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영생을 찾는 사람(들) 3
본문: 마가복음 10장 17-20
설교자: 최종혁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들었었다. 집에 계실 때, 길에 계실 때, 들에 계실 때, 바닷가에 계실 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 때문에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었다. 먹을 것을 주신다는 말에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혹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 왔던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형에게 얘기해서 유산을 나누게 해달라고 찾아왔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예수님을 찾아와 만난 사람들이 모두 진정 의미있는 유익을 얻었던 것은 아니다. 얼마전 살펴봤었던 10명의 나병환자 사건만 봐도 그렇다. 9명은 병 고침은 받았지만 구원은 얻지 못했다. 오직 1명만 구원을 받았다. 병 고침을 받는 것이 9명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 수 있지만, 그들은 더 중요한 것, 아니 가장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병 고침을 받지 못했더라도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이 절대적으로 더 나은 일이었다.
지난 두 시간 동안 살펴봤던 율법교사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영생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께 그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고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그런 질문을 했을 뿐이다. 인생의 해답이신 예수님에게서 답을 얻으려는 마음이 없었다. 예수님은 그런 율법교사가 깨달을 수 있도록 질문하시고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그가 결국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이 율법교사와 동일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한 사람을 보게 된다. 이 사람은 율법교사와 같지는 않았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같은 질문을 통해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정말 알고 싶어서 질문을 했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제대로 된 의미에서의 ‘구도자’라고 할 수 있다. 길을 찾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도를 하다보면 율법교사처럼 그저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하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어디 한번 나를 설득할 수 있으면 설득해보라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관심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정말 알려고 하지 않고 믿고자 하는 마음도 없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은 그렇지는 않다. 매우 적극적으로 믿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직하게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야 말로 참된 의미에서 영생을 찾는 사람이었고,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영생에 이르는 길을 알게 하셨다.
17절에서 시작된 사건은 31절까지 이어진다. 그 중 22절까지가 영생에 대해 질문했던 사람과 예수님 사이의 대화이고, 23절-31절은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내용이다. 22절까지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은 그를 찾아 왔던 사람이 가지고 있는 큰 오해 둘을 바로 잡으셨다. 하나는 ‘사람은 선할 수 있다는 오해’였고, 다른 하나는 ‘영생은 단순 더하기라는 오해’였다. 오늘은 그 중 첫번째 오해인 ‘사람은 선할 수 있다’는 오해에 대해서 2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자.
오해 1 : 사람은 선할 수 있다(17-20절)
먼저 이 상황을 보자.
막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
예수님을 길을 떠나려고 하셨다. 단순히 어디를 갔다 오시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예루살렘으로의 여정 가운데 있었던 일이다. 예수님은 굳은 결심을 하시고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셨다. 복잡한 심경이셨을 것이다. 어떻게 될지 몰라서가 아니라 알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그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길을 가시면서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셨다. 이 시기에는 특히 제자들에게 사역을 더 집중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중들을 만나지 않으셨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계속해서 찾아왔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 기록된 사건만 봐도 그렇다. 10:1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었고 그 중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나왔었다. 또한 부모들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와서 축복해주시기를 구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귀찮은 상황일 수 있다. 혼자 있고 싶은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똑같이 예수님께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아이들까지 데리고 와서 축복해달라고 하는 것은 제자들이 봐도 좀 아니다 싶었는지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았다. 하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노하시며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가르치셨다(14절). 그리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에게 안수하고 축복해주셨다.
하지만 유월절 전에 예루살렘에 계획대로 도착하려면 마냥 한 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아마 예수님은 더 서둘러서 길을 떠나셨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이다. 마가는 이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았다”고 표현했다.
