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배 삼중주

본문: 로마서 12장 1-2절

설교자: 이병권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이 되는 명령이고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로마서 내에서도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1장까지의 로마서가 좀 더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내용으로 전개되었다면 12장부터의 로마서는 좀 더 실천적인 내용으로 전환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복음에 대해서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믿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2장부터 바울은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명령합니다. 이러한 전환에 있어서 오늘 본문의 두 구절이 연결고리의 역할을 합니다. 교리와 실천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 앞으로 다루게 될 내용을 ‘예배’로 요약합니다.

그래서 11장까지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한다면 12장부터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동기와 대상과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장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이 마땅함을 증거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피조물을 예배하는 어리석음,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사람의 죄성을 지적했습니다(1:25, 28)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고 그리스도를 통한 의를 허락하셨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말씀의 제목을 예배 삼중주라고 붙여봤는데, 음악에서 삼중주라고 하면 세 악기를 함께 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피아노 삼중주 라고하면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로 구성된 합주를 말합니다. 세 악기의 소리가 구별되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연주를 이루는 것, 그것이 삼중주입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삼중주에 비유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합주라고 생각했을 때 어떤 악기를 어떻게 연주해야 아름다운 합주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예배에 필요한 세 가지 요소를 살펴보겠습니다.

 

예배 삼중주를 위해 필요한 것, 첫째는 “자비”입니다. 예배의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앞서 했던 말을 받아서 하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명령들은 지금까지 바울이 설명했던 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뜬금없이 갑자기 나온 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형제들을 권합니다. “너희를 권하노니” 여기 ‘권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옆에서 부르다는 뜻인데 어떤 사람의 옆에서 조언이나 격려를 하며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치, 선수들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조언하는 코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의 코치가 되어서 그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도록 도와주려고 권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함의 근거가 무엇인지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있기에 바울이 그들을 권할 수 있습니다. 로마 교회가 합당한 예배를 드리도록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 대표 선수가 경기를 앞두고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것, 코치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대표 선수로 뽑혔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훈련을 받는 것도 아니고 아무나 권함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복음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었기에 권함을 받고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비하심을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일 뿐입니다. 국가 대표 선수처럼 뛰어난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서 선발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선택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예배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 예배의 근거가 되며 우리 예배의 동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배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사실, 하나님이 자격 없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가늠할 수 없는 크신 은혜로 우리를 받아주셨다는 사실, 그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배의 시작은 우리가 아닙니다. 그 시작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있었기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기에 우리에게 예배가 있는 것이고 예배가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자비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우리 예배는 종교와 다릅니다. 종교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도달해야 합니다. 사람이 뭔가를 해야 되고 이루어야 합니다. 사람의 공로를 근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이 할 수 없음을 아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 자비하심을 근거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예배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생각하고 묵상하며 그 자비하심에 빠져 있을 때 그것이 우리의 예배를 살아있게 합니다. 이것을 놓치는 것은 우리가 연주 중에 악보를 놓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잊으면 아름다운 예배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베풀어주신 자비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하며 그 자비를 우리 마음에 계속 채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연주하는 예배는 의미 없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예배 삼중주를 위해 필요한 것, 둘째는 “제물”입니다. 예배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1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를 드리려면 당연히 예배에 사용되는 뭔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배를 구성하는 내용, 드려지는 제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제물입니다. 제물에 따라 예배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제물에 따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물에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예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은 어떤 제물일까요? 바울은 제물에 대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라고 합니다. 강조되는 것은 “산 제물”입니다. 살아있는 제물이라는 말입니다. 살아있는 제물을 구별해서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산 제물을 생각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적인 말입니다. 이런 말과 같습니다. ‘뜨거운 얼음’, ‘차가운 불꽃’, ‘살아있는 죽음’ 단어와 단어를 수식하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물을 드리려면 제물을 죽이고 그 생명을 희생함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제물에 대해서 살아있는 제물, 산 제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순적인 표현에는 놀라운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으로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제물로서 짐승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살아있는 제물을 드립니다. 바로 우리의 몸을 드립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산 제물은 우리의 몸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는 구약과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전인격적인 모든 것,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이 중심이 되어 예배를 드렸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린 제사를 통해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께 직접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는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장됩니다. 우리는 특정한 시간이나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산 제물이기에 한 번 제물이 됨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 계속됩니다. 죽을 때까지 산 제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드려지는 삶의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로서 우리는 살아있는 제물답게 살아야 합니다.

산 제물에 대해서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전부를 내맡기는 것이다. 능동적으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것이고, 수동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허락하신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감사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거저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근거로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바울은 이렇게 명령한 바가 있습니다.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의 몸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어디에 드리고 계십니까? 나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살아있는 제물이 되고 있는지요?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문제는 우리가 산 제물을 드릴까 말까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을 드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제물을 드릴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진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 제물이 될지, 아니면 부족한 제물이 될지는 우리의 삶이 어떠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몸의 모든 지체가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질 때 우리의 손과 발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우리의 입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을 전파하고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할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은 복음이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었기에 이제 우리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살아있는 제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며 매일매일 나의 삶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배 삼중주를 위해 필요한 것, 셋째는 “순종”입니다. 예배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될 때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이 세대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다스리는 영역으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은 죄와 사망에서 의와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러한 옮겨짐은 확정적이고 최종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와 사망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의 영향력 아래에 살고 있습니다. 그 영향력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자가 격리를 하며 자신을 지키려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직 우리가 육신 가운데 살고 있기에 격리만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변화입니다. 새로운 신분에 맞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신분에 맞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으라고 명령할 때 모두 현재 시제를 사용합니다. 변화는 끊임없는 과정이기에 계속해서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변화될 수 있습니까?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가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변화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변화를 이루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 일을 누가 하십니까? 성령님이 하십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이 세상의 가치와 문화와 삶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내 모든 삶을 맞추어 갈 때 그러한 순종이 변화된 삶이 되고 변화된 삶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하룻밤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 뜻대로 사는 것은 평생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에서 살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것은 시험하고 입증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한지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알 수 있습니다. 살아보면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절했을 때,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음을 거절한 자에게 하나님은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마음을 바꾸시며 그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변화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를 통해 세상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순종의 삶이 우리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는 세상과 다릅니다. 우리는 순종으로 예배드립니다. 그리고 순종이 우리를 세상과 구별되게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순종을 말했고 마무리하면서도 순종을 말합니다.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16:26 …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누구든지 믿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롭다하심을 받게 됩니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그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이러한 순종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나서 도전할 수 있는 구원의 다음 단계가 아닙니다. 더 헌신된 사람들을 위한 더 높은 차원의 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순종을 말씀합니다. 복음의 대한 믿음의 반응은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 자비하심을 생각할 때마다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순종의 동기가 되고 우리 예배를 살아있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떤 소리를 내고 계십니까?’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악기를 연주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때 나는 지금 무엇을 연주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연주되고 있는지요? 나는 삶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고 있는지요?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지요? 새해를 시작하면서 고쳐야 할 부분은 없습니까? 버려야할 삶의 태도와 습관, 시간 사용은 없습니까? 좀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은 무엇이며 더 마음을 써야 할 것과 덜 마음을 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생각하면서 그런 자비하심을 경험한 내가 지금 어떤 제물을 드리고 있는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순종이 예배입니다. 순종을 통해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