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와 함께하는 자
본문 : 누가복음 11장 27~32절
설교자 : 최종혁

누가복음에서 본문의 위치는 분량상 중간, 예수님의 생애 기준으로는 사역의 끝자락으로 십자가를 몇 달 남겨두지 않는 시점입니다. 지금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는 중이며(9장) 얼마 후면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소리칠 것입니다(19장), 또 잠시 후면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23장). 이스라엘 민족 전체로 봤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서는 최종적으로 거절했습니다.

이런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바리새인, 서기관, 율법교사, 제사장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하나의 종교로 강등시켰습니다. 이들을 대변하는 단어는 외식과 위선, 그리고 자기 의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기준을 낮췄습니다. 그들이 결국 추구한 것은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이들은 예수님을 거절했고, 예수님도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왜 온유하고 겸손하고 너그러우신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들만 죄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재산을 사실상 도둑질하던 세리도 죄인이었고, 자신의 몸을 팔아 살아가던 창기들도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만 어떤 면에서는 가혹하다고 할 정도의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이들이 민족의 지도자로서 가지고 있는 책임이 너무나 중요했다는 것이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큰 이유는 그들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그래서 구원 받아야 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선포하셨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죄인이 아니라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데, 스스로 병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의사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던 많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난 시간에 비유로 하신 말씀이 바로 이들의 문제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청소하고 수리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했던 것은 더 깨끗해진 것이 아니라 귀신이 더 들어오기 좋은 환경을 만든 것뿐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종교적, 도덕적 노력은 그들을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끈 것이 아니라 더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눈이 보지 못하고 귀가 듣지 못하여 자신들이 진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견고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들과 같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완고함은 예수님에 대한 적극적인 거절로 드러날 수도 있지만, 종교적 혹은 도덕적 행실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방법으로 의를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자들에게 주는 예수님의 은혜의 말씀이자 경고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먼저 누가 복이 있는 자인지 말씀하시고 다음으로 이 복을 거절하는 자들의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1. 함께 하는 자의 복(27~28절)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이 본문은 앞의 본문과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셨고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세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첫 번째로 놀랍게 여겼고 두 번째로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모욕했으며 세 번째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시험했습니다. 이 세 가지 반응에 대해서 예수님도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의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은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셨습니다. 그저 그들의 생각에 대한 논리적 반박을 넘어 예수님은 그들의 상태가 앞서 귀신 들린 자보다 더 심각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세 번째의 경우에 대해서 말씀하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에서 한 여인이 소리칩니다.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이 여인은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을 했습니다. 당시의 문화는 남녀가 섞여 있는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은 대부분 잠잠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누구도 입을 떼기 어려운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이 여인은 다수의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예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쉽게 바꾸면, ‘당신 같이 위대한 분을 낳은 사람은 정말 복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을 때,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다(눅 1:42)’고 선포했고, 마리아 자신도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 1:48)’고 찬양했습니다. 메시아의 육신의 어머니가 된 것만으로 마리아는 큰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의 찬사는 궁극적으로 마리아보다는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복 있는 사람일 만큼 당신이 위대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그분의 지혜로운 말씀에 놀랐고, 그 순간 그 마음에 있는 말을 밖으로 꺼낸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놀랍게 여기는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말이 맞다, 그런데’ 정말로 복이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의 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복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특권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반응을 사용하셔서 보다 궁극적으로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누가복음 8장 21절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눅 8:2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예수님께서는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로 말씀하셨었습니다. 이들은 좋은 땅입니다. 땅에 떨어진 씨가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들이 없는 땅입니다. 딱딱해서 씨가 뿌리도 내리지 못한다거나, 바위 위에 있는 얇은 흙이어서 금방 말라버리지도 않습니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아 자라지 못하는 땅도 아닙니다.

