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
본문: 에베소서 4장 17절-24절
설교자: 조정의
땀에 전 옷을 그대로 입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고 사실 비위생적이다. 땀이 식었으니 그 옷을 입고 자거나, 다음날에도 입고 생활하고, 일주일 내내 입는 건 어떤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신자는 새 창조의 은혜와 능력을 입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옛사람은 벗고,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일을 위해서 새 사람으로 지음 받았다(엡 2:10).
우리 인생이 입던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것을 반복하는 삶인 것처럼, 육체, 세상, 마귀가 원하는 것을 기뻐 행하던 옛 생활을 버리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는 새 삶을 사는 것, 이 두 과정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실천해야 할 복음에 합당한 삶,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삶이다(엡 4:1). 우리는 이것을 “성화”라 부른다.
오늘날 성화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다. 본문을 통해 ‘성화’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을 하나님 말씀으로 바로잡고, 날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성화의 은혜에 기쁨으로 적극적으로 동참하자.
1. 성화는 선택이다: 옷을 갈아입는 건 내 자유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선택 사항’으로 본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을 ‘옵션’으로 여긴다. 머리로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에 동의하지만, 실질적 삶으론 거부한다. 하지만 성화는 선택이 아니다. 명령이다.
17절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사도 바울은 사도권을 가지고 ‘내가 이것을 말한다’라고 진중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또 이것은 바울 자신의 가르침이 아니다. “주 안에서” 즉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권위를 가지고 명령한다.
또한 성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본문에서 22절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절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절 “새 사람을 입으라” 모두 명령어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니다. 앞에서 주님의 권위를 가지고 엄중히 명령한다고 했는데, 왜 그럴까?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복음으로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 사람은 그 신분에 맞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두 개의 신분을 가졌다고 착각한다. 로마서 7장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선을 행하기 원하는 지체와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고 섬기게 하는 지체(합체). 우리 안에 두 가지 성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두 개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단 하나의 신분을 가지고 옛 본성을 죽이면서 새 본성을 입는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 새것이 된 것이다(고후 5:17). 난폭하고 잔인한 부모 아래 있다가 사랑과 긍휼이 넘치는 부모에게 입양된 자녀는 이제 누구의 자녀인가? 두 부모가 아니라 한 부모다. 과거 악독한 부모 밑에서 살았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이 남아 있어서 선한 부모 밑에서 새롭게 배워나갈 방식과 계속 부딪히는 건 사실이지만(롬 7장), 아이의 신분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그러므로 옛사람을 당신의 여전한 본성이나 신분으로 인정하라는 사탄의 거짓에 속지 말라. 당신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옛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신분에 따라 사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
2. 옛삶은 무난하다: 입던 옷 냄새가 아주 나쁘진 않다
땀에 전 옷 냄새를 맡고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옷을 벗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옛사람의 삶을 무난하게 보는 그리스도인은 애써 그 삶을 벗겨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옛 삶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나는 삶인지 적지 않은 분량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하셨다(17-19절). 옛사람의 냄새는 더럽고(19절), 썩은 내가 난다(22절, 완료형). 옛사람은 ‘그리 나쁘지 않아’가 아니라 ‘치명적으로 나쁜’ 상태다. 그 지독한 냄새를 제대로 맡아라. 그러면 반드시 그 옷을 벗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7절…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절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절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바울이 닮지 말라고 경고한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실제로 에베소 성도를 둘러싼 이방인들의 삶은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심히 부패했다. 한 철학자는 에베소를 가리켜 이렇게까지 말했다: “역겨운 어둠이다. 도덕은 짐승만 못하며, 에베소 주민들은 익사 당해 마땅하다.” 수천 명의 신전 창녀, 범죄자의 소굴, 동성애를 비롯한 온갖 음란과 방탕이 가득한 곳이었다. 어떤 성도는 과거 이런 삶을 즐겼을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정도로 역겨운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자부할지도 모른다. 내가 입고 있는 옛 삶은 무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성령께서 자세히 설명한 비신자의 삶은 세 가지 영역에서 썩은내가 났다. 첫째, 지성(17마음의 허망한 것, 18총명이 어두워지고, 18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 허망하다는 것은 헛되다는 의미다. 생각에 있어 참된 것을 좇지 않고 헛된 것을 좇는 것이다. 썩지 않을 것이 아니라 썩을 것, 영원한 것이 아닌 일시적인 것을 추구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의 사고가 그렇다.
이는 그들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두워진 총명과 무지하고 미련한 마음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을 거부한 이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문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둘째, 의지(18그들의 마음이 굳어짐). 하나님을 거부한 모든 사람은 무지의 문제뿐만 아니라 무능의 문제를 갖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을 행할 능력이 없다. 19절에선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라고 말했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에 대한 감각이 매우 둔해진 상태를 말하는데, 단순히 양심이 마비되어서 분별력을 잃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으로 강력하게 반항하기 때문이다(석화).