이 사건은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된 사건이다. 마태에 따르면 이 사람은 “청년”이었다(마 19:20, 22). 이 단어는 사춘기에서 결혼 사이의 나이를 지칭한다. 즉, 많이 잡아도 30대 이하의 나이였다고 볼 수 있다. 누가에 따르면 이 사람은 “관리”이기도 했다(눅 18:18). 아마 그 지역 회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이 사람은 자신이 율법의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할 정도로 종교적으로도 자신의 양심에 맞게 헌신한 삶을 살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 복음서 모두 공통적으로 이 사람이 “재물이 많았다”고 증언한다(마 19:22; 막 10:22; 눅 18:23). 특히 누가는 이 사람이 “큰 부자”였다고 표현했다. 뒤에 나오지만 이것이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상속을 받아서 부자였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와 상관 없이 사업 수완이 좋아서 어린 나이에 자수성가한 사람일 수도 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다. 이 사람은 엄청난 부자였다. 정리하면 이 사람은 젊은 나이에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달려’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아이들이 달려다니지 어른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달리지 않는다. 특히 사회적 지위가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달리게 만들지 자신이 달리지는 않는다. 여기 이 젊은 부자 관리도 그런 이유로 평소에 달릴 일이 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예수님께로 달려왔다. 예수님께서 떠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떠나기 전에 그는 이 질문을 반드시 해야겠다는 마음의 간절함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께 달려오는 것으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은 그냥 달려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꿇어 앉았다. 이 역시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이 사람은 최대한 자신을 낮추면서 예수님에 대한 존경을 그렇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최소한 그 지역에서는 이 사람이 영향력이 있었고 알려진 사람이었을 것을 생각하면 아마 보는 사람들이 더 놀랄 수도 있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런 간절함과 절실함으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 왔다. 반드시 답을 알고 싶은 질문이 있었고, 그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바로 그 답을 알려줄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존재였기(마지막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님께로 달려와 꿇어 앉아서 그는 이렇게 물었다.
막 10:17 …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바로 이 영생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이 이 젊은 사람을 그동안 괴롭혀온 것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이 질문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유대인으로서 경건한 종교인으로서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겠지만,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이 영생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을 24, 25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표현하셨고, 제자들은 26절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즉, 이 표현들은 모두 같은 것을 의미한다. ‘불사의 몸’이 되는 것에 대해서 궁금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참된 백성이 되는 것, 구원을 얻는 것, 참된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 궁금했던 것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그 자신이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 부분이 우리가 앞서 살펴본 율법교사와는 달랐던 부분이다. 율법교사는 스스로 영생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청년은 그렇지 않았다. 율법교사보다 이 청년의 종교적 헌신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다. 율법교사는 정직하지 않았고 이 청년은 정직했던 것 뿐이다. 그는 배운대로 최선을 다해서 율법을 지켰지만 뭔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청년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여러 계명들을 나열하셨을 때, 이렇게 답했다.
마 19: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여전히 자신에게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예수라는 특별한 선생님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그전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 말씀을 직접 들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과 하시는 일에서 그는 다른 랍비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예수님에게서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의 마음의 괴로움을 끝내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는 이 기회를 잡으러 급하게 예수님께 나아와 이 질문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의외이고 흥미롭다.
막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옆에서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사람들조차 무안해질 수 있는 대답이다. 이 청년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불렀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 부분을 언급하시면서 책망하듯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아마 이 말에 질문을 한 청년도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자신은 존경을 담아서 한 말에 예수님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실 선생(랍비)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던 사람들이었다. 당시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자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존경을 표해야 했었는데, 랍비가 집에 들어오면 그 랍비의 아버지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존경을 표했어야 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랍비가 동시에 물에 빠지면 먼저 랍비를 구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만큼 랍비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랍비에게 “선한 선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선한 선생님이여”라는 호칭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호칭, 정확히 말하면 “선한”이라는 수식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선하지 않은 분이셔서 그랬을까? 당연히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은 우리말에서 “착하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다. 도덕적으로 온전한 상태, 죄가 없이 의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고 물으셨다(요 8:46).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벧전 2: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요일 3: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죄가 없으셨다는 것은 성경의 일관된 진술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선하지 않은데, 이 부자 청년이 자신을 선하다고 부른 것을 문제 삼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문제 삼으신 것은 이 청년이 예수님을 그렇게 불렀던 근본적인 이유에 있다. 바로 그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 사람은 선할 수 있다는 오해였다.
예수님의 바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런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못박으셨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도 “선한”이라는 수식어는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이 이 말씀의 주요 쟁점이 아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청년의 입장에서 말씀하고 계시다. 이 청년은 스스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자신에게 뭔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여러 랍비들을 만나 질문을 해봐도 비슷한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율법의 말씀에 따라 제사를 드리라고 한다. 금식과 기도에 힘쓰라고 한다. 안식일을 잘 지키라고 한다. 구제도 잊지 말라고 한다. 부모도 공경하라고 한다. 그 모든 가르침에 순종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뭔가 부족한 것 같다.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이 없다.
