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에서와 야곱
본문 : 창세기 25장 19-34절
설교자 : 이병권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시며 이삭을 통해서 그 하신 약속을 이루어 가실 것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제 이삭에게 전달되었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본문에서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을 때 이삭의 나이가 육십 세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160세에 있었던 일입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살아있을 때의 일이고,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으니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후에도 15년을 더 살며 손자들의 재롱과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간순서로 따지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죽음 이전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저자는 마치 이 일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이 이미 죽은 것처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앞에서 마무리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제부터 새로운 세대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죽고 나서 본격적으로 이삭의 생애가 기록될 것 같았는데, 그런 예상과는 달리 막상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이삭보다는 야곱입니다. 실제로 창세기의 저자는 이삭과 그의 첫째 아들 에서 보다 둘째 아들 야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이야기는 26장에서 짧게 다루어지고, 그 후로 독립된 이삭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야곱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며, 상대적으로 작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의 가정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삭보다는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에 대한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부분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사건이고, 둘째 부분은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파는 사건입니다.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했습니다(20). 특별히 저자는 리브가를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인 브두엘의 딸이며 아람 족속인 라반의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야곱이 자신의 외삼촌인 라반을 찾아 갈 일을 염두에 두고 미리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해서 어머니인 사라가 죽은 후에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런 이삭에게 문제가 있다면, 오랜 시간 아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러했었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그러합니다. 훗날 야곱의 아내들도 그러한 일로 괴로워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집안의 여자들이 임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면,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일은 그냥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약속이 성취될 때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십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약속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비록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약속의 상속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없이 다음 상속자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이 이삭의 간구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21)
이삭의 기도가 응답되어 결혼하고 20년 만에 리브가가 임신합니다. 그런데 임신으로 기뻐했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리브가에게 근심이 생깁니다. 자신의 뱃속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심한 요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들들이 뱃속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는 말씀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정작 리브가는 영문도 모른 채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한 후 처음으로, 그것도 어렵게 경험하고 있는 임신입니다. 요즘처럼 초음파로 검사해서 태아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아마도 리브가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자신의 뱃속에 두 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입니다.
22절에 뱃속에 있는 아이들의 움직임을 묘사하기 위해 ‘싸우다’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강한 의미를 가집니다. ‘짓누르다, 으깨다, 산산조각 내다, 학대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만큼 뱃속에 있는 아이들의 움직임이 컸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태어난 후에 싸워도 충분히 싸울 날이 많은데, 그것도 부족했는지 뱃속에서부터 싸우는 아이들로 인해 그녀의 뱃속은 편안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두 아이가 이미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싸우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둘 사이에 있을 갈등과 다툼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반복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은 가족 간의 갈등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동생을 시기하여 살인을 저지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재산 때문에 같이 살 수 없었고, 이스마엘은 이삭을 조롱하다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속고 속이는 갈등을 겪게 되고, 뿐만 아니라 야곱은 외삼촌 라반과도 다투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아 버립니다.
이런 일은 단순히 성경 속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도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오는 갈등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오히려 더 많이 싸우는 걸까요? 가장 친밀한 부부사이에서 오히려 더 많은 갈등과 다툼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갈등이 만날 때 “어떻게” 와 “왜”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어떻게 저렇게 행동할 수 있지?’ ‘어떻게 저러냐?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람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 수도 있지!’ 하는 겁니다. “5-3=2” 어떤 오해도 세 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가정에서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영적인 가족인 교회에서도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서로 협력하여서 한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수고하려고 모인 사람들이 서로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어떻게”와 “왜”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이 좋아, 이렇게 해야 돼’, 이런 면에서 우리의 관심이 모아집니다. 그리고 그 ‘어떻게’를 달성하기 위해 때로 부딪히기도 하고 다투기도 합니다. 의견 차이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 안에서 뭔가를 할 때 ‘어떻게’ 보다 ‘왜’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왜 이것을 하는지 말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여러 부서가 크리스마스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크리스마스 행사를 준비하고, ‘어떻게’ 더 좋은 행사를 만들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왜’ 우리가 이것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만 생각한다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고 하는 일에 대해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종교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어떻게’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만 몰두한 나머지 ‘왜’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가운데 “어떻게”를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왜”를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는 물론, 성경에서 계속 강조되는 것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한 번 더 참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함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자신의 뱃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길이 없었던 리브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3)
리브가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응답은 네 마디의 간략한 시적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녀의 뱃속에 함께 할 수 없는 두 민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배가 요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 두 민족이 그 힘에 있어서 동일하지 않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강한 민족이 형이 아니라 동생입니다. 그래서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합니다.