셋째, 행위(19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는 의지를 가진 자는 자연스럽게 자기 욕구에 따른 방탕하고 더러운 삶을 산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이 모두 범죄를 일삼는 건 아니다. 방탕한 삶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18절).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그분께 영광 돌리는 삶에 있어서는 철저히 무지하고 무능하다. 창조주의 목적을 벗어나는 삶, 주권자의 통치를 거부하는 삶, 구세주의 은혜를 거절하는 삶, 그 자체가 심각한 범죄고 모든 불의는 바로 거기서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는다.
정리하면, 옛 삶은 아무리 무난해 보여도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생각, 하나님께 반항하는 의지, 하나님 뜻에 반역하는 행위의 썩은 냄새가 난다(예: 신호위반, 과격한 말). 0기 암 판정을 받아도 암 환자다. 옛삶의 증상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나병의 의심이 드는 뾰루지, 색점, 털이 생기면 바로 제사장을 통해 “부정하다”라고 선포하고 격리하여 백성의 거룩함을 지켜냈던 것처럼, 당신 삶에서 옛 삶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바로 예수님께 달려가 죄를 자백하라. 그러면 주께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요일 1:9).
3. 충분히 알고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거 잘 안다
20절 말씀은 “오직 너희는”으로 시작한다. 이방인과 너희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달라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0절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배움은 그 다음 구절에서도 강조 된다.
21절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예수님께 듣고 가르침을 받고 그분의 삶을 통해 배운 내용이 바로 22절에서 24절까지의 내용이다.
22절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절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절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라는 가르침, 처음 들어본 사람이 있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고, 이런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으며,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게 바로 성화의 큰 걸림돌이다.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걸 아는 것과 실제로 갈아입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22-24절에 정말 깊고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가 담겨 있지만,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 실제로 행하게 하는 비결에 중점을 두기 원한다.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벗고, 깨끗하고 향기 나는 옷을 입게 하는 비결은 바로 ‘새롭게 되는 것’이다(23절). 옷을 갈아입는 비유를 이어가자면, 이것은 몸을 깨끗이 씻는 것과 같다. 샤워하고 난 다음에는 더러운 옷을 입기 싫다. 깨끗한 옷을 입고 싶다.
23절에 ‘새롭게 되다’는 수동태다. 우리가 새롭게 하는 게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2절엔 유사한 말씀이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심령(마음)은 단지 지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생각, 계획, 판단, 선택, 의지 등 행위를 결정하는 모든 전인격을 가리킨다. 요컨대 우리는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의지가 변해야 한다. 원하는 것 자체가 달라져야 하고, 그것을 실행할 능력을 얻어야 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항상 그 일을 하신다(현재형).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없는가? 있다. 성령이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직전,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명령했다(빌 2:13, 12).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방편(말씀, 기도, 교제, 예배, 섬김 등)을 최대한 활용하여 성령이 우리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렇게 말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존 스토트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재창조하실 때, 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협력한다”(BST, 에베소서, 223p). 또 다른 주석가 스노드글래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생각하고 묵상하고 재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삶의 재구성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NIVAC, 에베소서, 300p). 참으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자는 충분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분은 우리가 영원히 배워야 할 만큼 지혜롭고 영광스러운 분이다. 우린 항상 주님께 배워야 한다.
앞으로 에베소서 본문에서 우리는 성도가 개인적인 삶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떻게 옛 삶을 벗고 새 삶을 입는지 구체적인 적용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영적 전쟁이다. 마귀는 당신의 성화를 끝까지 방해하여 십자가 은혜를 값싸고 초라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계속해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롬 8:26). 당신은 성령의 역사에 기쁨으로 적극 동참하지 않겠는가?
계시록 7장에 보면 구원받은 무리가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들 모두 ‘흰 옷’을 입고 있다(계 7:13-14). 그들이 원래 입고 있던 옷은 흰 옷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희게 되었을까?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성도의 썩은 내 나는 삶을 거룩하고 의롭게 만들기 위해 주님이 보혈을 흘리셨다.
그런데도 우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입는 것이 우리 선택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옛 삶을 그대로 입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 날마다 심령을 변화시키시는 성령의 역사에 철저히 무관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합당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우리는 성화를 선택으로 둘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때문에 흘리신 보혈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 죄의 옷을 입고 살 수 없다. 주님이 우리에게 새롭게 입히시기 위해 희생하신 가치를 생각하면 우리는 그 ‘흰옷’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