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영생을 찾는 사람(들) 2

본문: 누가복음 10장 29-37

설교자: 최종혁

 

예수님을 만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영생에 관한 질문을 했던 한 율법교사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다. 이 사람은 정직하지 않은 동기로 예수님께 질문했지만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율법의 전문가인 그가 율법이 진정 말하고 있는 바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우신 것이다.

율법교사는 율법의 가장 큰 두 계명이자 모든 율법을 아우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고, 예수님은 그에게 옳다고 하시면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답하셨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목적은 약간의 과장을 통해 율법교사의 열심을 더 이끌어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예수님은 율법교사를 포함한  그 누구도 열심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알게 하려고 이 말씀을 하셨다. 누구도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율법교사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려면 냉장고 문을 열고 코끼리를 넣으면 된다고 말한 것이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애초에 사람이 무엇을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 그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다. 율법의 일차적인 역할이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고, 예수님은 그런 면에서 율법을 제대로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셨고 그러면 살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이 영생을 얻으려면 할 수 없는 일을 해야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율법교사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직하지 않았다. “선생님,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행할 수 있겠습니까. 제 평생을 노력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저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율법교사의 질문 2(29절)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율법교사의 첫 질문과 마찬가지로 둘째 질문도 정직한 질문이 아니다. 정말로 이웃이 누구인지 몰라서, 정말 자기가 사랑해야할 이웃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이 질문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었다. 즉,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사실을(그래서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고 인정 받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질문은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였다.

이 질문도 앞선 질문과 마찬가지로 율법교사들이 자주 논하는 질문 중에 하나였다. 당연히 사전적인 정의를 묻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옆집에 사는 사람만 이웃인지, 한 동네에 사는 사람이 이웃인지, 한 동네에 사는데 별로 안친한 사람이면 이웃인지 아닌지와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질문은 신학적인 질문이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으니 무엇이 일이고 무엇이 일이 아닌지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과 동일하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셨으니 누가 이웃이고 누가 이웃이 아닌지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내가 사랑해야할 이웃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을 내가 사랑해야합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일단 이웃 사랑에 대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한 레위기 19:17-18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한다.

19:17–18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8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여기서 이웃은 형제, 동포와 함께 사용되어서 유대 민족에게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19:33–34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34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기서 거류민은 기본적으로 외국인을 의미한다. 하지만 단순히 여행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유대인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많은 경우 이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외국인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사랑해야할 이웃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누구는 사랑해야할 이웃이고 누구는 아니라는 기준을 주지 않으셨다. 애초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이웃 사랑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준을 원했던 것은 ‘율법적인’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율법적인 사람들은 기준을 원했다. 그래야 자신들이 율법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의 보편적인 이웃에 대한 기준은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세리나 창녀 같은 사람들은 죄인으로 취급을 받았고 그들은 사랑해야할 이웃이 아니었다.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하나님의 원수로서 사랑할 대상이 아니라 미워해야할 대상이었다.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듯한 말씀도 있다.

139:21–22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22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시편에는 이와 유사한 말씀들이 많다. 하지만 이 말씀들은 이웃 혐오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죄의 심판에 대한 말씀들이다. 유대인들은 이런 말씀들을 사랑할 이웃과 그렇지 않은 이웃이 있다는 견해의 바탕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이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은 이유다.

율법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마음은 무엇이고 목숨은 무엇이며 힘과 뜻은 무엇인지도 묻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이미 끝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상의 신전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빠짐 없이 드렸을 것이다. 절기를 지키고 매일 기도 시간도 지켰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고 그것으로 첫 계명은 충분히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이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이었다.

그래서 율법교사는 이웃에 대해서만 질문했다. 그도 당연히 사랑해야할 이웃의 범위(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어쩌면 꽤 그 범위를 넓게 생각하고 선행을 베풀며 살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든 “저는 그들을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을거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혹은 예수님의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상황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예수님은 율법의 가장 큰 두 계명을 언급하시면서 율법교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못했음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율법교사는 달랐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율법을 잘 지켰음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기 원했다. 그것이 율법교사의 둘째 질문인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에 담겨져 있던 긴장이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었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한번 집고 넘어가자. 결국 앞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자가 되었다. 율법주의자는 어떤 면에서는 매우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율법주의자인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기준을 낮추고 자신들의 기준을 세우고 지켰을 뿐이다. 이것이 로마서 10장에서 바울이 한 말이다.

10:2–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이렇게 믿었다.

