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야곱의 자녀들
본문 : 창세기 29장 31절 ~ 30장 24절
설교자 : 이병권
두 명의 아내가 있는 야곱의 가정에 출산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레아와 라헬, 서로에 대한 시기심은 자녀 낳기 싸움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 본문입니다. 열두 명의 출생이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열 한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나옵니다. 야곱의 딸로서 유일하게 기록된 ‘디나’를 제외하면, 아들들은 모두 이름과 그 이름의 의미까지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야곱의 아내들과 얻은 자녀들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레아를 통해 얻은 자녀들입니다(29:31-35). 둘째 부분은 라헬의 여종인 빌하를 통해 얻은 자녀들입니다(30:1-8). 셋째 부분은 레아의 여종인 실바를 통해 얻은 자녀들입니다(9-13). 넷째 부분은 다시 레아를 통해 얻은 자녀들입니다(14-21). 다섯째 부분은 라헬을 통해 얻은 자녀입니다(22-24). 이 다섯 부분은 자녀가 잉태된 동기, 임신과 출산, 그리고 이름을 짓고 그 의미를 설명하는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첫째 부분, 레아를 통해 얻은 자녀들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31) 야곱은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난 순간부터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며, 레아와 결혼한 후에도 지나치게 라헬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의 뜻은 ‘미워하다’입니다. 야곱은 레아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은 정도보다는 더 강하게 레아를 싫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아내는 가정에서 다른 아내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밀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던 레아를 하나님이 위로해주셨습니다.
레아는 자신이 나은 첫째 아들의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인 뜻은 ‘보라, 아들이다’라는 뜻인데, 레아는 이 아이의 이름에 ‘주님이 나의 고통을 살피시고 나에게 아이를 주셨다’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레아는 기대합니다. 자신이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부터는 남편이 자신을 사랑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레아가 두 번째 아들을 낳아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합니다. 시므온은 ‘들으심’이라는 뜻인데, 레아는 아이에게 이 이름을 주면서 ‘주님이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함을 들으셨다’라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은 아내의 애절함이 담겨있습니다. 레아는 하나님이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돌아보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레아는 세 번째 아들을 낳아 이름을 “레위”라고 합니다. 레위는 ‘연합’을 뜻합니다. 레아는 ‘내가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 남편도 별 수 없이 나와 연합하겠지’ 하는 기대를 가집니다. 또한 레아는 네 번째 아들을 낳는데, 이름을 “유다”라고 합니다. 유다는 ‘찬양받음’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제부터는 여호와를 찬양하겠다’는 레아의 결심을 담긴 이름입니다.
하지만 아들을 네 명이나 낳은 레아는 마냥 기쁘지만은 않습니다. 여기에는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의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레아는 아이를 낳을 때마다 남편이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을 소망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때마다 레아가 느꼈을 실망과 좌절은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녀에게 많은 자녀를 허락하십니다. 특별히 레아는 자신의 아버지가 숭배하던 우상이 아니라 남편이 섬기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신의 괴로움을 돌보시고, 탄식을 들으시며, 그분이 자신에게 아이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레아는 남편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레아는 네 명의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출산은 잠시 휴식기를 가집니다.
이어지는 30장 1절부터는 둘째 부분인 빌하를 통해 얻은 자녀들입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1)
언니 레아를 시기하는 라헬이 남편에게 투정을 부립니다.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아이가 없는 자신에게 다른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아이를 낳게 하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라헬의 이런 모습은 라헬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이해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투정을 들은 야곱은 어떻게 했을까요? 다정하게 그녀를 위로하며 격려해주었을까요?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2) 야곱은 투정하는 라헬을 호되게 야단칩니다. 사람의 생명은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왜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 아이를 주지 않았겠습니까? 야곱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이 자녀를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를 통해서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은 결코 우연으로 생겨난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기에 생명을 함부로 대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주인 되십니다.
자신이 임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식한 라헬은 인간적인 대안을 찾습니다. 그녀가 야곱과 결혼할 때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었던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서, 그 여종을 통해서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옛적에 사라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일을 생각나게 합니다. 적어도 그때에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한 명도 없을 때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미 레아가 낳은 야곱의 아들이 있는 상황입니다. 라헬은 언니에 대한 시기심에 사로 잡혀서 그릇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어려움을 가져가고 그분의 도움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분의 때를 기다리기보다, 잘못된 방법을 선택합니다.
