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영생을 찾는 사람(들) 4
본문: 마가복음 10장 21-31
설교자: 최종혁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젊은 부자 관리가 가지고 있었던 사람에 대한 매우 치명적인 오해를 살펴봤었다.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칭하면서 자신도 예수님처럼 선하게 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질문을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자신이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라며 그의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셨다.
이 청년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전제는 ‘사람은 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오해는 죄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그렇게 배우기 때문이다. 이 청년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할 정도로 스스로 속이고 남에게 속으며 살아왔던 것처럼, 이 땅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스스로 속고 남을 속인다. 우리가 선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면서 산다. 하나님의 기준은 낮추고 나에 대한 평가에는 관대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나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을 보며 그렇게 하고, 나에게는 항상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그렇게 한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선할 수 없다. 나는 선할 수 없다는 나쁜 소식을 먼저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성경이 말하는 기쁜 소식(복음)이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이 젊은 부자 관리가 이 사실을 깨닫기 원하셨다. 21절은 이렇게 말한다.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
어려서부터 율법의 모든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왔다고 (속아서) 믿고 있는 이 사람을 예수님은 보셨다. 대화를 하는 중에는 딴 데를 보고 계셨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순간 예수님은 말을 이어가기에 앞서 잠시 그를 바라보셨다. 사람의 겉모습 뿐 아니라 그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신실하고 정직하지만 평생 진리가 아닌 거짓의 인도함을 받고 살아온 이 사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셨을 것이다. 죄는 사람을 매우 악하게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이렇게 종교적으로 망가뜨리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의 눈에는 죄의 노예가 되어 죄의 짐을 지고 고생하는 사람들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부르셨던 것이다(마 11:28).
이 청년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청년을 안타깝게 바라 보셨다.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사랑으로 진실을 알게 말씀하셨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이 젊은 부자 관리가 가지고 있던 또 다른 오해를 볼 수 있고, 이 두 오해를 버려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해 2 : 영생은 단순 더하기다(21-22절)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막 10:21 …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사랑으로 한 말치고는 너무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평생을 오해 속에 살아온 이 청년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다. 마태는 이 청년이 율법의 말씀을 다 지켰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물었다고 기록했는데(마 19:20), 예수님은 그 표현을 받아서 부족한 것 한 가지를 말씀해주셨다고 볼 수 있다. 한 가지가 부족하다는 것은 그 한 가지만 채우면 완벽하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영생을 위해 필요한 한 가지다.
그 한 가지는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다. 청년에게 있어 예수님께서 18절에서 하신 말씀은 좀 무안했고, 19절에서 하신 말씀은 너무 뻔했다면, 여기 21절의 말씀은 황당했을 것이다. 너무 터무니 없는 말씀으로 들렸을 것이다. 잘못들었는 줄 알고 예수님께 다시 물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왜 이런 극단적인 말씀을 하셨을까?
때로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갑자기 하실 때가 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대뜸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었다(요 3:3).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달라는 우물가의 여인에게는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말씀을 하셨었다(요 4:16). 율법교사에게도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기보다 그가 스스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었다. 우리에게는 갑작스럽거나 이상하게 들지만,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정확히 필요한 말씀을 하신다. 뛰어난 의사가 뭔가 관계 없는 질문들을 하고서는 정확히 병을 진단하는 것과 같다.
먼저 예수님은 이 청년이 가지고 있었던 첫번째 오해인 “사람은 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착각임을 알게 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이웃사랑의 극단적인 모습을 통해 지금까지 이웃사랑에 대한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말하는 이 사람에게 도전하신 것이다. 정말로 네가 말한 것처럼 네가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 수 있겠느냐고 도전하신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이 율법의 계명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수는 있는 것이 진정한 이웃사랑이다. 그렇게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왜?’라는 근본적인 이유가 떠올랐을 수 있다. ‘내가 그렇게 해봐야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다 구제할 수도 없는데?’라는 합리적인 이유가 떠올랐을 수도 있다. ‘나보다 더 부자인 저 사람도 그렇게 하면 나도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저런 핑계나 정당화를 지우고 나서 남는 것은 결국 나는 내가 생각한 것처럼 선한 사람이 아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생각해본 적도 없다. 전 재산이 아니라 반 재산도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십일조를 하고 구제를 하는 것도 그래야 한다니까 하는 것이지, 더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덜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것이 율법을 다 지키며 살아왔다고 말했던 이 사람의 진짜 마음이었을 것이다.
