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왜 예수는 죄인들과 어울리는가?
본문: 누가복음 15장 1~10절
설교자: 이병권
우리는 누군가를 생각할 때 그 사람에 대해서 기대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하는 모습과 너무 다른 모습을 보면 당황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하고 처음으로 직면하게 되는 배우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면, 이 사람이 정말 내가 결혼한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가 자라 십대가 되어 반항하는 모습을 보면, 이 인간이 정말 내가 낳은 인간이 맞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항상 내가 기대하는 모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기대하는 것과 다른 모습을 볼 때,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에 그 사람에 대한 원망이나 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기대와 너무나 다른 예수님을 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라는 젊은 랍비는 너무도 못마땅합니다. 하는 말도 마음에 안 들고, 하는 일도 마음에 안 들고,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키는 골칫덩이로 생각됩니다.
게다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그 예수의 주변에는 함께 할 수 없는 자들,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예수는 그런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분명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술집에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서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신선한 모습이라며, 나도 저 자리에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까요? 아니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까요? 그렇게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드는 생각은 어떻게 목회자가 저런 곳에 있을 수 있나!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기에 예수님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럼 반면에 세리와 죄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어떨까요?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을 받아주는 종교 지도자를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천대받았고 소외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분은 다릅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자를 받아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권위 있는 말씀과 능력으로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사랑과 용서를 경험하고 그 삶을 돌이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예수 앞에 나아옵니다.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래서 누가는 이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1) 이것은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에 대한 응답과도 같습니다. 바로 앞 구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4:35) 예수님의 이 말씀에 누가 응답을 합니까? 누가 들을 귀가 있는 자들입니까? 누가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께로 나아옵니까?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옵니다.
그런데 이와 대조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수군거립니다. 수군거렸다는 것은 소리를 내어서 계속적으로 원망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은 두 그룹에 대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죄인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죄인이라고 여겨졌던 자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누구보다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철저하게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누구보다 하나님 편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었고, 죄인들과는 다른,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면 제일 먼저 이들이 그 축복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인정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의인이라고 여겨졌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하며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죄인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죄인들과 함께 할 수 없고, 죄인들과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들의 문제를 아시고, 그들에게 연속해서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이 세 개의 비유가 연속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세 비유 중에서 두 개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내용이 아주 비슷합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고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습니다. 그리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입니다. 예수님은 이 단순한 비유를 가지고 아주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럼 그 교훈이 무엇인지 먼저 비유를 살펴보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두 비유는 대칭으로 짝을 이루고 있는데 비유에 나오는 등장인물부터 보면, 첫 번째 비유는 어떤 남자가 나오고, 두 번째 비유는 어떤 여자가 나옵니다. 누가복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와 여자가 짝을 지어서 나오는 것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남자는 백 마리의 양을 가졌고, 여자는 열 개의 드라크마를 가졌습니다. 드라크마는 은으로 만든 그리스의 화폐입니다. 로마의 화폐인 데나리온과 같은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백 마리의 양을 가진 남자와 열 개의 드라크마를 가진 여자, 뭔가 특별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은 가진 것 중에 하나를 잃어버립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당연한 대답이 나오는 질문을 하십니다.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를 잃으면 찾지 않겠느냐?’ 하고 물으신 겁니다. 당연히 그 잃은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한 마리의 양을 잃은 남자는 양을 찾아 나섭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그 잃은 하나를 찾기 위해 수고합니다.
언제까지요? “찾아내기까지”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닙니다. 말씀을 보면서 어떤 분들은 이런 걱정을 할지도 모릅니다. ‘한 마리 찾다가 더 많이 잃어버리면 어쩌나?’ ‘늑대가 나타나면 어쩌려고’ 이 비유에서 주목할 것은 아흔아홉의 안전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한 수고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도 걱정되시는 분이 계실 거 같은데, 남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위험한 상태로 내버려둔 것이 아니라, 당시 목자들이 했던 것처럼 동료에게 맡기거나 다른 조치를 취하고 갔을 것입니다.
그럼 두 번째 비유에 나오는 여자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은 첫 번째 비유와 똑같은 표현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은 드라크마를 찾아내기까지, 찾을 때까지 찾습니다.
그녀는 어두운 집안을 밝히기 위해 등불을 켭니다.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불을 밝히고, 바닥을 쓸기 시작합니다. 당시의 집은 바닥에 장판이나 마루가 깔려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는 바닥에 있는 흙먼지들과 지푸라기들을 쓸어내는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수고를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부지런히” 여인은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수고합니다.
