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본문: 에베소서 5장 15-21절

설교자: 조정의

복음은 우리 신분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삶의 목적, 원칙, 동력까지 바꾼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사랑받는 자녀가 되게 하셨고(5:1),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하셨다(5:8). 

경유 차를 타던 사람이 차를 휘발유 차로 바꿨는데, 여전히 경유를 가득 채워 넣고 운전하면 어떻게 될까? 소음, 진동, 시동 불량, 엔진 및 모든 부품 손상, 심지어 폭발 사고까지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은혜로 새 삶을 살게 된 그리스도인이 옛 삶의 방식대로 행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새 생명을 얻고 나서는 육체의 정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채워야 한다.

본문은 어떤 삶이 성령을 가득 채운 삶인지 말해준다. 부정과 긍정 명령이 한 쌍을 이루어 총 세 번의 복합 명령들이 주어진다: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15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7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18절). 각각의 명령들은 성령 충만한 자가 어떤 삶의 목적(방향)을 향하여, 어떤 원칙에 따라, 어떤 동력으로 삶을 살아야 할지 분명하게 가르친다. 성령 충만은 명령이자 은혜로운 축복이다.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간절히 구하며, 지극히 풍성한 성령님의 능력으로 채워진 축복의 삶을 살자.

1. 방향: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15-16절)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헬: 플레로오)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는데, 첫째로 돛을 단 배가 바람에 의해 움직인다는 의미가 있다. 바람이 배를 이끌어 가는 것처럼,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끄신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삶은 어떤 ‘느낌’을 가지고 사는가와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는가와 관련이 깊다. 우리는 성령이 이끄시는 ‘방향’대로 살아야 한다.

15절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주의 깊게 살펴)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절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서 명령어는 ‘주의하여 보라’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지 말고 어떻게 행할지를 깊이 생각하며 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목적을 항상 기억하라는 명령이다(현재형). 가볍게 인지하고 넘어가는 차원이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집중하여 매일 삶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떻게 목적에 부합한 지 자세히 살피는 것이다.

이어서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는 말씀도 삶의 분명한 방향을 가리킨다. 잠언에서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잠 9:10). 그래서 지혜 없는 자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그 뜻을 업신여기며 사는 사람이고, 지혜 있는 자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뜻대로 사는 사람이다. 목적이 다르다. 지혜 없는 자는 자기 육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산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편지할 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이것은 복음의 결과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셨다(롬 14:9).

이 사실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없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는 자가 혹 있는가? 없다. 문제는, 16절 말씀처럼 “때가 악하”다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시스템), 세상 풍조에 따라 사는 사람들, 그 배후에 있는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정욕, 마음이 원하는 것을 좇아 살도록 부추긴다. 방향을 자꾸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님은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셨다. 시간을 절약해서 쓰라는 일반적인 권면이 아니다.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 할당된 각자의 인생을 목적과 상관없는 일로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기회를 사라’, ‘시간을 사라’는 말이다. 

생각 없이 살면 나도 모르게 삶의 방향이 틀어지는 악한 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 매 순간을 성령이 이끄시는 삶의 목적대로 살 수 있을까 자세히 주의하며 살펴야 한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최대한 기회를 사서 그 목적을 이루는 말과 행동을 내야 한다. 

우리는 “향방 없는 것 같이” 달음질하는 자들이 아니다(고전 9:26). 복음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이리저리 방황하며 살다가 영벌에 이를 우리 삶에 완전히 다른 목적지인 영생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었다. 악한 세상은 우리를 그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성령은 오직 푯대를 향하여 우리를 달리게 한다(빌 3:14). 성령 충만한 삶은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는다’라는 분명한 삶의 목적을 항상 기억하는 삶이다.

2. 원칙: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7절)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의 또 다른 의미는 ‘스며든다’이다. 소금이 고기에 스며들어 맛을 내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스며들어 계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우리 삶의 원칙과 관련되어 있다. 성령께서 우리 삶 곳곳에 충만하게 스며들어 계신다면, 우리 삶을 움직이는 원칙은 ‘우리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이 될 것이다.

17절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본문에서 ‘되지 말라’고 명한 어리석은 자는 단지 이해력이 부족하거나 둔한 사람이 아니다. 시편 14편 1절은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어리석은 자의 마음엔 하나님이 없다. 삶의 원칙이 하나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이다. 그 결과 부패하고 악한 행실을 낳는다.

성령 충만한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처럼 살 수 없다. 성령께서 삶 곳곳에 스며들어 우리를 주의 뜻대로 살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해하라”는 명령에 주목하라. ‘깨닫다’는 뜻을 가진 이 명령은 그 대상을 분명히 한다: “주의 뜻.” ‘주되신 예수님의 뜻.’ 사도 바울은 이 악한 세대를 본받는 대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롬 12:2). 내가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은 “스스로 말하지 않”으신다.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신다.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15). 성령님은 우리가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며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성령님은 성경을 통해 ‘주의 것’, ‘주의 뜻’을 알게 하시고 그 원칙대로 살게 하신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의 뜻을 자기 마음대로 이해한다. 성경에 의도된 ‘주의 뜻’을 깨닫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자신이 생각하는 ‘주의 뜻’ 따라 살려 한다. 오늘날 유행하는 인본주의식 책 읽기 즉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독자가 느끼는 대로 해석하는 방식을 성경 읽기에 그대로 적용한다. 19세기 노먼 홀랜드, 블레이치 등이 심리학에서 끌어낸 성경해석법인데, 독자가 본문의 의미를 결정한다.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하다.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주의 뜻을 밝히시는 성령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자는 성경을 통해 성령께서 밝히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이해를 원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와 함께 쓴 서신서인 골로새서에서 본문 18-21절 말씀과 매우 유사한 표현으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라고 명령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위와 같은 삶의 원동력은 본문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18절)인데,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말한다(말씀 충만).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 여기서 핵심은 독자의 이해가 아니라 저자이신 주님의 뜻이다. 성령님은 주의 뜻이 우리 삶에 가득 스며들게 하신다.