2:18–20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예수님의 말씀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켰을 뿐이다(막 7:5). 그러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믿고 있었다. 바울이 자신이 구원 받기 전의 상태에 대해서 말하면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빌 3:6). 정말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흠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낮춘 하나님의 기준인 전통을 지키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흠 없이 의로운 것으로 생각했었던 것 뿐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문제, 율법교사의 문제, 바리새인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문제다. 우리도 하나님의 기준을 낮춘다. 그래서 스스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준을 낮추고 결국 하나님까지 부인한다. 그것이 죄인인 우리들이 하는 일이고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다. 우리는 영생에 합당하지 않다. 내가 세운 기준에 합당한 의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의로 우리를 옷 입히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5:31–3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스스로 의인인 사람에게 예수님은 필요없다. 오늘날 영혼의 구원자 예수님보다 삶의 위로자, 치유자 예수님과 같은 얘기가 더 많이 나오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죄인이 없으니 구원자도 필요없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예수님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다시 율법교사의 얘기로 돌아가자. 율법교사는 자신이 있었다. 이 상황이 오히려 자신의 의를 공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기회처럼 보였을 것이다. 동시에 예수라는 선생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이 율법교사의 마음도 아셨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셨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부적절한 질문을 적절한 질문으로 바꾸시고 그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다. 우리에게 익숙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야기 속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가상의 인물로서 “완전한 이웃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진정 영생 얻는 자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예수님의 질문 2(30-36절)

예수님은 질문에 앞서 한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현실이 배경이기는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예수님께서 만드신 비유다.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이”로 시작되는 비유가 많은데, 이 이야기도 그런 비유 중 하나다.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전 중에 강도를 만났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상술하지 않으셨다. 당시 여리고에는 레위인과 제사장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많이 살았고, 예루살렘으로 자주 왕래해야 했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 사람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을 수 있다. 혹은 예루살렘 순례자일 수도 있다. 다만 그런 경우 혼자 여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비유이니, 이럭 추측이 사실 불필요하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셔서 굳이 설정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우리도 그럴 필요는 없다.

여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일은 항상 있는 일이다. 두 도시는 약 22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그리 멀지 않지만 고도차가 약 1km정도가 된다. 즉, 길이 매우 가파르다는 말이다. 동굴과 바위도 많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노리는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는 길이었다. 한마디로 아주 위험한 길이었다. 이 길은 혼자 여행하면 안되는 길이었다. 그런 길을 어떤 사람이 혼자 가다가 강도를 만난 것이다. 충분히 현실에서도 있을 수 있는 상황으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신 것이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만든 후에, 그를 버리고 갔다. 그 사람의 다른 소유물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언급하지 않으셨지만,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겼음을 말씀하셨다. 이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는 의미다. 그리고 또 하나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에는 더욱 그랬다. 옷만 봐도 그 사람의 출신, 사회적 위치나 재력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옷까지 빼앗겨서 벌거벗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들이 제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맞아서 거의 죽게 되어 버려졌다. 절박한 상황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누군가 돕지 않는다면 서서히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침” 그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있었다.

10:31–32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먼저 제사장이 그 길을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자를 보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장 도움을 줄만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그가 이 상황을 봤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가 아닌가 판단이 안서는 모호한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눈 앞에 보였다. 하지만 그는 피하여 지나갔다. 정확히 말하면 반대 방향으로 갔다. 도움을 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피한 것이다. 그 뒤에 같은 상황을 마주한 레위인도 같은 선택을 했다.

만약 이 상황이 실제였다면 이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들은 강도가 아직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자신들도 위험에 처할 것을 염려해서 자리를 피한 것일 수도 있다. 도망한 것이 아니라 도움을 줄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이 사람을 도우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 사건이라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한 그런 상황이다.

하지만 지금 이것은 비유다. 그런 추측이 중요하지 않고 비유의 의도가 중요하다.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언급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하는 사람을 돕지 않고 지나쳤다고 말씀하신 것 뿐이다. 모든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이렇다고 비난하시려는 목적도 없다. 단지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이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주목하게 하실 뿐이다.

이들은 여기 율법교사와 같이 율법을 잘 알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돕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이들과는 대비되는 한 사람을 소개하신다.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앞의 제사장과 레위인은 유대인이었던 반면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다. 사마리아인들은 북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을 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결혼을 통해 태어난 자손들로 이루어진 혼혈민족이라 할 수 있다. 그 후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하셨을 때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며 되물었었고 요한은 그 이유를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고 밝혔다(요 4:9). 또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던 적도 있다.

8: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과 귀신 들렸다는 말이 함께 예수님을 비방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아니라 원수였다. 죽어가면 그냥 죽게 내버려둬야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에게 어던 선한 것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바로 이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겼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들은 강도 만난 자를 외면했지만, 율법교사를 포함한 유대인들의 기준에서는 이웃이 아닐 뿐 아니라 원수와 같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했다.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먼저 가까이 갔다. 보고 피하여 그 자리를 떠났던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다르게 이 사람은 가까이 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치료를 했다. 기름과 포도주가 얼마나 효과가 있느냐하는 것은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사람이 치료를 하고 죽어가는 자를 돌봤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나서 사마리아인은 이제 자기가 할 일은 끝났다고 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여관)으로 데려가 돌봐주었다. 강도 만난 사람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가진 것이 없었다. 그의 옷도 없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사람을 도와준 댓가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자기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해 준 것이다. 자기 붕대(혹은 옷?)를 감아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갔고 돌봐주었다. 자기 시간과 노력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끝나지 않았다.

