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왕께 경배하라

본문: 요한계시록 11장 15-19절

설교자: 조정의

1945년 8월, 연합군은 일본 나가사키에 경고문을 뿌렸다. 대략 이틀 전에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고 난 직후였다. 원폭 당일에 집계된 사망자만 45,000명에서 83,000명, 이후에도 후폭풍, 기타 질병, 합병증으로 계속해서 사망자가 발생했고(방사능 사망자 70만명), 도시는 완전히 초토화됐다. 연합군은 나가사키 시민들에게 천황을 설득하여 항복하든지 아니면 즉시 도시에서 대피하라고 촉구했다. 많은 원자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똑똑히 보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계시록 말씀은 어떤 면에서 나가사키 경고문과 유사하다. 마귀는 땅에 사는 사람의 천황으로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요 12:31). 하나님 나라 총사령관이신 어린양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마지막 계획에 따라 심판을 땅에 쏟으실 것이다. 무시무시한 원자폭탄이 한낱 폭죽놀이처럼 보일 만큼,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피조 세계를 치명적으로 파괴할 것이다. 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경고하실 것이다. ‘너희 왕 마귀는 절대 항복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너희라도 즉시 투항하라.’ ‘불바다가 될 나라 편에 서지 말고, 반드시 승리할 내 나라의 시민이 되어라.’

본문은 일곱째 나팔 심판의 시작을 알린다. 막간에 요한은 일곱째 천사가 나팔 소리를 낼 때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않고 남은 비밀을 이루실 것이란 음성을 들었다(계 10:6-7). 하나님의 남은 비밀은 마귀의 최후 발악(12-14장), 하나님의 최종 승리(15-18장)를 담고 있다. 우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진노가 쏟아질 것을 기대하지만, 그 전에 먼저 최후 승리를 확신하는 하늘의 외침을 들을 수 있다. 본문에 담긴 승리의 외침에 귀 기울이며 영원하신 왕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가져야 하는 삶의 태도를 갖추자.

1. “왕이 이기신다”(15절) – 회개하라!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났다. 큰 음성들은 복수 형태로 여기 처음 사용되는데, 하늘에서 난 소리의 출처가 다양하다는 걸 말해준다.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많은 음성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① 네 생물(높은 반열의 천사들, 4:6-8), ② 이십사 장로들(거룩함을 입은 성도들, 4:4, 10), ③ 수많은 천사들(5:11, “많은 천사의 음성”), ④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이다(환난 중에 구원받고 순교한 성도, 7:9, 14). 예배 대상이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를 제외한 하늘에 속한 모든 피조물이 지금 모두 한 목소리로 크게 외치고 있다(대교향곡이 울려 퍼졌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15절).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세상 나라를 이기고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란 외침이다. 두 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1)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이 정복하실 영역을 가리킬 때 세상 나라라는 단수를 사용했다. 여러 민족과 나라로 땅에 사는 사람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민족과 나라의 구분 없이 모두 세상에 속한 한 나라로 분류했다.

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분류법을 따른 것으로 모든 사람은 두 왕국 중 하나에 속한 백성이다. 세상의 임금 마귀에게 속한 세상 나라 백성이거나 하늘의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 나라 백성. 예수님은 자기를 거절한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고(요 8:44),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요 8:47). 반면에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그분 말씀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하셨다(요 15:19). 주가 택하신 주께 속한 자다.

그러므로 당신이 어디에 속한 백성인지 분명하게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엡 2:1-3). 하나님의 절대로 변하지 않는 계획에 따라,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를 정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2) 바로 이 확실성이 우리가 두 번째로 주목할 대목이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에서 ‘되다’(become)는 예변적(미래적) 과거형으로 이미 일어난 일처럼 표현해도 될 정도로 확실히 일어날 미래 사건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대로 역사가 이뤄지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한다. 실패한 적은 없다. 출애굽 사건,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그대로 이뤄졌다. 약속의 땅 정복,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나라가 분열될 것과 제국에 사로잡힐 것과 다시 회복될 것을 선지자들에게 미리 알리셨고, 그대로 이뤄졌다. 다윗의 자손으로 영원히 다스리실 왕의 탄생을 알리셨고, 그 말씀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두 다 이루셨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나라를 이기고 영원히 왕 노릇 하실 계획의 성취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 역시 일어날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일어난 일처럼 확신할 수 있다(단 2:44; 7:13-14; 슥 14:9).

마귀가 태초에 하나님께 반기를 든 이후로 마귀에게 속한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간 전쟁은 멈춘 적이 없다. 마귀는 영적으로 엄청난 공세를 퍼부어 반역자를 무섭게 늘려가고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는 영적인 방법을 넘어 물리적인 방법(핍박, 고문, 투옥,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오래 참고 계시지만(벧후 3:9), 정하신 때가 되면 세상 나라에 진노의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실 것이다. 그전에 주께서 하시는 경고를 흘려듣지 말라.

하나님은 반드시 세상 나라를 이기신다. 홀로 다스리시는 왕으로 영원히 통치하신다. 지금 당신에겐 투항할 기회가 있다. 항복은 어렵지 않다. 하나님이 보내신 평화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시 2:12).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입 맞추라(계 1:5-6).

2. 왕께 경배하라(16-19절) – 예배하라!

큰 음성들이 한 말에(소리) 집중했던 요한은 이제 특정한 대상이 하는 행위(장면)와 말(소리)에 관심을 둔다.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를 봤다(16절). 그들은 거룩함을 입은 성도, 휴거된 교회를 대표하는 등장인물로 보좌에 앉아 주와 함께 왕 노릇 한다(계 4장).