존 맥아더는 이렇게 말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의 말씀(성경)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으로 충만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할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며(다스리며), 이로써 우리는 점점 더 성령의 통제(다스림)를 받는다”(에베소서, 386p). 성령으로 거듭날 때 우리는 자기 뜻을 버리고 주의 뜻 아래 굴복했다. 성령은 계속해서 이 일을 하신다.

3. 동력: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18-21절)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의 세 번째 의미는 통제하는 힘, 동력과 관련 있다. 18절 말씀에서 금지하고 있는 명령을 보라.

18절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한 자가 보여주는 여러 가지 말과 행동은(주사) 술이 그 사람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힘의 결과다. 평소에 부끄러워서 말 한마디 없던 사람이 크게 소리 지르고 쉼 없이 말을 하고, 품행이 단정했던 사람이 시비를 걸거나 폭력을 휘두른다. 술의 통제력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술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술 자체는 음료다(성경 시대에는 무알콜에 가까운 낮은 도수의 음료). 2) 술 취함은 죄다(고전 6:9-10; 갈 5:21). 3) 나실인, 장로, 집사 등 성숙한 신자에게 절제 요구. 4) 하나님의 영광, 자기 양심, 다른 이의 덕을 위하여 사용하라.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술 취함을 금지한 이유는 따로 있다. 술이 우리를 통제하는 강력한 힘이 되는 것처럼 성령님이 강력한 통제권을 가지고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동력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술이 사람을 통제하는 동력이 되는 것은 피하고,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을 통제하는 동력이 되게 해야 한다. 어떻게 할 수 있나? 먼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은 수동태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성령님을 충만하게 채우신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없는가? 있다. 따라오는 말씀을 보라.

① 찬송(19절)

19-21절에 나오는 찬송, 감사, 복종이 성령 충만의 결과인지 수단인지에 관해 견해차가 있지만, 둘 중 하나를 완전히 배제하긴 힘들다. 성령 충만을 받은 자는 삶 속에서 찬송과 감사와 복종이 힘차게 일어난다. 또한 우리는 찬송, 감사, 복종을 통해 성령이 우리를 충만하게 채우시는 은혜를 경험한다.

19절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 찬송, 신령한 노래들을 억지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주로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는 (대표적으로 시편), 신약시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지어 부른 찬송, 그 외 여러 가지 노래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잘 담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신령하다. 또한 듣는 이에게 유익하다. 그래서 바울은 ‘서로 화답하라’고 말한다. 

앞서 말씀 충만이 곧 성령 충만이라고 했다. 그러면 말씀에 충실한 노래를 서로를 향해 부르는 것 또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은혜의 통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찬송의 대상은 오직 주님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우리의 창조 목적이자 재창조(구원)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노래를 잘하든 잘하지 못하든 당신의 삶에 항상 찬송이 넘치게 하라. 그것이 성령 충만을 얻는 통로가 될 것이다.

② 감사(20절)

20절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사는 성령 충만의 확실한 열매다. 나에게 합당한 것은 지옥밖에 없다는 걸 겸손히 인정하고, 그 위에 더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에 감사한다. 샘 크랩트리는 <감사의 기술>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빚진 것이 없으시다. 단 하나도 없으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은혜를 통해 주어진 것으로, 받을 자격도 없고, 받기 위해 수고하지도 않았고, 요청하지도 않은 것이다”(24p).

감사하지 않는 자, 곧 그 마음에 불평과 원망과 불만족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그 마음에 채워지실 수 없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8). 그 뜻을 명백히 거역하는 자는 성령 충만 이전에 회개가 필요하다. 기억하라. 성령님은 오직 감사하는 마음에 임재하신다.

범사에 항상 감사가 가능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능하다. 우리는 슬프고 불의한 일 자체에 감사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감사하기 힘든 일을 만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깊이 헤아려라. 성령께서 감사의 마음을 부어주실 것이다.

③ 복종(21절)

21절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마지막 “복종”의 구체적인 예시는 다음 본문부터 등장한다(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 하나님께서는 인간관계 속에 각각 역할을 부여하셨다. 역할은 다르지만, 피차 복종해야 한다는 점에선 같다. 예로 남편은 가정의 머리(리더) 역할을 맡아 아내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고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다. 아내는 남편의 돕는 배필 역할로 남편을 존경하고 순종할 책임이 있다. 각자 역할에 따른 책임은 다르지만, 자기 역할에 충성하는 것으로 서로에게 복종한다는 점에서 같다.

성령님은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가 서로 복종하도록 인도하신다. 성령의 열매는 좋은 관계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갈 5장), 성령 충만한 자는 그 열매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기꺼이 복종할 것이다. 상호 복종의 동기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이다. 상대방의 어떠함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거룩한 두려움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복종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인간관계를 돌아보라. 계속된 갈등과 오래된 싸움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며 살아왔다면, 당신의 삶에 성령이 충만하지 않은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루빨리 회개하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히 12:14). 성령 충만은 성령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지만, 자발적인 우리의 순종을 통해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