라헬의 기대대로 빌하는 그녀에게 아들을 낳아 줍니다. 라헬은 빌하를 통해 얻은 첫째 아들의 이름을 “단”이라고 합니다. 단은 ‘판단하다’ 혹은 ‘재판관’이라는 뜻인데, 라헬은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 ‘하나님이 나의 호소를 들으시고, 나의 억울함을 풀어 주셨다’라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어서 빌하가 또 아들을 낳게 되는데 라헬은 이 둘째 아들의 이름을 “납달리”라고 합니다. 납달리는 ‘씨름, 겨루기’라는 뜻인데, 라헬은 납달리라는 이름 지으며 ‘내가 언니와 크게 겨루어서 마침내 이겼다’라고 합니다. 라헬의 이름 짓기는 라헬의 믿음이 레아만큼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름들은 단지 언니에 대한 시기심과 갈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9절부터 시작되는 셋째 부분은 실바를 통해 얻은 자녀들입니다. 레아는 네 아들을 낳고 출산이 멈춘 상태에서 라헬이 여종을 통해 아들을 낳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습니다. ‘너만 여종이 있니? 나도 여종이 있다!’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레아는 라헬이 했던 일을 똑같이 따라 합니다. 결혼할 때 아버지가 준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 아이 낳게 합니다. 두 자매의 시기심으로 시작된 아이 낳기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두 자매의 경쟁도 문제이지만, 남편으로서 야곱은 둘을 중재하고 잘 다스려야 했는데 아내들의 경쟁에 휘둘려서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실바는 레아의 원대로 야곱을 통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레아는 이 아들에게 “갓”이라는 이름을 줍니다. 갓은 ‘행운’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이 이름을 지으면서 ‘복되도다’라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실바가 다시 임신하여 이번에도 아들을 낳는데, 레아는 아들의 이름을 “아셀”이라고 합니다. 아셀은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행복하다. 여인들이 나를 잘되었다고 말하리라’하는 의미에서 아들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세상 여인들이 그녀를 부러워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아들을 통해 자신이 행복해 질 거라고 생각했고, 다른 여인들의 지지와 칭찬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이미 네 명의 아들이 있었던 레아가 무엇 때문에 여종을 통해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이것은 레아가 가지고 있던 라헬에 대한 시기심과 남편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고자 하는 갈망의 결과였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기대와 달리 그것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14절부터는 넷째 부분, 다시 레아를 통해 얻은 자녀들입니다. 레아의 첫째 아들 르우벤은 합환채를 발견하고, 어머니 레아에게 줍니다. 합환채은 지중해와 가나안 지역에 자라는 풀로
옛날에는 마취제로 사용될 만큼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식물인데, 남자에게는 정력제로, 여자에게는 불임을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뿌리가 사람의 모습과 비슷해서 마술적인 힘을 지닌 것으로 여겨져 종교예식에도 많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라헬은 합환채를 얻기 위해 레아에게 야곱을 줍니다. 합환채와 야곱을 서로 바꾼 것입니다. 두 자매들 사이에 이루어진 거래를 통해 레아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더 낳게 됩니다. 반면 라헬은 합환채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자녀를 낳지 못합니다. 성경은 여기서 자녀를 낳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합환채를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밝힙니다.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17) 레아는 이 아들의 이름을 “잇사갈”이라고 합니다. 잇사갈은 ‘보상하다, 몸값을 주다’라는 뜻인데, ‘내가 나의 여종을 남편에게 준 값을 하나님이 갚아 주셨다’고 이름의 의미를 말합니다. 레아는 자신이 여종을 주면서까지 남편에게 헌신적으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헤아려 주시고 갚아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이건은 레아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레아가 아들을 낳은 것은 그녀가 여종을 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레아에게 다시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어서 레아는 다시 임신하여 여섯 번째 아들을 낳습니다.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존귀함’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선물’이라는 의미와 ‘높인다’는 의미가 합쳐진 것입니다. 레아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후한 선물을 주셨으니 이제 남편이 자신을 아내로 높일 것이다.‘ 자신을 인정할 거라고 말합니다. 레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이라는 선물을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남편도 자신을 높여 줄 것을, 자신을 아내로 인정해줄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레아는 여전히 남편에게 그러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레아는 “디나”를 낳습니다. 본문에 ‘디나’라는 이름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디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지파를 형성하지 않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름에 대한 소개는 족보의 개념을 가집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시작되었는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디나는 딸이지만, 이름이 기록되었고 그것에 이유가 있습니다. 훗날 디나는 34장에 나오는 세겜 족속 몰살 사건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22절부터는 다섯째 부분, 라헬을 통해 얻은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22) 하나님께서 라헬을 생각하셨습니다. 여기 이 말은 ‘기억하셨다’는 뜻입니다. 옛적에 홍수 심판 가운데 방주 안에 있는 노아를 기억하신 것처럼, 소돔을 심판하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롯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녀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녀에게 아들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라헬은 아들의 이름을 “요셉”이라고 합니다. 