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야곱과 라헬 그리고 라반
본문: 창세기 29장 1~30절
설교자: 이병권

 

수요일에 계속 창세기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야곱까지 왔고, 지난 시간에 야곱이 집을 떠나 벧엘에 이르러서 하나님을 만난 장면까지 살펴봤습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은 야곱이 목적지까지 잘 도착해서 외삼촌인 라반의 집에 머물며 그의 딸들과 결혼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라반의 딸과 결혼하는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기 인생의 맞수를 만났습니다.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난 것입니다. 그동안은 쉬웠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생각했던 형이었고, 나이가 들어서 눈이 어두웠던 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외삼촌 라반은 다릅니다. 야곱은 제대로 임자를 만났습니다. 그럼 야곱이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 살펴보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14절까지 우물에 있었던 일과 15절에서 30절까지 라반의 집에 있었던 일입니다. 라헬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야곱이 라헬을 만나는 내용과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는 내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라반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야곱이 라반을 외삼촌으로 만나는 내용과 야곱이 라반을 장인어른으로 봉사하는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야곱이 라헬을 만나는 장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1)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다시 길을 떠나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합니다. 처음 가는 먼 길을 혼자서 걸어왔습니다.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 “야곱이 길을 떠나”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직역을 하면 ‘야곱이 자신의 발을 들어 올렸다’는 의미입니다. 좀 더 느낌을 살려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야곱이 자기 발을 힘차게 내디뎌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야곱의 무거운 발을 가볍게 했을 것입니다. 야곱에게 새로운 힘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하신다고, 지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짧은 구절에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기에 야곱이 여기까지 무사히 이를 수 있었습니다. 야곱이 어떤 과정을 겪으며 도착했는지 성경에 다른 설명이 없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은 계속됩니다. 2절에 보면, 야곱은 우물에 도착합니다. 뭔가 비슷한 장면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옛적에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왔다가 리브가를 만났던 장면입니다. 그 때에도 배경이 우물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야곱이 여기까지 온 것을 두고 하나님이 인도하셨다고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야곱이 이렇게 신속하게 목적지에 이르렀고, 또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우물에 있음을 알려주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종을 리브가에게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지금은 야곱을 라헬에게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 장면을 기록하는 방식에서 특별함이 있는데, 야곱이 벧엘에서 꿈을 꾸었을 때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즉’이라고 기록하며 야곱이 세 가지를 봤었는데, 이번에도 야곱이 세 가지를 봅니다. 꿈에서와 같이 모두 같은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한 번만 번역이 되었고, 다른 두 번은 생략되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직역을 한 성경을 참고 하면, “보라, 들에 우물이 있고, 또 보라, 그 곁에 양 떼 세 무리가 누워있더라”(2) “보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들과 함께 오느니라”(6)

야곱이 본 세 가지는 우물과 우물곁에 양 떼 그리고 라헬입니다. 벧엘에서 야곱이 본 것과 병행해서 기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소가 있고 그 장소에 등장하는 주변인물 그리고 핵심인물이 나옵니다.

야곱의 꿈에서는 하늘에 이르는 사닥다리라는 장소를 보았고, 그곳을 오르내리는 주변인물,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핵심인물인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여기서도 야곱은 우물이라는 장소를 보고, 그 장소에 있는 양떼와 목자들을 보고, 핵심인물인 라헬을 봅니다. 연극으로 말하면, 무대가 셋팅 되어 있고, 주변인물이 나와서 분위기를 고조시킨 다음에 그러고 나서 주연배우가 짠! 하고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물에서 야곱은 라헬을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딱 딱 들어맞으며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여자가 양을 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라헬이 우물을 찾은 때도 목자들이 우물에 모이는 시간은 아니었습니다(7절). 그럼에도 라헬이 우물을 찾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라헬은 양 떼를 몰고 우물에 나타납니다. 재미있는 것이 라헬의 이름의 뜻인데, 라헬은 ‘암 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풀이하면, 양이 양을 데리고 왔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보자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재빨리 나아가 그녀를 도와줍니다.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10)

우물 입구에는 우물을 보호하는 목적으로 큰 돌을 두어서 막아두었는데, 야곱은 그 돌을 혼자서 옮기고 양 떼에게 물을 먹입니다. 여기서 야곱과 우물에 있던 목자들과의 대조가 나타납니다. 아직 해가 높이 있기에 양들에게 물을 먹이고 풀을 뜯게 해야 했지만, 그곳 목자들은 우물을 막아둔 돌도 옮기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목자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움직입니다. 집을 떠나기 전의 야곱과는 뭔가 다른 모습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외삼촌’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원문을 그대로 말하면, ‘그의 어머니의 오빠’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합니다. 라헬이 어머니의 오빠인 라반의 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라헬이 야곱의 아내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28:2).