일곱째 천사의 나팔과 함께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가 울려 퍼지고 마지막 비밀 계획이 실현될 때,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실로 예배하는 자의 합당한 자세다. 

오늘날 많은 성도가 율법주의, 형식주의를 혐오하여 멀리한다는 핑계로 예배의 자세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의복, 자세, 방식이 아니라 중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순위에 있어선 맞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중심은 우리의 자세, 의복, 방식에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 중심과 외형의 우선순위가 바뀌어서는 안 되지만, 둘의 극단적인 분리도 옳지 않다. 예배자는 예배의 중심에 합당한 자세를 갖춰야 한다.

이제 성도들의 경배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감사하옵나니(17절). 기본적으로 성도들의 예배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하나님의 성품과 하실 일에 관하여 감사하고 합당하게 여기는 것이다.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17절).

예배는 하나님이 하신 일(우리를 위하여) 이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체를 높이고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다(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전능하신 이). 수명과 능력이 유한한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히 살아계시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영원하신 하나님께 자주 돌려진 이름인데(계 1:4, 4:8), 여기엔 ‘장차’ 부분이 빠졌다. 왜? 일곱째 나팔이 울린 이 시점엔 하나님의 오심이 너무도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능을 잡으실 것이고 왕 노릇 하실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하셨고(부정과거) 계속해서 통치가 지속될 것을(완료) 노래했다.

이어지는 경배의 내용은 하나님이 하신(실) 일에 관한 것으로 요약하면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에게 상 주시는 일이다. 시작과 끝에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노래한다(18절, 샌드위치 구조):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나님 편에 서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 약속 밖에 있는 이방들이고, 죄와 허물로 생명의 주로부터 분리된 죽은 자며,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 즉 온갖 더러운 죄로 땅을 더럽히는 악인이다(계 19:2,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실 것이고 심판하실 것이다. 그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한편 하나님 편에 선 자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샌드위치 중간 핵심 내용). 종 선지자들, 성도들,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 이들을 억지로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의 비밀을 대언한 선지자들, 그 말씀에 따라 거룩함을 입고 신실한 삶으로 충성한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 모두는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 제사장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반드시 상 주실 것이다(18절). 

하늘의 성도들이 경배하는 내용에서도 하나님이 장차 이루실 일이 모두 부정 과거형으로 사용됐다. 대환난이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아직 진행 중이고, 악인은 최후의 발악으로 분노하며 하나님께 대항하고, 의인은 여전히 핍박 중에 있는 그 시점에, 하늘의 성도들은 이미 일어난 일처럼 장차 하나님이 악인에게 진노를 쏟고 심판을 내리고 그들을 멸망시키실 것과 의인에게 상 주실 것을 확신하고 바라보고 기대하고 또 기뻐하며 찬양했다.

구속받은 성도들이 영원한 왕으로 다스리실 하나님께 엎드려 바친 경배와 찬양의 절정은 1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다. 요한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는 것을 봤다.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다. 어떤 시대 어느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던 가장 거룩한 지성소 안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있었다. 현현(하나님의 임재가 눈에 보이도록 나타난) 때에 동반되는 번개, 음성들, 우레, 지진, 큰 우박이 함께 했다. 모두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또렷이 보여줬다.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시고 그 능력과 권세로 반드시 계획하신 대로 악인을 멸하고 의인을 높이실 것이다.

이십사 장로들은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구속을 받은 교회, 거룩함을 입은 성도를 대표한다. 즉 오늘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고 있는 교회, 거룩함을 입고 있는 성도,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가 드릴 경배, 우리가 부를 찬양, 우리가 밤낮 바라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할 하나님의 임재를 본문은 미리 들려주고 보여준다. 놀랍지 않은가? 이것은 우리에게 적어도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태도에 관하여.

첫째, 우리가 모일 때 우리는 영적인 성전이다. 우리 중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휘장을 지나 하나님의 가장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임재로 나아가 영과 진리로 경배드린다. 장차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우리가 드릴 예배를 생각하고, 지금 우리가 어떤 태도와 내용으로 예배하고 있는지 점검하자. 당신은 예배를 통해 무엇을 기념하기 원하는가? 무엇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가? 하나님께 엎드려 땅에 얼굴을 대고 경배하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당신이 드리는 예배에 나타나는가? 입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에 어떻게 반영하는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둘째, 성경은 우리 삶 전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며 영적 예배라고 말한다(롬 12:1). 우리는 장차 하늘 성전에서 하나님이 악인을 멸절하고 의인에게 상주시며 영원한 왕으로 통치하실 것을 확신하고 기대하며 넘치는 기쁨으로 예배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것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상 주심을 얼마나 믿으며 인내하고 있는가? 교회 밖에서 하는 일이든 교회 안에서 하는 봉사와 섬김이든 모두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하나님이 보상하실 것을 바라며 ‘주께 하듯’하는 것이 바로 참된 예배자의 마땅한 태도다. 항상 예배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기억하라. 

베드로는 종말에 세상 나라를 불로 사르시고 악인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이뤄질 것을 말하면서 성도들에게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묻는다(벧후 3:11).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12). 어디든지 있는 곳에서 경건함과 거룩한 행실로 예배하고, 하나님의 임하심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삶, 바로 예배하는 삶이다.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장차 하늘에서도 그런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배자의 마땅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