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과 증언
본문 : 누가복음 2장 21~39절
설교자 : 최종혁
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어떤 일을 어떤 목적으로 하셨는지 알려 주는 것입니다. 누가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모습을 자세히 비교하며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메시아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 우리가 살펴볼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선지자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앞서 등장했던 베들레헴의 목자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었던 것과 달리, 이들에 대한 설명은 꽤 자세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이들이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증인은 믿을 만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그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부모가 어떤 사람들이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란 이들이 약혼한 사이였으며 현대적 관점으로 결혼한 부부나 마찬가지였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행동을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22),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23),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24),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27),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39).
이 말씀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무언가를 했다는 점입니다. 형식적이고 의무적이 아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에 대하여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임신한 것이 드러난 마리아를 데려옵니다. 그는 사려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에 대해서는 누가복음을 통해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이자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주의 종이오니 그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의 노래를 보면 그녀가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긍휼을 입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다수는 마음으로나 삶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던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가랴, 엘리사벳, 요셉, 마리아가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모습으로 아기 예수가 누구인지를 증언합니다.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21).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할례를 행했다는 말조차 없이, 이 아기의 이름이 예수가 되었다는 것과 천사가 그들에게 알려 주었던 것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요셉에게도 천사가 나타나서 동일하게 말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예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름이고 부부는 이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이 이름은 사실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입니다(‘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 지난 말씀에서 천사가 목자들에게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말했습니다.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던 그 하나님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 예수입니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 드문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이 이름에는 하나님께 구원을 바라는 부모들의 소망과 기도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에 온 이 아기의 이름은 앞으로 이뤄질 역사에 대한 예언의 이름이자,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삽니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하나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습니다. 이 말은 진정한 구원자라면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구원자로 오셨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은혜로운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자가 난 자중에 큰 자라는 평가를 받은 자였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자가 필요한 죄인이 아닙니다. 바로 그분이 구원자, 하나님이십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낳은 지 8일 된 아기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천사를 통해 이 아기가 놀라운 구원자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들 품안에 있는 구원자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했습니다.
이제 아기를 낳은 산모의 정결예식과 장자에 대한 의식이 언급됩니다. 이 의식에 대한 순종의 모습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부모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22). 여기서 나오는 정결예식은 레위기 12장에서 기록되었으며 산모에 대하여 치렀던 예식이었습니다. 남자 아기를 낳으면 7일 동안 부정한 것으로 보았고 태어난 지 8일 째 되는 날에 할례를 치렀습니다. 태어난 이후로 33일이 되는 때까지도 산모는 예배하러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40일이 지나야 비로소 산모는 성전에 가서 정결예식을 치르고 회복이 되었습니다. 여자 아이의 경우는 그것의 2배의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기간이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산모를 일정한 기간 동안 보호하시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산모인 마리아를 위한 정결 의식을 행하러 가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순서상으로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22) 뒤에는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24)가 이어져야 자연스러운데, 그 사이에 23절이 등장합니다.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23). 이 말씀은 장자의 대속의식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로 이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첫째 이유였습니다.
사실 마리아의 정결예식이라면 온 가족이 갈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장자의 대속의식이라면 장자를 굳이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저 은으로 5세겔을 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모는 여기서 조금 특별한 일을 합니다. 율법에서 말한 것 이외의 일을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별한 아기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기를 주께 드리고”(23)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들은 정결예식의 때를 기다려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모습은 사무엘상에서 한나와 그 남편이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로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육하였을 것이지만 동시에 자기들 품안에 있는 아들이 자신에게 속한 아기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첫 남자아기이기에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진실로 거룩한 이였고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대속할 거룩한 이가 바로 그들의 아기였습니다. 이 아이를 위한 속죄제물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모든 이를 위한 속죄제물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드렸던 수많은 제사들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었던 하나님의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예수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에 따라 모든 일을 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태어나셨기에 할례를 받으시고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순종하심으로 그 의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일만을 하신다면, 이렇게 아기로 오셔서 30년을 사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33년을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사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율법에서 요구하는 모든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그의 의를 전가시키신 것입니다. 