그런데 예수라는 선생은 뭔가 다른 것 같았다. 그의 말에는 다른 누구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권위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이적을 행하기도 했다. 그야 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특별한 선생인 것 같았다. 그에게 가면 영생을 얻기에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선하게 될 수 있는지, 그래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예수라는 선한 선생은 나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이 부자 청년의 마음 속에 있던 생각이었고 그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청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 18절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이 부자 청년은 사람이 어떤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고(다른 모든 사람들도 동일), 그래서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마치 사람이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겠냐고 묻는 것과 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았다. 물론 그런 말도 안되는 질문 덕에 비행기가 발명되고 배가 발명되었겠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맨몸으로 평생을 날기 위해 노력하고 물 위를 걷기 위해 노력한다면 곁에서 그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옳다. 그것이 진짜 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그 진실을 조금은 충격적인 방법으로 말씀해주신 것이다.
사실 이 청년도 하나님 한 분 만이 절대적으로 선하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선하면(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예수님은 그것이 치명적인(정말 말 그대로 생명을 위협하는) 오해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사람은 착할 수 있다. 도덕적일 수 있다. 친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선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할만큼 선할 수는 없다. 이 젊은 부자 관리가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진심으로 원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더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원하고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선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구원 받기에 합당한 의는 절대적인 것이지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남보다 나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러야 한다.
화가 잔뜩 난 곰이 달려올 때 살 수 있는 방법은 곰보다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보다 빨리 달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은 그렇게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낫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 이르러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은 인간 중 상위 몇 퍼센트도 아니고 하나님과 같은 의로움이다. 말 그대로 절대적인 의로움인 것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고 따라서 그 어떤 사람도 선하지 않다. 무엇을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온 율법이 하고 있는 말이 이 말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기준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이 어떻게 우리들을 통해 나타나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의로움을 증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일을 한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할 수록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참혹한 사실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또한 우리의 죄악됨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따.
예수님도 여기서 이 영생을 찾는 사람에게 그렇게 율법을 사용하신다.
막 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율법은 십계명의 후반부에 해당되는 계명들로서 구체적으로는 ‘이웃 사랑’과 관계된 계명들이다. 마태는 이 끝에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덧붙이셨다고 기록했다(마 19:19). 마가는 특별히 “속여 빼앗지 말라”는 명령도 예수님께서 언급하셨음을 기록했는데, 어쩌면 이 부자가 그런 방법으로 부를 쌓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 십계명의 명령들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이렇게 풀어주셨다.
마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남에게 노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라는 명령도 포함하는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도 그렇다.
마 5:27–28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십계명의 다른 명령들도 마찬가지다. 이 간단해 보이는 명령들 안에는 훨씬 더 엄격한 하나님의 선과 의에 대한 기준이 들어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부자 청년의 대답이다.
막 10: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그의 입장에서 예수님께서 지금 하신 말씀은 꽤나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이미 다른 랍비들에게도 똑같은 말을 들었고 그에 따라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성인이 되어 율법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나이인 13세를 지칭할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은 이 모든 명령에 순종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답변이고, 당돌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이 당시 신실한 유대인들의 생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바울도 그렇게 말했고, 지난 시간에 살펴본 율법 교사도 동일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기준을 낮추었기 때문이다.
이 부자 청년도 만약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들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살인은 자신이 칼을 들고 이웃을 죽이는 것 뿐이었다. 간음하는 것은 남의 아내와 실제로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 뿐이었다. 도둑질도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무언가를 훔쳐오는 것이 도둑질이었다. 거짓 증언은 아마 할 일 자체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속여 빼앗는 것에는 충분한 변명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속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모 공경에 대해서 당시의 전통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 7:10–13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쉽게 말해 어떤 재물에 대해서 ‘이것은 하나님께 드릴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부모에게도 드릴 수 없는 것이 된다는 전통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부모를 부양할 책임을 피하기 위해 그런 ‘고르반’ 제도를 사용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당시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그들이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일을 많이 했다고 말씀하셨다.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한 말이다. 실제로 율법을 다 지킨 것이 아니다. 스스로 그랬다고 착각했던 것 뿐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을 낮추고 자신들이 지킬 수 있게 바꿨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하셨던 말씀으로 이 사람의 오해를 깨뜨리실 수도 있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불쌍히 여기셨고 그가 자신의 진짜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지를 깨닫기 원하셨다. 그가 죄인일 뿐 아니라 영생에 대해서도 큰 오해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정말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시려고 21절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 이후의 말씀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다.
