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
본문: 로마서 3장 21-22절 외
설교자: 최종혁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말 그대로 우리에게 있어 정말로 좋은 소식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다. 문제는 우리가 이미 죄인이어서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미 창조주 하나님만큼 높아져있는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내가 이 관계에서 문제를 만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전적으로 잘못을 인정해야만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나님이 내 삶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도움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내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맞춰야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인 것이다.
복음의 대적인 사탄은 그런 상황을 잘 이용한다. 그래서 복음을 완전히 부정하며 거부하게 만들기도 하고 복음을 조금씩 왜곡하기도 한다. 그런 속에서 우리도 알게 모르게 복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인다. 복음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분명한 관점이 아니라 모호한 관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복음의 목적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두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것을 복음으로 착각한다. 뭔가 나에게 좋은 일이 있으니 복음처럼 들리는 것이다. 계속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거기서 멈추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바라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러면서 그것을 괜찮다고 하는 것이 문제다.
다윗의 시인 시편 103편을 보면 이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볼 수 있다. 시편 103편을 보면 하나님의 “모든 은택”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죄악을 사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는 것 등이 언급된다. 다윗은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말한다(시 103:2). 하지만 다윗은 그 “좋은 것” 자체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래서 그 모든 좋은 것을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며 긍휼히 여기심의 결과라고 말한다. 하늘의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먼지 같은 우리를 기억하고 인자하심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한다.
때로 선물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높이는 경우가 있다. ‘내가 이정도 선물은 받을만하지’, ‘난 이정도 선물은 받아야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통해 자신의 위치와 하나님의 위치를 더욱 분명히 깨달았다. 그래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로 시작한 이 시편을 이렇게 마무리 한다.
시 103: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다윗은 구약의 사람이었지만 복음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의 끝에는 하나님만이 홀로 계셔야 한다. 그 어떤 다른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둔다면 그것은 참된 복음이 아니다. 선하고 좋은 것일수록 오히려 주의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시작에 죄의 문제를 두지 않고 복음을 말하는 경우도 많다. 삶의 고통, 괴로움, 외로움, 상처, 불안감, 갈등과 같은 죄의 결과들을 강조하다보면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 죄의 피해자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당연히 예수님은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런 지금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분 정도가 된다.
성경은 “당신은 죄인이고 그래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듣는 사람이 이를 불쾌하게 여긴다고 해서 이 부분을 건너뛰면, 성경의 복음은 불필요한 것들만 남는다. 믿음이나 회개도 필요하지 않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필요하지 않다. 특히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을 제멋대로인 심술궂은 신으로 만들어 버릴 뿐이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도 그저 지금보다 나은 삶이 될 뿐이다. 어차피 지금도 살만한 삶이긴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죄의 결과(증상)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복음은 죄의 증상을 약화시키는 증상완화제가 아니라 죄를 완전히 제거하는 치료제다.
이런 분명한 복음의 진리를 모호하게 받아들이면 성도라도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 또한 불신자는 참된 복음을 듣지 못하고 구원 받았다는 착각만 하게 된다.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은 하는데 그 구원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인지, 무엇을 통해 구원을 받은 것인지, 무엇을 위해 구원을 받은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결국 이 모든 모호함은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계시지 않고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다. 하나님의 자리는 낮아져 있고 사람의 자리는 높아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 없다고 하거나 혹은 우리가 그 구원에 스스로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수단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호함으로도 이어졌다. 예수님을 불필요한 분으로 만들거나 혹은 필요할 수도 있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 분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데 있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사역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12월, 3만명이 모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산상수훈에 따라 사는 사람들(심령이 가난한 자들, 마음이 청결한 자들, 삶의 고난을 사랑으로 견디는 자들 등)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교황이 의도한 의미는 의롭게 사는 모든 사람들,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모른다고 해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어도 마음을 다해서 의로운 삶을 살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는 2013년 5월에 했던 설교에서 더욱 분명하게 같은 믿음을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주님은 우리를 그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고, 우리는 주님의 형상입니다. 주님은 선행을 베푸셨고, 우리 모두에게도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말라는 명령을 마음에 새겨놓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부님 이 사람은 카톨릭 신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말합니다. ‘아니요, 그는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두란 카톨릭 신자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두를 의미합니다. ‘모두라뇨? 신부님 여기엔 무신론자들도 포함됩니까?’ 맞습니다. 무신론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통해 만나야 합니다.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선을 행한다면 우리는 저곳에서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라는 말보다 훨씬 듣기 좋은 말이다. 심지어 자신의 종교를 믿지 않아도 상관 없다고 말하니, 이보다 더 열린 자세가 없다. 교만하거나 교조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그저 힘들더라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라는 격려의 말만하면 된다. 예수님은 그런 삶을 가르치고 보여주신 좋은 선생님이 되실 것이다.