재물과 관련된 부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다 지켰다”고 말한 다른 계명들도 마찬가지다. 만약 실제로 살인하는 것이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만큼 쉽고 남에게 정죄 받는 일이 아니었다면 아마 살인도 했을 것이다. 간음도 마찬가지이고 도둑질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지금의 세상을 보면 정말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아 살해는 낙태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간음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될 뿐 아니라 권장되기도 한다. 도둑질도 사업 수완으로 정당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고, 그렇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이다. 할 수만 있으면 조금이라도 이웃을 희생해서 나를 사랑하고 싶지 그 반대는 아니다.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는 이기심이 바로 그것이고, 그것이 죄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말씀으로 그 마음의 중심에 있는 생각을 드러내시고, 이 사람이 그것을 통해 정직하게 자신을 알 수 있기를 원하셨다. 바로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그 사실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에서 끝나지 않았다. 거기에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덧붙이셨다. 이 말씀은 이 젊은 부자 관리가 가지고 있었던 두번째 치명적인 오해에 대한 도전이다. 바로 영생은 단순 더하기라는 오해다.
영생(구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가지고 있다. 영생을 얻는 것은 자기 삶에 어떤 변화도 없이 단지 좋은 것 하나를 더 얻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죽음 후에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을 영생의 전부로 생각한다. 혹은 이 땅에서 힘들 때 위로와 힘을 얻는 것만 생각한다. 지금 내 삶은 그대로 두고 뭔가 좋은 것을 하나님을 통해 얻는 것을 복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값싼 복음 혹은 쉬운 복음이다. 우리가 원하는 복음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대로, 지금껏 살아왔던대로 그냥 살면 된다. 그러면서 예수님 믿는다고만 고백하면 된다. 한번쯤 그렇게 진심으로 고백하면 된다. 마음대로 살다가 한번씩 예수님께 죄송하다고, 회개한다고 하면 된다. 그리고 여전히 같은 삶을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어차피 ‘영생은 단순 더하기’이기 때문이다.
여기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에 무언가를 더 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보라. 예수님은 단순 더하기를 말씀하고 계시지 않고, 오히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해야한다고 말씀하신다. 지금부터 열심히 나를 따르면 하늘에 보화가 있을거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과 하늘의 보화 중에 선택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성경의 다른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아는 것처럼, 영생을 얻기 위해서 실제로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 자체가 영생을 보장한다면 오히려 영생을 얻는 것은 더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지금 이 청년의 오해를 깨고 계신다. 영생은 단순 더하기가 아니라 선택이고, 그 선택의 최우선순위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셔야 한다. 즉,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반드시 실제로 모든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렇게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는 사람이 영생을 얻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막 10:28–31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실제로 자기 생업을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자기 삶에 예수님을 그냥 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최우선에 둔 선택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 땅에서도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고 내세에도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땅의 보상은 집 한 채가 100채가 되고, 100평짜리 땅이 1만 평이 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도 있지만 보장된 것은 아니다. 그 중간에 있는 형제, 자매, 어머니, 자식에 대한 말씀을 보면 이것이 문자적으로 그렇게 될 것을 의미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함께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교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은혜에 대한 말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생이다. 제자들은 여전히 연약한 자들로서 본전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영생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정도로 예수님을 최우선에 둔 자들이 영생을 얻는다. 31절이 말하는 것처럼 누구나 동일한 영생을 얻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이는 십계명의 첫 계명인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와 둘째 계명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에 순종하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전부가 나의 전부가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하나님만 내 삶에 들여 놓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일부에만 두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뒤에 두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 예수님은 지금 이 젊은 부자 관리에게 그렇게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하는 사람에게 그럼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도 지켰냐고 물으신 셈이다. 이 질문에 대한 그 사람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막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모두 드러냈다. 영생을 자기 삶에 더하기 위해 왔던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영생과 지금 자기 삶 중에 선택 해야할 것을 말씀하셨고, 이 사람은 자기 삶, 자기 삶을 지탱해 주던 재물을 선택했다. 그리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 그의 재물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 부자 청년은 평생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겨왔다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실상은 그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그의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살아왔던 것 뿐이다. 그러면서 그것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무 관계가 없다는 착각 속에 살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에게 한 가지가 부족했다. 바로 그 재물이라는 우상을 버리고 참된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것, 그것이 부족했다. 그는 이 재물을 붙잡고 그동안 살아왔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종교 생활에 더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미 생활하기에 충분한 재물이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의 재물들은 그에게 삶의 안정과 기쁨을 주었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들을 가질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떠나지 않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의 재물이 곧 그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기반이었고 주관하고 있는 주인이었다. 그런 재물을 그는 의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서 이런 비유로 말씀하셨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소유보다 값진 보화를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인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당연히 지혜로운 사람이다.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에게 지금 그가 가진 모든 것과 하늘의 보화를 비교해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당연히 하늘의 보화가 더 크다. 영생이 비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다.
