 간섭하셨던 것입니다.
다섯째, 다섯째는 아껴두었다가 말씀 중간에 추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 극적인 인생으로 묘사할 수 있는 요셉 이야기, 요셉의 인생은 그가 입었던 옷으로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아들로 지냈던 요셉은 ‘채색옷’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형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갑니다. 그래서 요셉은 ‘노예의 옷’을 입게 됩니다. 보디발의 집에 팔린 요셉은 그곳에서 열심히 집안일을 했고,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의 옷’을 입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억울하게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갇히고 ‘죄수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마침내 ‘총리의 옷’을 입게 됩니다.
‘총리의 옷’을 입은 요셉은 야곱의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하는 일을 이루어 냅니다. 우리는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야곱의 가족들이 어떻게 애굽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살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15:13)
이 예언의 말씀이 이렇게 성취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하나하나 성취되어 가는지 살펴보는 것은 성경을 읽어가는 커다란 재미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단서입니다. 마치 작은 증거들을 모아서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확인하는 것, 말씀의 성취가 어떤 방법으로 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재미와 감동을 줍니다.
다만, 그것이 모두 이루어진 후에 멀리서 지켜보는 우리는 감동이지만, 그 당시 모든 과정을 실제로 겪으며 모든 어려움을 인내해야 했던 요셉에게는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받은 아들에서 혼자 노예로 팔려가는 어려움, 억울함과 외면, 고독과 외로움, 그 모든 고난을 참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 이야기가 주는 감동과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형들에게 미운 오리로 취급받는 요셉이 어떻게 백조가 되었는지, 요셉 이야기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데 지금 요셉의 나이는 열일곱 살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요셉, 그의 나이 열일곱”이라고 붙여봤습니다. 제목에서 제가 전하려고 하는 것은 열일곱이라는 나이에서 느껴지는 요셉의 미숙함과 순수함입니다.
요셉이 태어난 때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커왔는지, 다른 기록은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형들이 요셉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이유는 2절에 보면,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2) 2절에 나오는 것처럼 요셉은 형들과 함께 양들을 돌볼 때에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쳤습니다.
어떤 의도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요셉이 형들을 미워해서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셉에 대한 이미지는 그냥 순수하고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청년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형들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지, 그리고 그 결과가 자신에게 어떻게 돌아올지 잘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셉의 이런 모습은 형들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할 때에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형들이 요셉을 좋아하지 않았던 또 한 가지 이유는 요셉이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인 야곱에게 있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3) 3절에 보면 야곱은 여러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합니다. 노년에 얻은 아들이라서 더 사랑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랑했던 라헬이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더 사랑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이미 에서를 만나기 전에 위험을 앞두고 있을 때 가족을 배치하는 장면에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라헬과 요셉을 제일 뒤쪽에 두었던 모습에서 야곱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야곱이 가지고 있던 편애는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삭의 가정에서, 이삭이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가 야곱을 사랑했던 것을 보면서, 편애가 이삭의 가정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신이 그런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이런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더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합니까? 채색옷을 지어서 요셉에게 줍니다. 채색옷이 정확히 어떤 옷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정말 알록달록한 색깔의 옷이었는지, 아니면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입는 옷처럼 길게 늘어진 옷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번역할 때 다양한 표현으로 번역이 됩니다. ‘장신구를 단 옷’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화려한 옷’이나 ‘화려하게 장식한 긴 옷’, 또는 ‘귀한 옷’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입는 옷이 아닌 아주 귀하게 만든 특별한 옷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이 귀한 옷을 요셉에게만 줬습니다.
집에 여러 자녀들이 있는데, 아주 특별한 선물을 한 사람에게만 주고 노골적으로 한 사람에게만 잘해주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 싸움이 나겠죠? 야곱은 열 명의 형들을 두고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주어 입혔습니다. 채색옷을 형들이 차례대로 입다가 물려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아들들은 어떤 마음일까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이러한 야곱의 편애로 인해 형들은 요셉을 미워합니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4)
여기 말씀에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은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밉지만 어떻게 하지 못하고 눈치 보면서 불편해하고 편하게 말도 못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편안하게” 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단어인데 ‘샬롬’입니다. ‘평화, 평안, 안녕’이라는 의미입니다. 인사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형들이 요셉에게 평화를 말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다정한 말, 평안의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형들의 입장에서 요셉이 자신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친 것 화가 날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아버지에게 더 사랑받는 일은 요셉의 잘못이 아닙니다. 편애를 하는 것은 아버지이고, 요셉은 사랑받은 잘못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한 형들의 불만과 미움은 요셉에게로 돌아갑니다. 형들은 편애를 하고 있는 아버지, 야곱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는 요셉을 미워합니다. 이렇게 형들의 마음에는 요셉에 대한 미움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일이 벌어집니다. 요셉은 어찌 보면 참 눈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의 나이 열일곱입니다. 요셉이 어떤 일을 합니까? 요셉은 자신이 꾸었던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요셉에게는 이 꿈이 너무 신기하고, 특별한 경험이니까 신이 나서 형들에게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6)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요셉 이야기가 지금까지 창세기의 기록과는 다른 또 하나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꿈입니다. 이것이 다섯째 특징입니다. 요셉 이야기에서 꿈은 다른 형태입니다. 이제까지 꿈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상황만 보여 주십니다. 요셉의 꿈은 해석이 필요한 상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해몽의 과정이 필요하도록 주셨습니다.
