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Part 2
본문: 창세기 32장 22~32절
설교자: 이병권

 

지난 시간에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도 지난시간에 이어서 같은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부제는 브니엘, 하나님을 만나다입니다.

32장에서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야곱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 야곱이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야곱은 가나안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형, 에서를 만나야 했습니다. 에서를 만나는 일은 지난 20년 동안 덮어두었던 문제입니다. 야곱은 지금 그 문제를 직면해야했고,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야곱이 종을 통해 들은 소식은 에서가 장정 400명을 이끌고 야곱을 만나기 위해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야곱에 대한 에서의 분노가 여전하다면 생명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나름의 준비를 합니다. 자신의 진영을 둘로 나눕니다. 그래서 한 진영이 공격을 받더라도 다른 진영은 피할 수 있도록 나름의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불안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의 감정을 달래기 위해서 많은 예물을 보냅니다. 말씀 그대로의 표현으로 하면 그 예물로 형의 얼굴을 덮으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하더라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20절에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야곱은 ‘혹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주셨지만, 그래서 야곱이 “마하나임이라고 고백했지만 확신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지만, ‘혹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전히 두렵고,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답답한 상황입니다. 이전에 야곱에게 있었던 일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했던 일들, 지금까지 나를 보호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모든 것은 지난 추억이 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하면 앞으로의 일은 아무 문제없을 것 같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데 막상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의 믿음의 크기가 얼마나 작은지, 나의 부족함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아니구나!’ 하고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직접 경험하고 나면 정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인생의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반복해서 찾아오는 인생의 어려움은 우리에게 또 새로운 문제가 됩니다. 그 문제는 또 다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우리가 전에 한 번도 풀어보지 못했던 문제를 푸는 것처럼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는 일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지만,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일은 또 다른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이러한 야곱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본문을 살펴보고 생각해보겠습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22-24a)

야곱은 이제 곧 형을 만나야 합니다. 형의 마음이 어떠한지 야곱은 알 수 없습니다. 야곱에 대한 복수심과 분노가 여전할까요? 아니면 야곱이 보낸 예물을 받고서 마음이 좀 나아졌을까요? 이것은 야곱의 생사가 달린 문제인데 야곱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불안함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입니다. 야곱은 그 밤에 가족들을 먼저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소유도 건너가게 합니다. 이제 야곱은 혼자입니다. 야곱은 얍복이라는 시내를 앞에 두고 혼자 남아있습니다.

왜 혼자 남았는지 다른 설명은 없습니다. 야곱에게 어떤 계획이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야곱이 혼자 남아있었고, 이렇게 야곱이 혼자 있을 때 특별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24b) 이런 상황에서 야곱은 어느 한 사람과 씨름을 합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과 야곱은 밤새도록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씨름을 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는 것이 많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갑자기 나타나 씨름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한 사람이 야곱에게 나타나서 말합니다. 혹시 지금 시간이 괜찮으면, 저랑 씨름 한 판 하실래요?’ 이런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이에 대해서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5-26)

왜 이 사람은 야곱을 이기지 못했을까요? 야곱이 그만큼 씨름을 잘했던 걸까요? 그런데 이 사람은 씨름을 하다가 왜 야곱의 허벅지를 친 걸까요? 반칙을 한 거 아닌가요? 처음부터 서로를 공격할 수 있었던 걸까요? 게다가 날이 새려고 하니까 왜 이 사람은 떠나려고 했을까요?

본문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자세히 답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씨름보다 뒤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입니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씨름은 두 사람의 대화를 기록하기 위해서 그 배경으로 간략하게 언급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씨름보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씨름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 씨름에 대해서 실제로 상대방을 붙들고 겨루는 씨름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의 씨름, 그래서 기도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얼굴을 맞대고 씨름하셨다는 것이 오래 전부터 사람들에게 논란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사람과 씨름할 수 있으며, 어떻게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고도 살 수 있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야곱과 씨름한 이가 하나님이 아니라 천사라고 했으며, 이 사건을 기도를 통한 영적인 씨름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말에도 보면,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온 힘으로 노력하는 것을 씨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야곱이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로 씨름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받은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해석이 맞는 걸까요? 여기 씨름이 진짜 씨름일까요? 아니면 기도를 씨름이라고 표현한 걸까요? 어떻게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한 해석일까요? 몇 가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씨름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어원이 먼지로부터 나왔는데, 그래서 먼지를 뒤집어 쓸 정도로 서로 힘을 겨루는 것을 뜻합니다. 이 단어가 기도로 사용된 경우는 없습니다.

