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린양의 진노 Part1

본문: 요한계시록 6장

설교자: 조정의

진노에 관한 말씀을 왜 들어야 할까?(계 6-16장). 그렇지 않아도 수고와 슬픔이 가득한 세상에서, 험악한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란 말씀이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 사랑, 평안, 기쁨, 소망을 말하기도 바쁜데.

사람들은 자기 가려운 귀를 긁어줄 말씀을 사랑한다. 자기 사욕을 채워줄 설교자를 찾는다.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른다(딤후 4:3-4).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진리의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딤후 4:2). 진노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진리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많은 부분이 진노이다. 사실 사랑, 평안, 기쁨, 소망은 하나님의 공의, 심판, 진노, 멸망을 떠나서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사도 베드로도 계시록에 기록된 심판과 멸망의 날에 관하여 설교했다(벧후 3장). 실질적 권면이 따른다: ① 회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며 오래 참으시는 주님께 돌이켜라. ② 소망.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라. 만일 당신이 지금 멸망의 길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이 참고 기다리시는 오늘, 그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라. 만일 당신이 이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믿고 거룩함과 경건의 부르심을 잊어버리며 살고 있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 도둑 같이 임할 주의 날 앞에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지 각성하기를 바란다.

1. 어린양의 진노는 진짜다(1-8)

요한이 본 환상은 허구처럼 보일 수 있다. 마야 문명이 예고한 대재앙,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지구 종말처럼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하는. 하지만 어린양의 진노는 허구가 아니다. 신화가 아니다. 미래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다.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진짜 크고 무서운 진노의 날이 반드시 임할 것이다.

본문에 기록된 진노의 큰 날(6:17), 어린양의 진노(6:16)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겨냥한다.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진노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이 땅에 쏟아진다. 두루마리를 봉한 일곱 인을 하나씩 떼시면서 여섯 가지 심판이 순차적으로 내려지고, 마지막 일곱째 인이 떼어질 때 일곱 나팔(8-11장) 그리고 일곱 대접의 진노가 땅에 쏟아진다(16장, 15:1,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요한이 사용한 표현들, 구약성경에서 차용한 등장인물들(묵시록의 네 기수(슥 1:8-17, 6:1-8), 그들이 타고 있던 말의 색깔, 들고 있던 활, 저울, 면류관, 제단 아래 있던 영혼들, 그들에게 주신 흰 두루마기, 두루마리 말리는 것처럼 떠나가는 하늘 등 확실히 상징적인 요소가 있다.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여섯 인의 심판은 모두 실제 이 땅에 쏟아질 그리스도의 심판을 가리킨다. 먼저 첫째부터 넷째 인의 심판을 살펴보자. 진노의 시작, 전반부다.

전반부 심판은 하나의 패턴이 있다. 어린양이 인을 떼시고, 네 생물 중 하나가 우렛소리같이 “오라”라고 하면, 말을 탄 자가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높은 반열의 천사가 심판을 수행하는데, 각각의 천사가 수행할 심판의 내용이 바로 말 탄 자가 상징하는 ①평화, ②전쟁, ③기근, ④사망이다. 

① (가짜) 평화: 흰 말은 전쟁의 승리를 상징한다(계 19장). 면류관도 승리한 자가 취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는 말은 이 세상을 계속해서 정복하여 세계적인 평화를 만들어내는 막강한 세력을 연상시킨다(2절). 이것이 땅에 내려질 심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권력이 만든 평화는 참된 것이 아니라 여러 속임수와 기만을 통한 가짜 평화일 것이다.

② 전쟁: 둘째 인을 떼실 때 내려진 심판은 전쟁이다. 붉은 말이 상징하는 것이 바로 피 흘리는 전쟁이다. 거짓으로 맺어진 화평은 금세 제거된다. 서로 죽고 죽이는(‘살육하다’) 다툼과 전쟁이 크게 일어난다(큰 칼). 단순 분쟁이 아니라 대량 살상을 낳는.

기근: 셋째 인을 떼실 때 내려진 심판은 기근이다. 여기저기서 일어난 전쟁의 결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재앙이다. 검은 말을 탄 자는 손에 저울을 가졌다(5절). 저울은 밀, 보리 등을 판매할 때 값을 매기는 도구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말은 하루종일 일해도 한 사람이 먹을 분량의 음식밖에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예견한다(6:6). 원래 가격의 12~5배로 뛴 것이다. 기본적인 음식은 구하기 힘들어지고, 감람유와 포도주처럼 음식을 요리하거나 물을 정화시킬 때 필요한 식물도 긴급 보호가 필요한 상황이다.

④ 사망: 넷째 인을 떼실 때 내려진 심판은 사망이다. 청황색(시체 색) 말을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다(8절). 그 뒤를 따르는 건 음부(하데스, 죽어서 멸망할 자가 처할 운명, 따라다니며 사망한 자를 수집)였다. 앞에 일어난 심판인 (칼), 흉년에 이어서 사망(어떤 원인으로든), 땅의 짐승들(흑사병-쥐, 말라리아-모기, 에스겔 14장 21절의 ‘칼, 기근, 사나운 짐승, 전염병’의 재앙들.)로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는다(“1/4을 죽일 권세”우리말성경,, “땅의 주민들을 멸하는 권세”새번역). 지금으로 치면 19억의 인구 사망.

종합하면 어린양의 진노가 이 땅에 쏟아지기 시작하는 그날(진노의 큰 날)에는 먼저 이 세상을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통제할 권세가 나타날 것이다. 그는 마치 메시야가 된 것인 양 세상을 미혹하여 자기를 따르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참된 평화는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난리와 전쟁, 기근과 죽음이 이 땅 일부가 아니라 전체에 미칠 것이다. 이것이 진노의 시작이다. 이것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4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 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4-8)

당신은 어린양의 진노가 진짜로 임할 것을 믿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진다는 걸 참으로 믿는 자는 마땅히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회개/소망.