이것은 훗날 요셉이 애굽에서 하게 될 일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지혜가 애굽 사람의 지혜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밝히며 하나님이 그러한 지혜를 허락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꿈의 형태, 꿈을 통해 메시지가 전달되는 방법이 변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야곱의 가족들은, 야곱은 물론이고 야곱의 다른 아들들까지 요셉의 꿈에 대해서 들으면 별다른 해석의 과정 없이 그냥 그 의미를 다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야곱이 꾼 꿈은 어떤 꿈이었습니까?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7) 7절의 표현 중에 특이한 것은 ‘보라’라는 감탄사가 세 번이나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다 생략이 되었는데, 직역을 한 성경을 참고하면 이렇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들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는데, 보소서, 내 단은 일어나 똑바로 서고, 보소서, 형들의 단은 둘러서서 내 단에게 절을 하더이다.”
이 말 안에서 요셉의 감정이 느껴집니다. 정말 놀라운 것을 경험한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형들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요셉도 이 꿈이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전혀 거리낌 없이 형들에게 꿈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지만 형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예언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의 교만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꿈을 들은 형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8) 형들은 꿈을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꿈이 무엇을 말하는지, 요셉이 자신들을 다스린다는 의미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형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선택하셨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꿈에 대한 요셉과 형들의 생각 차이가 상황을 최악으로 몰아갑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형들의 입장에서는 이처럼 건방진 동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동생의 말을 듣고 좋아할 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꿈 이야기는 형들을 더욱더 화나게, 요셉을 미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요셉은 진짜 눈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의 나이 열일곱입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9) 요셉은 이번에도 두 번이나 ‘보소서’라는 말을 사용하며 자신의 꿈을 감탄하며 형들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형들뿐만 아니라 아버지 야곱에게까지 꿈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10)
요셉은 자신의 꿈을 그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로인해 형들은 물론이고 아버지도 화를 냅니다. 요셉의 꿈은 집안의 모든 질서를 위협했기 때문에 아버지로서 당연히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을 나무라면서도 그의 말을 마음에 담아둡니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11) 야곱은 요셉이 꾼 꿈이 하나님께서 앞으로 될 일을 보여 주신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꿈은 상징으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두 번의 꿈은 같은 것으로, 같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처럼 요셉 이야기에서 나오는 꿈은 항상 두 개씩 나타납니다. 요셉의 꿈도 두 개였고, 감옥에서도 두 개의 꿈이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가 꾸었던 꿈도 두 개였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훗날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41:32) 두 번의 꿈은 일이 반드시 실현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던 우리의 주인공 열일곱 살, 눈치 없는 요셉, 어찌 보면 너무도 순진하고 순수한 청년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그로인해 형들에게는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면서 더 큰 미움을 받게 되었고, 형들은 요셉을 시기합니다. 앞으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요셉 이야기는 다음시간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요셉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우리 가운데 요셉이 있으면 어떨까요? 곱게 볼 수 있을까요? 눈치가 저렇게 없나? 왜 저런 말을 하지?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참 독특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혹시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요셉의 형들처럼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한 번 생각해볼까요? 요셉이 무엇을 잘못한 겁니까?
형들의 악을 아버지에게 말한 것이 잘못인가요? 아니면, 형들이 악을 행한 것이 잘못인가요? 차별된 사랑을 받은 아들이 잘못인가요? 아니면, 차별된 사랑을 주는 아버지가 잘못인가요? 요셉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이 잘못인가요? 아니면, 요셉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을 시기하는 것이 잘못인가요?
물론, 요셉이 서툴고 그 방법에 있어서 지혜가 필요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나의 잘못에 대한 원망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시기하거나 미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악 된 본성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형제들 사이에 시기심을 불러일으켰고, 그 시기심은 죽이고 싶을 정도의 증오로 변합니다. 그래서 그 결과 하나님의 선택을 인정하는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죄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내 욕심에 따라 악을 선택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내 욕심에 따라 죄를 선택하게 됩니다.
사람은 다 같을 수 없습니다. 다양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다양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의 죄성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 나에게 없는 것을 누리고 있는 사람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괜히 그 사람이 밉고, 싫어 보이고, 하는 것이 다 마음에 안 듭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그 사람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속 비교하면서 미워하고 그 미움을 키워가며 시기심을 느끼며 그것을 삶의 즐거움으로 삼아야 할까요?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비교하고 시기하는 마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키우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받아주셨는지 기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고, 이해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내가 받은 놀라운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나에게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삶은 더 힘 있고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서 나의 가치를 알고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자로서 마땅한 나의 반응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말씀을 몇 구절 읽어 드리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