완고하지 않은 마음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만 듣고 피상적인 기쁨이나 감정적인 만족만 추구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우선순위에 다른 것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듣고 순종할 준비가 된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런 밭에 씨앗이 떨어지면 씨앗은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뿌리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을 반대했던 자들의 마음 상태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재해석하고 그것이 율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 마음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었고 재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가장 복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천국문의 손잡이를 손으로 잡고 있으면서도 열고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나 형제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복 있는 자들이 바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된 자들입니다. 마음의 완고함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은혜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기꺼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진정 복 있는 자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1-13)”

이 말씀이 얼마나 귀합니까! 우리는 진정한 복을 얻기 위해 예수님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되어야할 필요도 없고 예수님의 형제들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살아서 그분을 직접 경험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이스라엘에 가서 무슨 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산에 들어가서 수행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헌금을 얼마이상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내려놓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고, 그 말씀에 따르면 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고, 진정 복 있는 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 함께 하지 않는 자의 결과(29~32절)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람들은 더 많이 모여 들었고, 잠시 멈췄던 예수님의 말씀은 다시 이어집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듣는 자들의 죄에 대한 결과로서의 심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사람들의 세 번째 반응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표적, 특별히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무언가 더 굉장하고, 웅장하고, 압도적인 것을 원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뿐 아니라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불가능한 일들을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각종 질병에 걸린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즉시 나았습니다. 보지 못하는 자, 듣지 못하는 자, 말하지 못하는 자, 걷지 못하는 자들이 장애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걷기도 하시고, 5000명이 넘는 사람을 어린 아이의 도시락 하나로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얼마나 더 굉장한 표적이 필요했을까요?

예수님은 그 세대의 사람들에 대해서 “악한 세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표적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범한 다른 많은 죄를 두고 왜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악한 일이라고 하셨을까요? 표적을 구한 일 자체가 죄라기 보다는 그런 행위가 보여주는 그들의 마음 상태 때문입니다. 이미 충분히 보여진 표적과 전해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 밝히는 것처럼 그들이 표적을 구한 의도는 보고 믿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이적들, 그분의 놀라운 말씀, 그분의 겸손한 성품에도 이들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최후의 판결은 ‘악한 세대’입니다.

‘악한’은 ‘(눈이) 나쁘다’(34절)는 같은 표현입니다. ‘나쁜, 해로운, 쓸모없는, 무익한’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본래의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도덕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악한’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사탄에 대해서 ‘악한 자’로 표현합니다(마 13:19; 살후 3:3; 요일 2:13 등). 창조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난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고 악한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이었고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악한 자들이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판결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이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지도자들 중에서도 예수님께 겸손히 나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그들은 악한 세대였습니다. 소수가 아닌 다수가 믿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이들은 믿지 않으려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표적을 보여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어떤 표적을 요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표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다른 상황에서 하신 비슷한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의미하셨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요나서는 여러모로 성경에서 독특하고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서 도망하는 모습은 흔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사람들이 회개했을 때 오히려 화를 내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요나서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요나가 오히려 이방인 같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처럼 그려져 있는 흥미로운 책입니다.

사실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건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다른 곳으로 도망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게 하셨고, 풍랑의 원인을 찾던 선원들에게 요나는 자신이 원인임을 말하며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어떻게든 육지에 닿으려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자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고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그리고 삼 일 후에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냅니다. 그 후 하나님은 다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고, 이번에는 요나가 순종합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니느웨가 40일이 지나면 무너질 것이라고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왕부터 그 땅의 모든 사람 심지어 짐승까지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고 심판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요나에게 일어난 일은 누구도 직접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그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설명했을 수 있지만, 실제로 증명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요나는 그저 어느 날 자기들의 도시에 와서 이 도시가 무너질 거라고 소리치는 한 낯선 외국인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던 도시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만 십이만여 명이 되는 큰 도시였습니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를 아주 어린 아기들로 생각하면 최소한 50만 명 이상이 살던 대도시였던 것입니다. 당시 니느웨는 앗시리아의 수도로서 매우 강성한 도시였습니다. 안정과 풍요를 누리고 있던 그들이 요나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말을 믿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요나의 전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욘 3:5)). 그들에게 더 이상의 표적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요나가 그들에게는 충분한 표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예수님은 요나의 경우가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서 보여준다고 하십니다. 요나가 확실한 죽음(최소한 그를 바다에 던진 선원들이 생각할 때는 실제로 죽음을 경험한 것)에서 살아 돌아온 것처럼, 예수님도 죽음에서 살아 돌아 올 것입니다. 그 기간도 3일로 같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고 또 부활 후에도 선포하실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차이는 있습니다. 요나는 실제로 죽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실 것입니다. 요나는 불완전하게 하나님을 말씀을 전했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던 것보다 훨씬 더 분명한 표적이 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가장 분명한 표적입니다.