어찌되었든 때가 되어 리브가는 두 아이를 출산합니다. 첫째 아이는 붉고 온몸에 털이 많아서 에서라 이름 지었고, 둘째 아이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 때문에 야곱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 당시 문화에서 이름 짓기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름을 지을 때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담거나 출생에 관련된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을 읽다보면 이름 짓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어떤 경우는 이름 짓는 게 장난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이름을 지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듭니다. 털이 많아서 에서이고, 발꿈치를 잡아서 야곱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좀 황당한 이름들이지만, 당시의 문화 안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이삭과 리브가는 특이한 아들 둘을 얻었습니다. 하나는 붉고 털 많은 자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발꿈치를 잡는 자입니다. 그리고 두 아들은 성장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달랐던 두 아들은 자라면서 더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에서는 능숙한 사냥꾼이 되어서 주로 들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인데 정말 다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아들의 다른 점이 아니라 그 다른 점으로 인해서 부모의 사랑이 갈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이삭과는 달리 야곱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빠는 형을 사랑하고, 엄마는 동생을 사랑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쉽게 예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부모의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사랑은 가정의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모가 자신과 더 잘 맞는 자녀를 사랑하고, 다른 자녀를 덜 사랑하는 정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문제이기보다 부부의 문제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부부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축복을 얻기 위해 속이고 속는 일이 전개되는 27장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자녀 양육의 최선은 건강한 부부관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부부사이가 좋지 못하면 그 안 좋은 영향이 그대로 자녀에게 전달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를 잘 양육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만큼, 서로에 대해서 나의 남편에게 그리고 나의 아내에게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이삭의 가정에 드디어 사건이 벌어집니다. 27절에 에서를 가리켜 익숙한 사냥꾼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단어의 표현 그대로 말하면 사냥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날, 사냥을 잘 아는 능숙한 사냥꾼인 에서가 사냥에 실패했는지 심히 피곤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사냥꾼이었던 에서는 사냥에 실패하고, 오히려 에서가 야곱의 사냥감이 되어서 야곱의 미끼를 덥석 무는 것입니다.
마침 야곱은 죽을 쑤고 있었고 에서는 그 죽을 먹기 원했습니다. 에서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30) 에서는 팥죽을 가리켜 ‘그 붉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상태 같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야곱은 형에게 말이 안 되는 거래를 요구합니다. 죽을 주는 대신 장자의 명분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 요구에 대해서 에서는 맹세까지 하며 장자의 명분은 야곱에게 팝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야곱이 어떻게 장자의 명분을 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가지고 있는 장자의 권리, 그 가치를 알고 자신의 세속적인 형으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경솔하고 감정적인 인물로 묘사되는데 그는 피곤하여 지쳤고, 굶주려 있었고, 장자의 명문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는 모습은 34절에 그의 행동을 말해주는 연속되는 동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에서는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감’으로써 자신이 장자의 명분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에서는 들에 사는 야생 동물처럼 자기 배를 채우는 일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능숙한 사냥꾼이기보다 형편없는 미끼에 넘어가 붙잡힌 짐승 같습니다.
에서가 정말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버린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분의 섭리 안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형이 동생을 섬길 거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두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에서는 쉽게 장자권을 내어주었고, 야곱은 필사적으로 장자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야곱이 자기 형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에서가 장자가 될 만한 자격이나 의지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본문의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12:16)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서의 세속적인 성품과 행동을 통해 경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욕구를 위해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희생하는 것, 일시적인 만족을 위해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에 대한 교훈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일시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 영적이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망령된 자가 되지 않도록, 정말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당장 얻을 수 있는 잠깐의 만족을 위해, 더 가치 있고 더 소중한 것을 희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깐의 쾌락을 위해 정말 귀중한 것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잠깐의 달콤함을 얻기 위해 더 유익한 것을 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일시적인 것과 바꾸지 마십시오. 반대로 일시적인 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영원한 것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 제대로 보고 제대로 구별하며 더 좋은 것을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순간의 편안함을 위해, 더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합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빼앗겨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가치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뒤늦게 후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에서는 훗날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지만 기회는 없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12:17)
우리는 이 경고의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때 날아가 버린 기회는, 그 소중한 가치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