10: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사마리아인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었다. 당시 기준으로 최소 2-3주, 혹은 그 이상의 숙박비에 해당되는 돈이다. 그 돈을 주며 이 사람을 돌봐줄 것을 주막 주인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추가로 비용이 들면 자기가 돌아올 때 모두 갚겠다고 백지 수표를 써주었다. 이 말은 당장은 자기 일 때문에 가야하지만 반드시 돌아와서 이 사람을 끝까지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의미다.

왜 이렇게 했는가?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다(33절). 이 사람을 도와준 것으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손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던 것은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다.

이 사마리아인의 모습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관대함’과 ‘희생’이다. 우리가 볼 때는 ‘이렇게까지 한다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일을 이 사람은 했다. 우리가 볼 때는 모르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상처를 치료해 준 것 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강도 만난 자를 외면했던 제사장과 레위인에 비하여 그것만으로도 사마리아인은 칭찬받을 만하다.

그래도 이왕 도와준 거 병원까지는 데려다 줘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마리아인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거기에 더 해서 직접 이 사람을 돌보고 필요한 치료 비용을 지불했다. 혹시라도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나중에라도 다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말 관대한 일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다. 자기 시간과 노력, 소유를 희생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유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렇게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예수님이 묘사한 이 사람은 정말로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만약 강도 만난 자가 사마리아인의 아들이었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볼까? 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을 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말이 안되지만, 강도 만난 자가 나라면 나는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여기 사마리아인처럼 하지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하지 않는다. 그게 내가 나를 사랑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그 말은 우리는 모두 나의 이웃을 여기 사마리아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내가 당연하게 나에게 그렇게 하는 것처럼 이웃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모습이고, 그렇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한 두 번 이런 호의를 남에게 베풀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나에게 그렇게 하듯이 항상 남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인 것이다. 그것이 영생의 기준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사마리아인이 유대인들보다 선하다고 가르치시려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차별을 버리라고 가르치시려고 하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하는 율법교사에게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려고 하셨다.

그래서 이제 물으신다.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사랑할 사람과 미워할 사람이 따로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제 위에서 율법교사는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예수님이 어떤 기준으로 이웃을 구분하든 자신은 그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혹 그게 아니라면 예수님의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질문은 그 전제를 부정했다. 이웃은 정해져있지 않다. 모든 사람이 내가 내 자신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 강도 만난 자를 사랑해야 할 이웃은 정해져있지 않았다. 제사장이든, 레위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누구든 그를 사랑해야 했다.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교사는 이렇게 답한다.

율법교사의 대답 2(37절 상)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

이 대답도 참 흥미롭다. 이야기 흐름 상 가장 자연스러운 대답은 “사마리아인입니다”인데,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답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이 자비를 베풀었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율법교사는 그가 한 모든 행위가 자비를 베푼 것, 즉 사랑한 것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다만,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인을 직접 거론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정확한 답이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만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야 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비를 베푼 자”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다. 그의 이웃이 되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내가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겨우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관대하게 나를 희생하며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정확히 그것이 율법이 의도하는 바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사람이 낮춰놓은 기준, 곧 전통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본래 율법의 기준, 하나님의 기준이다. 그것이 이웃 사랑의 의미이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다.

그런데 우린 그렇게 할 수 없다. 여기 율법교사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영생을 찾고 있던 율법교사가 이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대답 2(37절 하)

10:37 …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28절과 같은 의도로 하신 말씀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율법의 기준을 지킨다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영생에 합당하다고 생각했던 율법교사에게 예수님은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우소서”라고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이신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주신 것이다.

도전

본문의 율법교사는 율법에는 전문가였을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스스로 의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착각했다. 예수님은 그런 그가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다.

이 율법교사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알 수 없다. 그가 정말 정직하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 율법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면 그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진정한 의롭다 함을 얻는 은혜를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것이고, 그가 영생을 얻을 수 있었던 그 놀라운 기회를 이 땅에서 놓쳤다는 사실에 통곡하게 되었을 것이다.

율법교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영생을 찾는 우리들을 위해 기록된 말씀이다. 내가 만약 여기 율법교사처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한 의가 아니라 완전한 의를 원하신다. 우리가 만든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원하신다. 이 기준에 우리가 도달할 수는 없다.

그런 우리가 이 기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이렇게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우리와 비슷하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강도 만난 자를 사마리아인이 불쌍히 여겨서 자신을 희생하며 관대하게 사랑을 베풀어 구원해 주었던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죄인이었을 때에, 원수였을 때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통하여 영생의 길을 보여주셨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는 사람이 있다. 의인 호소인이 있고 진짜 의인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나의 의를 호소해도 소용없다. 하나님의 기준은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교만을 내려 놓으라. 그리고 겸손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 영생의 길을 오직 그곳에 있다. 그리고 그렇게 영생을 찾았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에 합당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님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바로 영생에 합당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