요셉은 ‘주께서 더하시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어주셨으며, 하나님이 나에게 또 다른 아들을 더하여 주시면 좋겠다’는 희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또 다른 아이를 낳고자 하는 라헬입니다. 전과는 달리 라헬의 마음이 많이 낮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헬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의 수치를 씻어주신 것을 찬양하고, 또 다른 아들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훗날 라헬은 자신의 바람대로 한 명의 아들을 더 낳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로 인해 라헬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레아와 라헬의 아이 낳기 경쟁은 마무리됩니다. 야곱의 가정이 겪고 있는 갈등, 가정 안에서의 갈등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가지만 가정 밖에서 갈등은 계속됩니다. 그것은 라반과의 갈등인데, 그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여자 사이에서 계속되는 경쟁을 봅니다. 레아는 자녀를 낳는 복을 받았지만, 자기 남편의 사랑은 받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았지만, 자녀를 낳는 복은 받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보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마음을 빼앗겼고, 그로 인해 서로에 대한 질투와 미움은 커져갔습니다.
이 두 사람의 경쟁은 그들이 가지는 연약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자녀를 허락하신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남편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서로 투쟁을 합니다. 자녀를 낳는 것이 사랑을 받는 것이며, 자녀를 낳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녀에 대한 축복이, 오히려 이 가정을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가정의 모습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벧엘에서의 약속을 성취해가십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야곱을 번성케 하시고 야곱을 큰 민족이 되게 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물론, 그 과정은 그들의 죄 성이 드러나는 상황이었고,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시기와 다툼의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그분의 섭리 가운데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곱의 가정 안에서 나타난 이 갈등을 보면서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가정 안에서의 편애의 위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보면서 거듭 이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이 자녀에 대한 것이 되었든, 아내에 대한 것이 되었든, 가정에서의 편애는 시기와 다툼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고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다행히 우리 중에는 배우자에 대한 편애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한 명의 배우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며,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둘 이상의 자녀를 두신 분들은 편애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의 그릇된 갈망의 위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은 가정 안에서든 밖에서든 사랑과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이러한 갈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된 방법으로 그 갈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단지 일시적인 것으로 그 갈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세속적인 것으로, 물질적인 것으로 그것을 채우려 할 때 우리는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두고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은 정말 값진 명품을 싸구려 짝퉁과 바꾸는 비극적인 일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뜻 가운데 사람을 택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누리는 복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각 사람이 다른 것입니다.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많은 책임이 따릅니다. 그런데 받은 것에 감사하기는커녕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없는 정말 사소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고 긍휼이 풍성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죄로 가득한 세상을 보면서 낙심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을 수 있고, 나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을 경험할 때 당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나의 기대와 다른 결과들을 보면서 엉뚱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이 어떤 모습이든, 미움을 받거나, 무시를 당하거나, 어떤 어려움을 당하거나, 걱정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공의와 긍휼 가운데 주권적으로 복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태를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십니다. 주권적으로 사람을 택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가지고 경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서로를 비교하여 시기하며, 힘겨루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시기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싸우려고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 은혜를 나누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하며 인내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3장 13-1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