하지만 이 부자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하늘의 보화는 불확실하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보험처럼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지금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할만큼은 아니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에게 지금처럼 살면서 적당히 구제도 하고 재정적으로 예수님을 도우면서 살면 된다고 했으면 이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것이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영생은 단순 더하기였기 때문이다. 소유는 그대로 두고 밭의 보화를 얻기 원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소유를 팔라고 하셨다. 그래야 보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청년은 붙잡고 있던 것들을 내려 놓아야 했다. 그가 붙잡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그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재물이 그를 붙잡아 영생을 주실 예수님께로 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재물을 붙들고 있는 한 영생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다. “슬픈 기색을 띠고”는 마태복음 16:3에서는 폭풍이 오기 전 날이 흐려지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다. 이 사람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근심하며 자기 갈 길을 갔다.
이 사람은 영생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고, 이 오해는 오늘날도 많이 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면서 이 “믿음”에 대해서 끔찍한 오해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믿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아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모든 타락한 천사들도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들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기 때문이다. 믿음에 지식은 필요하지만 지식이 믿음은 아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또한 믿음은 행위의 반대말이라고 하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는 경우도 있다. 믿음의 반대말로서 행위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스스로 의로워지기 위한 행위를 말한다. 그렇게 내가 무언가를 해서 의로워질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선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믿음은 거기서 출발해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부자 청년에게 요구하신 것은 엄청난 ‘행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순수한 ‘믿음’이다. 이 말씀의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영접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었다(14절).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부모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어린 아이처럼, 나의 구원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부자 청년이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을 믿었다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그런 발버둥은 그를 도우려고 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몸의 힘을 빼고 돕는 사람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그것이 두려울 수 있다. 정말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싶을 수 있다. 내가 뭐라도 해야할 것 같고, 이것마저 멈추면 큰 일 날 것같을 수 있다. 부자 청년이 딱 그랬다. 전 재산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그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포기해야 진짜 내 삶을 붙드시고 이끄시는 구원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이런 모습이다.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멈출 뿐 아니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영생을 얻는 참된 믿음이다. 영생은 단순 더하기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믿고 의지해 왔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도전
본문에는 세번째 오해가 기록되어 있다. 이 오해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오해다. 상황은 부자 청년이 돌아간 후다.
막 10:23–26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은 그로 인해 매우 놀랐다. 그러면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즉, 제자들의 말은 부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다. 이것이 세번째 오해다.
먼저 제자들의 말에 내포된 의미는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당시 부를 하나님의 복으로 여겼던 문화에서 기인한다. 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고, 하나님은 악인이 아닌 의인에게 복을 주시니, 부자는 의인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특히, 지금 그들이 생각하는 부자는 세리와 같이 그들이 볼 때 악한 일로 부를 쌓은 사람이 아니다. 방금 전까지 그들 앞에 있었던 그런 부자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부자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부자라면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제자들은 생각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셨고 얼마나 어려운지를 비교를 통해 말씀하셨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더 쉽다. 낙타와 바늘귀의 비유가 사실 너무 말도 안되게 들리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바늘귀라는 좁은 문이 예루살렘에 있었고 그곳을 낙타가 지나가려면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지나가야했다는 주장을 하지만 사실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다. 단지 예수님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것보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 뿐이다.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26절의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일면 옳다. 그들은 예수님이 ‘불가능’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했다. 다만 그것이 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몰랐고, 궁극적으로 구원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틀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 10: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원 받게 할 수도 없다. 사람이 스스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면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어떤 기술로 가능하게 될지라도, 사람은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사람은 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영생의 가치를 알지 못해서 그것을 위해 지금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것이 어렵다고 하지 않으셨고 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고 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할 나쁜 소식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으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으시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다.
예수님을 찾아왔었던 젊은 부자 관리와는 다르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의 말을 들어 보라.
빌 3:4–9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가능한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이 사람은 교회와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사람이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사람의 기준에서 볼 때는 구원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고, 이 사람 바울을 구원하셔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하셨다. 가능한 것이다. 자신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고백을 더 들어보라.
딤전 1:15–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이것이 자신에게만 가능했던 일이 아님을 분명히 말한다. 그는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다.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다. 바울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누구든 구원하실 수 있다.
정말 영생에 가까이 왔던 이 젊은 부자는 안타깝게도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답은 찾았는데 자신이 생각했던 범주를 넘어서는 답이었기 때문이다. 그 답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화를 찾았는데 그 보화가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치가 있는지 그는 확신하지 못했고, 그 결과로 지극히 값진 보화를 얻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우리 가운데 없기를 바란다. 영생을 눈 앞에 두고 보지 못해 돌아서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마치 내가 스스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으로 살지 않기를 바란다. 좋은 소식은 할 수 없는 나에게 있지 않고 할 수 있으신 하나님께 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우심을 구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유일한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영생을 얻은 자들은 예수님을 최우선에 두고 그분을 따라 가는 그 삶이 영생을 사는 삶임을 기억하고 계속해서 이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