둘째, 실제로 야곱은 이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서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일을 겪게 됩니다. 기도로 생각하면 이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기도해서 허벅지에 쥐가 났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셋째, 24절에 보면 씨름을 시작하는 주어가 어떤 사람입니다. 야곱이 씨름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씨름을 시작합니다. 만약 기도로 보면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기도한 것이 되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은 해석이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말씀하는 씨름은 진짜 씨름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쨌든 어떤 사람이 찾아와 얍복에서 야곱과 씨름을 합니다. 이 사람이 날 새려고 하자 떠나가려고 했다는 것은 밤에 야곱을 찾아오는 것으로 계획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낮에 야곱을 찾아왔다면 야곱은 그의 정체를 눈치 챘을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가 누구와 씨름을 하는 건지를 알았다면,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둘째 치고, 씨름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은 밤중이라 처음에는 이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점차 이 사람의 정체를 파악했다는 것을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26-29)

이 사람의 정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은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을 축복해주기를 구하며 매달립니다. 그러자 그가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몰라서 물어보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야곱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말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자인지 돌아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야곱은 자기 이름을 말하면서 스스로를 생각합니다. 저는 속이는 자, 야곱입니다. 저는 형을 속였고, 아버지를 속였고, 그러다가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하여 여기까지 오게 된 야곱입니다. 그런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여기서 옛날 이름 ‘야곱’과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이 대조됩니다. 이제 야곱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첫 번째 경우는 ‘하나님이 싸우신다, 하나님이 겨루신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하나님과 싸운다, 하나님과 겨룬다’는 뜻입니다. 이름을 해석하는 일반적인 방법을 따르면 첫 번째 경우로 생각할 수 있고, 본문에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두 번째 경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예언적인 의미가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바꾸는 것은 야곱의 인생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이름을 바꾸시는 분이 그러한 권위가 있는 분임을 알려줍니다. 그러서인지 야곱은 자신의 이름을 바꾸신 분의 이름을 묻습니다. 자신이 짐작하는 것이 맞는지 분명히 하려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입니다.

이 대답은 이렇게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아, 너는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단 말이냐?’ 야곱은 이제 그 분이 누구였는지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30-31)

야곱은 매우 특별하고도 두려운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해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곳 이름을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전날 어두울 때 시작되었던 일이 다음날 해가 뜨는 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아지는 것처럼 야곱을 덮고 있던 어둠도 사라질 것입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인생의 새 날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상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남기신 흔적입니다. 그는 다리를 절면서 브니엘을 지나갑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이 사건으로 발전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음식에 대한 규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창세기를 기록했던 그 당시에도 허벅지 관절에 있는 힘줄을 먹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규정은 율법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관습으로 지켜왔던 왔던 것인데, 창세기의 저자는 그 관습에 대한 근거와 의미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야곱은 한 사람의 방문으로 그와 씨름해야 했으며, 그가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옛적에 아브라함이 자신을 방문하신 하나님을 만났던 것처럼, 야곱도 자신을 방문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감히 예상할 수 없을 만큼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도 생명을 건졌습니다. 에서로부터 구해달라는 그의 기도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되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생명을 건졌다면, 에서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생명을 건질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와도 대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브니엘의 이 사건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보통 여기서 먼저 언급이 되는 교훈은 축복을 향한 야곱의 끈질김입니다. 밤이 새도록 씨름하며 상대방을 놓지 않고 매달렸던 야곱처럼 우리도 축복에 대해서 그러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갈망하며 끈질기게 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와는 좀 다른 교훈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이 본문의 초점을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추고 싶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에 혼자서 초조함으로 밤을 보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미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주셨고, 지금까지 함께 하심을 나타내셨지만, 여전히 불안해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와 씨름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가셔서 씨름을 하셨습니다. 무엇이 더 놀라운 일일까요? 야곱이 밤을 새도록 씨름한 것이 놀라운 일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밤새도록 씨름한 것이 놀라운 일일까요?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힘이 부족해서 야곱을 이길 수 없었을까요? 야곱이 씨름기술이 너무 좋아서 밤새도록 버틸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날이 새기까지 뭐 하러 그렇게 하신 겁니까? 하나님은 자신이 가지고 계신 선하신 계획 가운데 야곱을 빚으시기 위해서 야곱을 찾아오셨고 그에게 맞는 눈높이로 그와 상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보게 하시고, 그의 이름을 바꾸시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주셨습니다. 또 한 번의 인생의 전환점을,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때 야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브니엘”,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여 살아남은 야곱은 당연히 에서의 얼굴을 마주하고도 살아남을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었던 에서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해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수준에 맞게 낮아지셔서 그와 함께 하셨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셨고, 그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 그의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 축복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야곱에게 있는 힘의 근원은 씨름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자신의 허벅지가 아닙니다. 야곱의 힘은, 그의 능력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야곱의 자질이나 노력으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성취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이 교훈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스라엘의 힘은 백성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저자가 당시의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입니다. 작고 연약한 이스라엘, 자기 땅도 없이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은 애굽에서 해방되었고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이기고 당당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그들과 함께 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사람의 능력이나 지혜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 섭리 가운데 은혜로 주어집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그의 백성들을 무력화시키십니다. 하나님 말고는 답이 없는 상황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날마다 반복되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나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나의 힘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나를 일으키는 힘이라는 것을, 그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생명이 보전되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야곱이 경험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브니엘의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힘이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에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야곱은 떠오르는 태양을 맞으며 다리를 절뚝거리며 그 길을 걸어갑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셔서 그를 빚으시며 그에게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이 걸을 때 마다 자신과 함께 하셨던, 자기와 씨름한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흔적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새겨진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힘들 때마다, 두려울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날 때마다, 그 흔적을 바라보시고 내 힘의 원천이 거기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매일의 삶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약속을 신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