이런 수고를 통해서, 찾아내기까지 열심히 해서, 찾았을 때 어떻게 합니까?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고서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다니!’ 혼을 내면서 양을 팔아버렸을까요? 아니면, 줄로 묶어서 다시는 딴 길로 가지 못하게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즐거워하며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는 친구들과 이웃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함께 즐기자고 말합니다. 잔치를 벌이는 겁니다. 잃은 양을 찾은 것을 기념하는 파티를 엽니다.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은 어떻게 합니까? 똑같습니다. 그녀도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것을 기념하는 잔치를 벌입니다. 친구들과 이웃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함께 즐기자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똑같은 표현을 반복해서 말씀하시면서 잃은 것을 찾은 기쁨에 대해서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땅에서 벌어지는 기쁨의 잔치를 통해 하늘에서 벌어지는 기쁨의 잔치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것을 죄인이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기뻐하는 목자와 여인을 죄인이 회개했을 때 기뻐하시는 하나님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절)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잃어버린 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늘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과 비교되는 더 큰 기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7절에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1번,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은 회개가 필요 없는 하늘의 천사를 말한다. 2번,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은 이미 회개를 해서 영화로운 상태에 이른 하늘에 있는 구원받은 자를 말한다. 3번,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말한다.
1번의 경우,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을 천사로 보면, 10절에 천사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문맥상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됩니다. 2번의 경우,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을 하늘에 있는 의인으로 보면, 하나님은 구원받은 아흔아홉보다 지금 막 회개한 한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사람보다 회개라는 사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해석입니다. 3번의 경우,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을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 보면,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풍자적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자신이 의인이라고 믿는 죄인들보다, 회개하는 죄인으로 인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3번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 됩니다. 누가는 이미 5장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록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비난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5:31-32)
정리하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현재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보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진정으로 회개할 때 더욱 기뻐하십니다.
자! 그럼 이 두 개의 비유가 무엇을 가르쳐줄까요? 왜 예수는 죄인들과 어울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떤 답을 주는 걸까요?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계십니까? 두 가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죄인을 어떻게 보시는지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다시 찾아야하는 잃어버린 자로 보십니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인을 함께 할 수 없는 자로 보았습니다. 죄인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로 생각했고 배척했습니다. 죄인과 함께 하면 자신도 죄인이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죄인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다르게 죄인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죄인이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느낌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정말 더러운 죄인, 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더러운 죄인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라는 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이 말은 자신의 고백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향한 비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자신에게 쓰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쓰는 것, 단순한 차이일 수 있지만,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사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으로,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와 은혜를 거절하는 자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누군가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지만, 누군가는 예수님께 나온 사람을 정죄하며 비난합니다. 죄인을 어떻게 보느냐하는 작은 차이 때문에 완전히 다른 목적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관점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 죄인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되십니까? 다른 사람인가요? 아니면 나 자신인가요? 우리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자주 잊어버립니다. 나는 저기 있는 저 나쁜 사람보다 괜찮기 때문에, 더 잘났기 때문에, 더 의롭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받아주신 것처럼 착각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은혜가 필요한 자들이며, 하나님이 찾으시는 잃어버린 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비유가 주는 교훈, 첫째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죄인을 다시 찾아야 하는 잃어버린 자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둘째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여 돌아왔을 때 기뻐하십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인 것처럼 하늘에서 기쁨의 잔치가 벌어집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는 것,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것, 그 일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죄가 조금도 없으신 분이 죄인들 속으로 뛰어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믿는 세상의 어떤 종교도, 사람들이 말하는 세상의 어떤 신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신이 찾아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을 만나기 위해 사람이 수고해야합니다. 사람이 뭔가 지극 정성으로 성심을 다했을 때 그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 신이 알아주고 복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친히 사람들에게 오셨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넘으려고 했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그 담을 예수님이 무너뜨렸습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이 돌이키는 것을 기뻐하시고, 잃어버린 자를 찾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리십니까? 죄인은 가까이 할 수 없는 더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잃어버린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인에게 다가오셨고, 죄인과 함께 하셨고, 죄인과 식사하셨으며,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죄인을 구하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인이 돌아왔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바로 우리가 그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내기까지 찾으셨고,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오늘 비유를 다시 생각하면 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혹시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잃어버린 것 하나 찾았다고 잔치까지 하는 것은 좀 과한 거 아닌가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다고 잔치를 벌입니다. 잃은 드라크마 하나를 찾았다고 잔치를 벌입니다. 그것도 혼자서 하는 작은 잔치가 아닙니다. 친구들을 모으고 이웃들을 초청해서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이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 아닙니까? 손해 보는 일 같은데 뭐 하러 이렇게 하는 겁니까?
이건 우리의 계산 방법입니다. 이 땅에서의 논리를 가지고 따지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게 뭐라고, 그 잃은 것을 찾은 일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이 그렇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말이 되는 일입니까? 죄인들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거야 말로 손해가 아닙니까? 피조물을 위해서 창조주가 대신 희생을 당하다니, 말이 되는 일입니까?
이렇게 무지막지한 사랑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계산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본을 좇아서 우리도 죄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내가 할 수 있는 수고를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것처럼, 내가 아는 누군가를 위해,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나에게 정말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나의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1층에 있는 주인을 찾고 있는 물품들을 보셨습니까? 누군가가 잃어버렸지만, 주인은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럴 때가 많습니다.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고 그냥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충성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비난과 거절과 손가락질이 있었지만,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시되, 그 죄에 대해서는 의로움을 나타내시고, 그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품어주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이 죄인을 바라보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에 수고를 다해야 하겠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아직도 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으신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죄인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니 죄인을 용서하시고 회개하는 자를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그분께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양을 잃어버린 목자와 같은 마음으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