부모는 모든 일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순종의 행위를 통해 증언한 것은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하나님, 죄가 없으신 하나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 시므온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는 구약의 성도로서 의로운 사람,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사가랴, 엘리사벳, 요셉,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메시아를 기다리던 구약의 성도였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셨다”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특별한 일을 하실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시므온의 삶에 성령님이 함께 하셨고 특별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시므온이 말하는 것은 그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이었습니다.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26).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를 눈으로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 한 사람에게 이러한 계시를 주셨다면 어떨까요? 그 계시를 들은 뒤에 어떻게 살겠습니까? 아마 매일같이 성전에 가서 누가 그리스도일까를 궁금해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마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시므온의 삶은 시련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힘들고도 한편으로는 기쁘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27) 성령님께서 나타나셔서 시므온을 감동시키셔서 성전으로 들어가게 하셔서 예수님의 부모를 만나게 하십니다. 아기 예수를 시므온이 만났습니다. 드디어 메시야를 보게 되었습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28) 그동안 기다려왔던 구원자를 자신의 품에 안고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이 놀라운 특권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찬양했을 것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9-32). 시므온은 그 약속이 이제 이뤄진 것을 알았습니다. 긴 세월을 살아왔던 모든 고난과 어려움이 이제는 끝날 것을 알았습니다. 평안히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므온은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말했지만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능력을 발휘해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이신 것도 부활하신 것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봤던 것은 이제 낳은 지 40일된 조그만 아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를 보면서 여러 많은 아기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할 메시야가 자신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이 하나님의 구원을 본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토록 보고자 했던 이스라엘의 위로를 자신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31) 하나님의 구원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부터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계획을 창세전에 세우셨습니다. 구약의 말씀들을 통해 계속 말씀하시고 준비하시며 차근차근 이뤄오셨습니다.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32) 이 하나님의 구원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 구원 계획을 세우실 때부터 모든 사람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이사야가 여러 차례 예언한 것입니다.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6-47). 예수님은 이제 태어나셨지만 모든 사람에 대한 구원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구원은 영적인 의미에서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경제적인 구원자라면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은 그 구원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적인 구원자라면 건강한 사람은 그 구원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필요로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자리에 피조물을 두고 조금씩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연적으로 그런 모습으로 태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구원이 필요합니다. 모두에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구원자를 보내셨고 시므온은 예수님을 안고 있고 이가 바로 구원자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33)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기에 부모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특별히 시므온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은 예언을 합니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34-35). 시므온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 그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말합니다. 시므온이 말한 것은 예수님 때문에 누군가는 망하게 되고 누군가를 흥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흥해야 하는 것이고 이방인은 대부분이 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스라엘 중에서도 망하는 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비방의 대상이 될 것이고 이것이 마리아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아픔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6-8).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5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들의 구원자를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원했던 구원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구원자, 자신들의 병을 고쳐줄, 잘 먹여줄 구원자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첫 번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는 시므온의 예언을 통해 사람들의 거절이 예상 밖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 이들의 거절을 통해 하나님이 영혼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이루신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아입니다. 유대인으로 오셨지만 그들만의 구원자가 아닌 만민의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어떤 자들은 구원을 받지만 어떤 자들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36). 안나, 한나라는 이름의 뜻은 ‘은혜’라는 뜻입니다. 시므온보다는 조금 구체적인 설명인데, 그녀는 아셀 지파의 후손이었습니다. 안나는 선지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자였습니다. 안나는 나이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36-37). 그녀는 매우 긴 시간을 혼자서 보냈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을 안나가 과부로 지내면서 했던 일이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입니다. 안나는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로 삼아 성전에 머물면서 기도하고 금식하는 일을 했습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38) 시므온이 예수님을 만나 찬양하고 마리아에게 주의를 주었던 그 때 안나가 나와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쁜 마음으로 전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 ‘죄가 없는 거룩하신 분’, ‘참된 위로와 안식을 주시는 그리스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자’, ‘만민을 위한 빛’,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은 거절하거나 받아들이거나 두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중간 어디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교회에 나가고, ‘살면서 종교 하나쯤은 있어야’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하면 천국에 가지 않을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지금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는 다른 의미에서는 분쟁과 분리를 가져옵니다. 세상과 내가 평화를 누리고 화목하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과는 평화를 누리실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기 원하신다면 세상을 거절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자 예수님에게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다른 의미에서의 구원자를 찾고 계십니까. 믿으면 사업이 잘 되고 자녀들이 잘 크고 건강이 좋아지는 구원자를 찾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잘못된 메시야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메시아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먼저 영혼을 구원하시는 구원자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줄, 영혼의 문제를 구원해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줄 구원자를 찾고 계시다면 그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성경 속에 있습니다. 그 예수님께 나오셔서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