여기서, 한가지만 생각해 보자. 왜 이 젊은 청년 관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왜 사람이 선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왜 그런 오해를 했을까?
첫째는 그것이 죄인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죄인에게 죄인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다. 나는 아니다.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다.
누가는 이 부자 관원의 이야기 조금 앞에 한 비유를 기록했는데, 그 비유에는 두 죄인이 나온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세리가 나오고, 스스로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했던 바리새인이 나온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감사했다. 자신이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했다(눅 18:11). 자기가 토색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자신이 그렇게 선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면에 세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했다(눅 18:13).
자, 이 두 죄인 중에 누가 나와 같은가? 세리도 아니고 바리새인도 아닌 것 같은가? 안타깝지만 우리는 이 두 죄인 중 하나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든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든지, 둘 중 하나인 것이다. 이 둘은 그 생각 때문에 행동에 차이가 난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했다. 하지만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 의를 내세웠다.
이 둘 중 전형적인 죄인은 바리새인이다. 그들의 종교성 때문에 나와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지만,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만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모습은 정확히 죄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젊은 부자 관원도 이런 면에서는 특별하지 않다. 그도 역시 다른 여느 죄인들처럼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둘째는 그가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에 대해서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예수님께 대답했는데, 그는 배운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답했을 뿐이다. 그가 어려서부터 배운 것이 그것이었다. 율법을 잘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에는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맹인이 맹인을 인도한 것이다.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교사와 같은 사람들은 백성들의 인도자를 자처했지만 그들 역시 맹인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했던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에 대해서 물었던 이 부자 청년이 바로 이들의 인도를 받았던 것이다. 천국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를 인도하는 자들은 그 문을 닫아두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율법을 행해도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이 했던 일에 대해서 겉만 번지르하게 하는 일이라 말씀하셨다.
마 23:24–28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2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사람 눈에 보이는 겉만 깨끗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으로 그들은 진짜 죄를 감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 뭔가 더 선해지고 의로워지고 거룩해진다고 느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으로 사람이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만든 것이다. 맹인된 인도자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은 그런 맹인의 인도를 받은 맹인이었다. 그에게는 기적이 필요했다. 빛이 필요했다. 예수님이 그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으시다. 예수님이라는 복음을 얻기 위해 그는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나쁜 소식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동안 자신이 쌓아왔던 모든 것이 조금도 자신을 더욱 영생으로 가까이 이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그렇게 선한 사람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영생에 합당한 자가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 구원에 앞서 이것이 필요했던 것이고 예수님은 그가 이 진리를 깨닫고 정말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기를 원하셨다.
이는 오늘날 영생을 찾아야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는다. 다 괜찮다고 한다. 어차피 하나님도 없고 따라서 심판도 없으니 상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내세를 말하는 종교들은 그냥 할 수 있는한 착하게 열심히 살면 된다고 한다.
심지어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게 말한다. 우리가 어떤 죄인이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 걱정 말라는 말만 한다. 사람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결과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저 교회 잘 나오고 헌금 잘하고, 찬양하면서 눈물 좀 흘리고 감동하면 그게 영생으로 가는 길인 것처럼 말한다. 말씀 듣다가 뭔가 한번 깨달음이 있으면 그게 구원인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교인만 늘어난다. 교회에 사람들은 몰려드는데, 정말로 구원 받는 사람은 적다. 그래도 영생을 찾는 사람들이 교회로 오고 있는데, 정작 교회는 영생을 얻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만 만들어 내고 있다는 말이다. 나쁜 소식은 전하지 않고 좋은 소식만 전함으로써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누구도 죄인에게 죄인임을 말해주고 있지 않는 시대다. 그게 너이고 너 자체로 괜찮다고 맹목적인 위로만 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영생에 관해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그런 위로는 맹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빛을 전해야 한다. 진리를 전해야 한다. 그것이 듣기 어렵고 불편하더라도 그렇게 해야한다.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죄인임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소식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맹인을 인도하는 맹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선할 수 없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누구도 선할 수 없다. 그러니 스스로 영생을 얻으려는 노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아직 영생을 얻지 못했다면 이 사실을 명심하고 예수님께 달려와서 꿇어 도우심을 구하기 바란다. 그리고 영생을 얻었다면 이 사실을 담대하게 선포하기 바란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것도 우리의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