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
본문: 에베소서 6장 21-24절
설교자: 조정의
본문엔 “끝인사”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다. 네 구절의 비교적 짧은 문장을 통해 사도 바울은 로마 가택연금 기간 중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다(60-62년 사이).
보통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에 자기와 동역 중인 자들의 인사를 전하고(“문안하느니라”, 롬 16:21), 편지를 받는 이들 중 몇몇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며 ‘문안’할 것을 권유한다(“문안하라”, 롬 16:3). 하지만 에베소서에서는 “문안”이란 말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고, 동역자나 수신자 중 그 누구의 이름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일반적인 대상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인 “형제들”(23), “모든 자”(24)를 사용했다. 왜 그랬을까?
많은 학자들은 에베소서가 회람용 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러 교회에서 돌려볼 편지라서 구체적인 이름을 넣지 않는 것이 더 적절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유가 없진 않았겠지만, 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바울이 친필로 문안하는 것보다 더 믿음직스럽고 친밀하게,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문안해줄 대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편지의 전달자, 두기고다.
바울이 두기고를 통해 성도를 어떻게 문안하는지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하며 실천하도록 하자(롬 16:16).
1. 문안은 서로의 사정을 알게하는 것이다
엡 6:21a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엡 6:22a 우리 사정을 알리고
바울은 자기의 사정을 에베소 성도들에게 간절히 알리기 원했다. 이 짧은 편지에 ‘알리다’가 세 번이나 나온다(21x2, 22). 바울의 사정은 곧 그가 무엇을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와 동역자들(우리 사정)의 건강, 항소 과정, 가택연금 상태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또 열매를 거두고 있는지 등의 내용이다.
행 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이 자기의 모든 일을 알리는데 최고의 적임자는 바로 두기고였다. 그는 문안하기 위하여 특별히 보낸 사람이었다.
엡 6:22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여기 “그”에 해당하는 두기고를 바울이 어떻게 소개하는지 주목하라. 사랑을 받은 형제(골 4:9, 몬 1:1),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
엡 6:21b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사랑을 받은 형제라는 말은 그만큼 바울과 친밀하다는 걸 의미하고,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라는 말은 그만큼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맡겨진 일에 충성한다는 뜻이다. 생각보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동역자가 많지 않다. 친밀하지만 신실하지 못하거나, 신실한데 친밀하지는 않은 관계가 많다. 하지만 두기고는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형제이고 일꾼이었다.
그는 바울이 이방인 교회가 기쁨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하려고 헌금했을 때 이것을 모아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행했던 아시아 사람 중 하나다(행 20:4). 누가는 두기고와 함께 드로비모를 아시아 사람으로 언급했는데, 후에 드로비모를 에베소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볼 때 합리적으로 두기고 또한 아시아에 속한 도시인 에베소 사람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행 21:29).
그렇다면 두기고는 바울과 친밀했을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 성도 역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이상 사역했지만(행 20:31), 이 편지를 쓸 때쯤 그들을 떠난 지 7년이나 되었다. 하지만 두기고는 계속 에베소에 있다가 바울의 투옥 소식을 듣고 돕기 위해 로마로 건너왔으니 누구보다 바울의 사정을 친밀한 에베소 성도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무엇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일꾼이었다. 바울은 석방된 후 그레데 섬에 있는 디도 대신 그곳 교회를 돌보기 위해 두기고를 보내려 했고(딛 3:12), 두 번째로 로마에 투옥되어 죽기 직전에는 두기고를 다시 에베소로 급히 보냈다(딤후 4:12).
간단명료한 것을 넘어 평이해 보이는 21-22절의 설명은 우리에게 참 의미심장한 교훈을 남긴다. 사도였던 그가 돌봄의 대상이었던 에베소 교회에게 자기의 사정을 간절히 알리기 원했다는 것이다. 21절에 보면 “너희에게도”라고 말했다. 그들 외에도 골로새 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들에게 바울은 자기 사정을 알리기 원했다. 흥미롭게도 문안은 기도 요청과 함께 나온다(19-20절).
오늘날 성도가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힘든 기본적인 이유는 철저히 개인적인 삶을 살면서 서로에게 자기 삶을 알리지 않기 때문이다(벧전 5:14). 우리의 대화는 피상적인 것에 그치기 쉽다(날씨, 정치, 경제, 사회, 영화, 드라마). 우리는 약한 모습을 보여 괜히 밉보이기 싫어한다. 혹은 상대방이 혹시나 상처 입을까 극도로 예민하다. 자랑하는 자로 보이는 것도 싫고 섣부른 판단 거리가 되고 싶지도 않다. 내 사정을 남이 알 필요도 없고, 남의 사정도 딱히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5:15). 예수님은 주권을 가진 분으로 여전히 우리 주님이시고(23절), 우리는 그 주권에 기쁨으로 순종한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벧후 1:1). 하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종보다 더욱 친밀한 관계를 원하신다. 주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곧 주님의 사정을 알리심으로. 우리도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시는지 서로에게 알게 함으로(문안) 우리는 친밀해진다.