가톨릭에서만 복음이 이렇게 바뀐 것이 아니다. 이미 여러 차례 지적했던 것처럼 개신교 교회들도 점점 복음을 모호하게 말하고 있다.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강요 속에서 여전히 예수님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여전히 예수님이 ‘최선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기를 꺼려한다.
복음전도자로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는 1997년에 로버트 슐러 목사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빌리 그래함 목사, “저는 전세계의 크리스천 그룹뿐 아니라 크리스천 그룹 밖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거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실을 의식적으로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상관없이,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 이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 이름을 위한 백성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해 세상에서 백성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들은 무슬계에서 불교계에서 혹은 기독교계에서 아니면 불신자의 세계에서 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기에 그리스도 몸의 지체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알지도 못할 수 있지만, 그들 마음 속에서 자신들에게 없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이 가진 유일한 빛으로 돌아섭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구원 받은 것이고 우리와 함께 천국에 있게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해, 무엇을 믿든 혹은 아무 것도 믿지 않든 자신의 결핍을 깨닫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이 발언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논쟁하고 있다. 대담을 진행했던 슐러 목사는 그래함 목사의 발언에 대해서 이렇게 되물어 의도를 확인했다. “제가 듣기로는, 어둠 가운데 태어나서 성경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마음과 영혼, 삶 속으로 들어오실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나요?”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빌리 그래함 목사는 맞다고 긍정했다. 그리고 슐러 목사는 “굉장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이런 광대함이 있다는 말씀에 정말 흥분이 됩니다.”라고 화답했다.
빌리 그래함 목사에 관한 진실이 무엇이든, 최소한 이 대담에서 한 말은 절대로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다. 앞선 교황들의 말이나 여기 빌리 그래함 목사의 말이나, 듣기 좋고 하기 좋은 말이다. 표현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결국 누구나 열심히 살면 구원 받고 천국에 간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 말은 예수님을 불필요한 분으로 만든다. 예수님도 구원에 이르는 한 길이 될 수 있지만, 유일한 길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쉬운 길도 아니다. 좁고 어려운 길이다. 하나님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이미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또 다른 길을 그것도 더 어려운 길을 제시하신 것 뿐이라는 말이 된다. 그것은 절대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죄악된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우리를 높여서 만들어낸 거짓 복음일 뿐이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께 닿을 수 있다는 우리만의 바벨탑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이다. 이 진리에 대한 성경의 선포을 먼저 살펴보고 그리고 성경의 설명을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 성경의 선포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더라도 나름 최선을 다해 양심에 따라 선한 삶을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의 죄악됨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혹은 의도적으로 부인하거나 왜곡해야) 가질 수 있는 생각이다. 성경은 그렇게 사람이 ‘자연적’으로 구원 받을 수는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사람은 자연적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
이미 로마서 1:19-20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살펴 봤었다.
롬 1: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것을 ‘자연계시’ 혹은 ‘일반계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반적인(구체적이고 분명한 것은 아님) 사실을 피조물을 통해서 드러내시기 때문에 붙어진 이름이다. 하지만 로마서는 일반계시를 통해서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일반계시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핑계할 수 없다고 선언할 뿐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기 때문이다(21절).
이것이 사람의 ‘자연적인 상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내버려두셨을 때 사람은 점점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돕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공동체를 만든 것이 아니라, 본인들 조차도 싫어하는 죄가 가득한 공동체를 만들었다. 물론 여전히 하나님의 일반 은혜로 사람은 항상 가장 악한 일만 골라서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역사가 증언한다.
교황은 자연 상태의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단언하지만, 성경은 정확히 그 반대를 말한다.