2. 어린양의 진노는 곧이다(9-11)

사도 베드로는 종말을 경고하며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벧후 3:9). 우리가 어린양의 진노를 깊이 생각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짜라고 믿지 않거나 믿지만 더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니 오늘 내 삶에 큰 상관이 없다고 본다.

하지만 다섯째 인을 떼실 때 요한이 본 장면을 보면 하나님은 마냥 시간을 지체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정확한 계획을 가지고 그 때를 계산하고 계신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 등장한 인물은 영혼들이다(9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인데,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다가 순교 당한 자들을 가리킨다(제단, 삶을 주께 바침). 순교자들이 주님께 간절히 요청한다: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이것은 원망이나 불평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참되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분이 모든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진정한 주권자임을 인정했다. 다만 그들이 구한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공의가 이 땅에 더 빨리 실현되는 것이었다. 그들의 피를 흘리게 만든 불의한 자들에게 합당한 심판을 속히 내려 주시기를, 이 땅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완전히 멸하여 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어느 때까지라는 말에서 그때가 하루빨리 임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느껴진다.

주님의 응답은 무엇인가?(11절). 먼저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셨다. 거룩하고 의로운 예복을 각각 입게 하신다. 그들의 참된 믿음과 그에 따른 행위에 걸맞은 영광을 입히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죽임당할 동무 종들, 형제자매들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종말을 대하는 바른 태도를 배운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 주님이 오셔서 이 어그러진 세대를 심판하실 것인지 궁금해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말씀대로 사는 삶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딘 것처럼 보이는 주님의 심판이 빨리 임하길 구한다. 하지만 주께서 원하시는 건 그때와 시기를 주님께 속한 것으로 알고 다른 신실했던 주님의 종들처럼 끝까지 충성하는 것이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는 것이다(벧후 3:14).

당신은 신실하게 주를 섬기다가 죽임당한 형제자매들의 동무 종들이 되어 그들처럼 살고 죽기를 원하는가? 예수님께서 흰 두루마기를 입히실 그 성도 중 하나가 되길 바라는가? 만일 진실로 그렇다면, 당신은 주 오심을 간절히 사모할 것이다. 주께서 도둑 같이 갑자기 오셔도 그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산다면, 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한 동무들과 전혀 다른 삶을 한다면, 당신이 주 오심을 기다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당신은 곧 불타버릴 이 땅에 인생을 낭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회개하라. 어린양의 진노는 곧이다.

3. 어린양의 진노는 끝이다(12-17)

거짓 평화, 전쟁, 기근, 사망 등 어린양의 진노 전반부에 일어난 재앙은 역사적으로 우리가 조금은 경험한 것들이다. 물론 규모의 차이는 있다(세계적이고 1/4를 죽이는 규모는 아니었다). 어린양의 진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심판은 끝까지 이른다. 여섯째 인을 떼실 때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12절).

먼저 땅에 큰 지진이 났다(12절). 14절을 보면 이 지진이 얼마나 큰지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졌다. 하늘에선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졌다. 달은 온통 피같이 됐다. 단지 해와 달의 색깔이 변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지각변동으로 인해(화산) 연기나 거대한 구름이 해와 달의 빛을 가리거나 새어 나온 빛이 붉게 물들어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하늘 위에서는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졌다(13절). 유성우나 소행성이 떨어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심지어 하늘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갔다(14절). 정말 무서운 재앙이 하늘과 땅을 뒤덮은 것이다. 

그때 모두가 어린양의 진노를 피해 도망갔다. 땅의 임금들(정치적 권세자), 왕족들(사회적 권세자), 장군들(군사적 권세자), 부자들(경제적 권세자), 강한 자들, 모든 종, 자유인 가릴 것 없이 모두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었다. 진노를 피해보려고(15절). 하지만 어린양의 진노는 피할 수 없다. 끝을 향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세상을 돌이키게 하려고 심판하시는 게 아니다. 멸망시키려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이들이 산들과 바위에게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라: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16-17절).

그들은 살아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구원의 소망을 바랄 수 없는 자기들의 운명을 직감했다. 다만 더 큰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지 않도록 산과 바위가 우리를 덮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외친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를 당하느니 차라리 지금 멸망 받기 원한다고 절규하는 것이다. 왜? 그 누구도 어린양의 진노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날에 있을 주님의 심판은 회개를 요구하는 심판이 아니라 전멸시키기 위한 심판이다. 이걸로 끝이다.  

다만 주님께서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알리시는 이유는 아직 진노의 날이 임하지 않은 오늘 그 음성을 듣고 회개하도록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은(요 12:47) 곧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판하기 위해 오실 것이다. 당신이 회개하지 않고 그날을 맞이한다면, 당신에게 쏟아질 어린양의 진노 앞에, 또 수없이 경고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완강하게 거부했던 당신의 완악함과 무지함 앞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참으로 사랑인 것은 당신이 받아야 할 이 진노를 어린양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다. 평안인 것은 이 진노에서 예수님께 신실한 자를 구하시기 때문이다. 기쁨인 것은 멸망에서 영생으로 영원히 옮겨졌기 때문이고, 소망인 것은 우리가 믿는 이 사실이 실제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진노 없이 어린양의 사랑을 우리는 제대로 알 수 없다. 재앙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면 은혜의 풍성함도 헤아리지 못한다. 심판의 무서움을 제대로 알아야 우리는 영광의 탁월함에 무궁한 감사를 드릴 수 있다.

두 가지 질문을 기억하라:

① 나는 어린양의 진노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② 나는 어린양의 진노 앞에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