2. 문안은 서로를 진실로 위로하는 것이다
엡 6:22…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바울은 두기고를 에베소 교회에 보내어 자기 사정을 알리기 원했을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원했다(권하다, 4: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란 무엇인가? 우리 마음은 무엇으로 위로받기를 원하는가? 오늘날 ‘위로’는 공감과 인정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그랬구나’, ‘당신이 옳다’). 하지만 성경에서 위로란 예수님 안에서 약속된 소망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여 하나님 주시는 평안을 누리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도록 견고하게 붙들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 둔 성도의 믿음, 기쁨, 사랑, 평안에 참 위로를 얻었다. 두기고를 통해 주려 했던 위로 또한 같았을 것이다.
살전 3:7-8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몬 1: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요삼 1: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의 문안과 교제가 풍성해 보이는 자리에서 참된 위로는 주고받지 못할 때가 있다. 서로의 삶을 속속들이 나누고 맞장구치고 감정을 헤아리기도 하는데, 정작 그 공감과 교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안과 사랑과 믿음을 구하는 데까지 나가지 않을 때 그렇다. 많이 나눈 것 같은데 많이 누리지 못하는, 위로와 기쁨으로 채워지지 않는 교제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문안은 반드시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춰야 한다. 진리와 사랑. 성경적 가르침과 위로(내용과 목적).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근본적인 것부터 구체적인 것까지 체계적으로 가르쳤다(에베소서의 가르침을 보라). 삼 년 간 에베소에 있었을 때도 바울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전하여 가르쳤다(행 20:20).
그리고 바울의 가르침은 성도 사랑과 위로의 목적이 분명했다.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모든 겸손과 눈물”로 그들 가운데 행하였다고 말했고(행 20:19),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라고 당부했다(행 20:31). 편지의 마지막에서도 그는 두기고의 문안으로 성도가 진실로 위로받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기 원했다. 어떤 면에서 에베소서 편지의 모든 가르침을 통해 바울이 원했던 건 결과적으로 성도가 믿음 안에 굳게 서서 하나님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풍성히 누리고 사랑을 뜨겁게 실천하는 것, 곧 위로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 나눠야 할 문안의 분명한 목적이다.
3. 문안은 서로를 위하여 축복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다음과 같이 축복한다.
엡 6: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엡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 지어다
바울이 축복한 대상은 “형제들”이다. 형제자매 중 형제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이다. 변함 없이에 해당하는 단어는 ‘불멸’을 의미하기도 하는데(사라지지 않음),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진실하고 신실하게 사랑한다는 데 있다.
항상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진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넘어질 때도 많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여기서 바울은 그런 자들에게 “은혜가 있을 지어다”라고 축복했다. 한편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선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고 말했다(부정적 표현). 그만큼 주를 사랑하는 것이 영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에게 자연스러운 본성이고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신다. 구체적으로 어떤 은혜를 구하고 있는가?
23절을 보면 평안 그리고 믿음을 겸한 사랑을 구한다. 평안은 에베소서 전체에서 강조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평안)을 이루었다(엡 2:13-1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화목을 이루었다(4:3, “하나 되게 하신 것”).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고 서로의 하나 됨을 무너뜨리는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신고 있는 전투화 이름은 “평안의 복음”이다(엡 6:15).
믿음 또한 에베소서 전체에서 강조된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엡 2:8).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3:12). 성도는 같은 믿음을 공유하고(4:5),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다(4:13). 이 믿음을 흔들고 약하게 만드는 원수의 공격을 막는 방패의 이름은 “믿음의 방패”이다(6:16).
믿음과 강력하게 연결 된 것(겸한)이 사랑이다. 참된 믿음은 사랑을 낳는다.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은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낳았다(엡 1:15). 성도간에 평안을 누리고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은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한다(4:2). 한 몸인 교회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는 것이다(4:15-16).
바울은 평안, 믿음, 사랑이 계속해서 성도에게 있기를 구했다. 그런데 이것들은 누구로부터 오는가?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이다(23절).
하나님과 성도 간에 화목을 이루며 사는 데 반드시 필요한 평안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다. 이 평안이 회복하지 못할 깨어진 관계는 없다.
구원의 은혜를 받는 통로이자 구원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믿음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다. 이 믿음이 이기지 못할 대적이나 극복하지 못할 상황은 없다.
화목한 관계 속에서 믿음과 겸하여 흘러나오는 사랑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다. 이 사랑은 너무 크고 깊고 넓고 길어서 우리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참된 일을 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을 제공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항상 여러 성도를 위하여 이것들을 구해야 한다(18절). 성도에게 평안, 믿음, 사랑을 더 해주시기를 구하라.
안타깝게도 에베소 교회는 이 편지를 받고 약 30여 년 후에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을 받았다. 여러 가지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열심을 가졌지만, 처음 사랑은 사라진 것이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지극히 크신 은혜를 경험한 후 주를 향해 가졌던 첫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가? 어떻게 그 사랑을 회복할 것인가? 우리의 교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위로를 경험하고 주를 향한 진실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은혜의 방편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