롬 3: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여기 11절의 표현을 유심히 봐야 한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할 수도 없고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에 속한 사람, 즉 자연 상태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알 수도 없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선을 행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여기서 말하는 죄는 과녁을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죄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도 우리는 잘못된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우리는 사람이 열심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게 잘 안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과녁의 한가운데를 맞추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8, 9점을 맞추고 있는 그림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죄인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과녁판을 본다면, 정중앙을 맞추지 못한 화살로 빼곡한 것이 아니라 어떤 화살로 박혀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과녁을 맞추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냥 내고 쏘고 싶은 곳으로 화살을 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람의 자연적인 상태다.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할 때 성경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다. 에베소서 2:1에서 바울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자연 상태의 사람의 모습을 묘사했다. 죽은 것이다. 영적으로 죽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사람은 자연적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
어쨌든 하나님을 알고 믿으면 구원 받는 것도 아니다
때로 사람들은 어쨌든 세상을 창조한 초월적 존재인 신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너무 편협된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세상을 만든 신의 존재를 (그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든, 하느님이라고 부르든, 알라라고 부르든, 브라흐마라고 부르든 상관없이) 어떻게든 믿는다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빌리 그래함의 경우가 이런 경우로 보인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성경은 분명한 답을 주고 있다.
롬 9:1–5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바울은 자신의 형제인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하여 애타는 마음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든 특권을 다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을까? 당연히 믿었다. 한 분이신 하나님,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그들은 믿었다. 그런데, 그것이 곧 그들이 구원 받았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로마서 10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다.
롬 10:2–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어떤 열심도, 아무리 그 열심히 순수한 것이라고 해도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그 모든 열심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아니면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의 열심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다른 열심에 대해서도 답은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빌리 그래함의 표현처럼 자신이 가진 유일한 빛으로 돌아선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 빛이 하나님께서 비추신 빛,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아니라면(고후 4:6)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어떻게든 우리는 자연적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우리에겐 초자연적인 역사가 필요하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우리가 스스로 개척할 수 없다. 초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이, 그 유일한 길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성경은 선포한다.
요 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우리 입장에서는 여전히 어떤 의문이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의 선포하고 있는 진리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말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말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은 거짓 복음이다. 죄인인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의로우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된 사람과 의로우신 하나님의 관계를 본래대로 회복시키실 수 있다. 죄인인 나와 의로우신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전혀 오해의 여지를 주지 않고 분명히 말한다.
나의 죄와 하나님의 의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해답이 되실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길이 되셨는지를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 성경의 설명
하나님과 우리 사이 관계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죄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의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불의하다고 해도 하나님도 불의하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롬 1:18).
사실 이것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끝날 수도 있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과 즐거운 교제의 관계를 누리기 원하셨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반역하여 죄를 범했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심판하셔서 사람을 멸하셨다’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역사는 그냥 끝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나타내 보이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 바로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의 의는 여전히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하고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이르러야 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보여 주셨다. 율법은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형벌을 요구했다. 구약에 계속해서 드려졌던 제사는 사람이 율법을 통해 절대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데(롬 2:13), 사람들은 오히려 율법을 범하는 범죄자가 되어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롬 2:12). 한 두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었다. 누구도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실패한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고 따라서 모두가 자기 죄에 대한 형벌로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3:20까지의 상황이다. 절망적인 어둠이다.
그런 절망적인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들에게 빛이 비추었다.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1절은 “(그러나) 이제는”으로 시작된다. 최악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반전을 기다린다. ‘그러나’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의로울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그 반전이 나타났다(어근 “빛나다”). 아침 해가 어둠을 몰아내듯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다. 22절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21절은 이렇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을 언급한다.
첫째는 그것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그러나’를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 죄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을 한 골짜기로 인도하셨었는데, 그곳에는 아주 말라버린 뼈가 가득했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물으셨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겔 37:3) 불가능한 일이다. 방금 죽어서 겉보기에는 그냥 잠자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다시 살아날 수는 없다. 하물며 이미 시간이 지나서 뼈만 남았고, 그 뼈조차도 완전히 말라버린 상태라면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너희가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뼈들은 살아났다.
하나님은 이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상태와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이 모습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마른 뼈는 반전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나’를 말할 수 없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가 바로 그런 마른 뼈와 같아서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러나’를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다. 우리가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우리가 찾아낸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21절의 “나타났다”라는 표현에서 마치 ‘자연히’ 혹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25-26절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음을 강조한다(주어이신 하나님, “세우셨으니”, “나타내려 하심이니”, “나타내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것이다.
둘째는 그것이 “율법 외에” 나타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의가 구약의 율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그 율법을 지키는 것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의미다.
조금도 관계가 없다. 누군가는 율법의 1%를 지켰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50%쯤 지켰을지 모른다. 불가능하겠지만 혹 어떤 사람이 율법의 99%를 지켰다고 해도, 그것은 지금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율법을 어느 정도는 지켜야했던 것이 아니다.