그럼, 유대인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표적을 보고 듣고 회개한 것처럼 이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들을 때에 회개했을까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귀신의 왕을 힘입어 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그들 나름의 그럴 듯한 설명을 만들어 냈습니다(“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마 28:13)). 그리고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습니다(마 28:15). 믿으려고 하지 않으니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이들의 거절의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의 구약의 두 사건을 들어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완고하고 악한지를 말씀하십니다. 두 사건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하리니”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뒤에서 말씀하실 남방 여왕이 한 일과 이 세대의 사람들이 하는 일이 대조되어 그들의 죄악을 더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남방 여왕’은 열왕기상 10장에서 솔로몬을 찾아왔던 스바 여왕을 말합니다. 오늘날의 예멘 지역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남서쪽에 위치해서 이스라엘에서 봤을 때는 남쪽의 땅끝입니다.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풍요로움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것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솔로몬을 찾아 왔습니다. 실제로 솔로몬이 한 일과 그 지혜를 확인한 후(왕상 10:6), 여왕은 이 모든 것이 솔로몬 본인이 아닌 그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왕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왕상 10:9)” 이 스바 여왕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이런 찬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정말 많은 노력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굳이 그것을 확인하려고 그 먼 길을 가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진리를 찾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 갔고 마침내 진리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는 이들은 어떻습니까? 이들 앞에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더 큰 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보다 훨씬 더 큰 지혜, 사실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바로 그 지혜의 근원이 그들 앞에 있었습니다. 멀리 있어서 그들이 찾으러 가야 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분께서 그들을 찾아 오셔서 ‘여기’에 계셨습니다. 그들 눈앞에서 지혜의 말을 쏟아 내고 계셨고 표적을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떤 핑계도 댈 수 없습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비슷한 논리로 예수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예를 드십니다. 그들을 찾아 왔던 선지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요나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이 회개했을 때 분노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와서 전한 말을 듣고도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습니다. 그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삼 일을 있다가 나왔다고 말하는 것 외에 그들이 요나의 말을 믿을 만한 것이 없었음에도 그들은 요나를 믿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간절하게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셨던 분입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셨고, 죄의 결과로 고통받는 모습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와도 같지 않은 권위 있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이 믿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했을까요?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들 자신의 겸손한 마음일 뿐이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그들은 그들이 멸시하고 지옥 불을 태우는 연료라고 비난했던 이방인들에게 오히려 정죄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은혜의 경고입니다.

오늘 설교의 서두에서 복이 있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각자에게 행복을 주는 것들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행복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들에게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 복이 없으면 다른 모든 복은 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그녀는 분명 복이 있는 자일 것입니다. 세상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사실 많은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직접 듣고 능력의 역사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유대인으로서 약속의 자손들이었고 구약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복은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복은 더 큰 심판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을 거절하는 많은 유대인들의 경우처럼 더 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많은 기회를 얻었던 자들에게 더욱 엄중한 심판이 임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눅 10:12~14).

여러분은 정말 복이 있는 자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입니까? 만약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결코 가볍게 듣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구원에 대한 모든 것을 드러내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부분적으로 알고 구약의 말씀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눈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언가 더 믿을만한 것이 있으면 믿겠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표적을 구했던 유대인들이 그 불신 때문에 이방인에게 정죄를 당하는 것 이상으로, 지금 이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다면 더 큰 수치와 심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완고함은 그들이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 아니라는 뿌리 깊은 확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죄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위안을 얻었고, 자신의 종교적 열심이 자신의 죄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회개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사회적 죄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것이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에게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아니길 바랍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여러분도 이 말씀을 통해 꼭 생각해 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혹시 내 안에 여전히 불신앙의 뿌리가 남아 있지 않은지 돌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보여 주십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릴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