셋째는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지금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는 어느날 갑자기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이미 말씀한 것이라는 말이다. 율법으로 하다가 안되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다가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다. 구약의 율법을 비롯한 모든 것들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 먼저 주어졌던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인 사람을 의롭다고 하실까?
롬 3:23–2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의는 사람이 의로워야 할 것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세워져야 할 것을 요구한다고 앞에서 언급했다. 하나님께서 그냥 사람의 죄를 없는 셈칠 수는 없으시다는 말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절대 죄인을 의롭다고 하실 수 없으시다.
어찌보면 딜레마처럼 보이는 상황이지만, 26절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그 두 가지 일을 하셔서 딜레마를 해결하셨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죄인의 죄에 대한 진노의 형벌을 예수님에게 쏟으셨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셔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게 하셨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이 말씀들이 좀 이상하게 들려야 한다. 공의가 무엇인가?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말씀들은 하나 같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받으셨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맞는 것 아닌가.
이론적으로 맞는 얘기지만, 지금껏 살펴봤던 것처럼 죄인인 우리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반역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우리 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대속’(대신 죄의 값을 치르는 것)의 원리를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이미 말씀하셨다. 처음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죄를 세상에 들여온 아담과 하와가 첫 죽음의 대상이 되어야 했지만 다른 짐승이 죽은 것이다. 이미 그때부터 하나님은 죄인을 위한 대속의 그림자를 보여주셨던 것이다.
대속의 그림자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숫양을 번제로 드린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출애굽 때 장자를 대신하여 양이 죽었던 것도 이런 대속의 그림자였다. 가장 선명한 그림자는 레위기에 기록된 제사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 로마서 3:24-26은 바로 그 제사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이다.
일반적인 번제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레위기 1장), 죄를 지은 사람은 흠 없는 짐승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와야했다(3절). 죄 있는 존재가 죄 있는 존재를 대신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 흠 없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하여(4절) 자신의 죄를 이 번제물이 대신 담당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그 번제로 드려질 짐승을 잡아야 했다(5절). 죄에 대한 형벌이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제사장이 대신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렇게 해야했다. 이 죄의 형벌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제사장은 그 죽은 짐승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그 짐승을 전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려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9절).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그렇게 세워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 짐승의 제사 역시 그림자이지 실체는 아니었다.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다. 짐승의 제사는 실제로 죄를 없이 하지는 못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만 가능했다(벧전 1:19). 하나님은 예수님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의롭다 하신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유일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제물이시다.
예수님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이 땅에 오신 구원자시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미 이렇게 예언했다.
사 53:4–7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셨다. 우리 대신 찔리고 상하셨다.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으셨다.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셨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잠잠히 기꺼이 그 모든 고난을 견디시고 죽으심으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 막았던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죄인인 사람이 의로우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그 길이, 그 유일한 길이 열린 것이다.
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큰 교만이며 또한 이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예수님의 이 모든 희생을 아무런 의미 없는 죽음으로 만들 뿐이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사랑을 보여주신 것 아니냐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형벌을 받았느니하는 말을 해야하냐고 따진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 맞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바다에 뛰어 들어서 증명해 볼게라고 말하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사람의 만용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바다에 뛰어든 것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로 영원히 멸망 받아야 하는 나에게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결론
오늘날 교회가 비판을 받는 가장 큰 이유를 꼽아보라면 도덕성과 배타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도덕성에 대해서 교회는 할 말이 없다. 교회의, 특히 교회의 인도자들의 도덕적 타락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성경에서 분명히 죄라고 말하고 있는 탐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재물에 대한 탐욕이든, 성에 대한 탐욕이든, 명예나 인기에 대한 탐욕이든, 이런 죄로 인해 세상에서도 비난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전이자 신부인 교회에게 있어 너무나 치명적이다.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하지만 진리의 배타성은 다른 문제다. 진리가 배타적이어서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고 해서 그 배타성을 제거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듣기 좋게 진리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반대로 하고 있다.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는 회개하지 않는다. 그런데 진리의 배타성에 있어서는 관용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복임이며 구원의 길임을 선포하지 못한다.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어쨌든 열심히 선하게 살기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역사를 통해 순교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헛되게 죽은 것이다. 괜한데 목숨을 바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예수님도 헛되게 죽으신 것이 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만이 우리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할 복음이다. 이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고전 1:18–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부정하거나 왜곡하여 하나님을 어리석고 약하신 분으로 만들지 말라. 오히려 그런 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날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