양들에게 물을 먹인 야곱은 그녀에게 입 맞추고 목 놓아 울며 자신의 정체를 밝혔습니다.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11-12) 입맞춤은 친척들 사이에서 나누는 특별한 인사입니다. 라헬을 만난 야곱은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외로움과 고생한 시간들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 알 수 없는 곳으로 왔고, 다행히 친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그 감정이 울음으로 나타납니다.

야곱이 아버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라헬은 즉시 달려가서 이 소식을 라반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라반은 야곱이 있는 우물로 달려옵니다. 라반은 옛날에도 이렇게 우물을 향해 달려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00년이라는 세월이 더 지났습니다. 이번에는 누이 리브가가 아니라, 딸 라헬로부터 소식을 듣고 달려갑니다.

그 때와 상황이 좀 다른 것이 있다면, 옛적에 아브라함의 종은 많은 재물과 함께 왔었지만, 지금 야곱은 거지와도 같은 신세입니다. 라반의 성품으로 짐작해봤을 때, 비록 야곱이 지금 가진 재물은 없지만, 집안의 일꾼으로 쓸 만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어찌되었든 라반은 야곱을 집으로 들였고, 그동안의 일을 모두 듣게 됩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함께 지내며,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섬기는 일을 합니다. 이제 두 번째 장면으로 전환되는데,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 라반에게 봉사하는 장면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거한 지 한 달이 지난 다음 라반이 야곱을 부릅니다. 비록 야곱이 자신의 조카이지만, 계속해서 대가없이 집안의 일을 시킬 수는 없으니 품삯을 정하자는 것입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15)

기다렸다는 듯이 야곱은 말합니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18)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에 라헬과 결혼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7년을 일하겠다고 말합니다. 삼촌이 라헬을 저에게 주신다면, 제가 삼촌을 위해 7년을 일하겠습니다.’

자신을 위해 남을 이용했던 야곱이 이제는 반대의 입장이 되었습니다. 당장의 만족에 눈이 멀어있던 에서, 늙어서 눈이 멀어있던 이삭, 사랑에 눈이 멀어있는 야곱, 이제 야곱이 속임을 당할 차례입니다.

당시 아내를 얻기 위해서는 3년에서 4년 정도의 품값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야곱은 두 배 정도를 더 내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라반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야곱을 이용합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7년 이라는 시간을 며칠 같이 여기며 라반을 섬기는 일을 합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섬기다’라는 단어가 7번이나 사용되면서(15, 18, 20, 25, 27×2, 30) 야곱이 라반을 위해 일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위해서 7년의 시간동안 외삼촌을 섬깁니다.

7년만 참으면 됩니다. 야곱은 이제 부모의 명령에 따라 라헬과 결혼하고 나서 하나님 말씀에 따라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뭔가 불안요소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라반에게 두 딸이 있다는 것입니다. 라헬에게는 레아라는 언니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뭔가 불안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형 에서와 동생 야곱 사이에 있었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기에 여기서도 언니 레아와 동생 라헬 사이에서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17절을 보면 이 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이 말씀을 보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뜬금없이 시력이 약하다니 무슨 말이지? 안경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여기 ‘약하다’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연하다, 부드럽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의역을 하는 성경은 이 구절을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웠다’ 혹은 ‘레아는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등으로 번역합니다. 이 단어가 외모를 표현하는 걸로 사용되어서 당시에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전체적인 뉘앙스로 이해했을 때 레아의 외모도 괜찮았지만, 라헬에 비하면 초라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사랑하는 라헬을 위해 7년을 봉사하며 기다립니다. 사랑에 빠지면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납니다. 야곱은 7년을 단지 며칠 같이 여겼고, 드디어 약속된 날이 되었습니다.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는 날이 된 것입니다.

이제 야곱의 장인이 된 라반은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어서 그의 딸을 야곱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딸이 라헬이 아닌 레아였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에게 온 여자를 당연히 라헬이라고 생각하고 하룻밤을 보냅니다. 요즘처럼 전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야곱은 잔치에 참여하면서 술에 취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보니 엉뚱한 사람이 옆에 있습니다. 야곱의 옆에 있는 사람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야곱의 입장에서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얼마나 황당한 일이며, 또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라반은 물론, 옆에 있는 레아까지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에 7년 동안 일하면서 이 날을 기다려왔습니다. 기다림 끝에 약속된 날이 되었고, 기쁨이 가득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그동안의 모든 노력과 기다림이 헛수고가 되었습니다.

화가 난 야곱이 라반에게 따져 묻습니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25)

야곱의 말을 보십시오. ‘나를 속이시면 어떡합니까?’ 야곱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하게 될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속이는 자 야곱이 속임을 당했습니다.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였던 야곱이 ‘어두운’ 밤에 속임을 당합니다. 자신이 했던 앞을 못 보는 눈을 속이는 방법으로 똑같이 당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라반이 대답합니다.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26-27) 라반은 언니가 결혼하기 전에 동생을 보낼 수 없다는 지역의 풍습을 말하며 야곱에게 7년을 더 일할 것을 요구합니다. 라반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그 지역의 풍습이 그러하다면, 라반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야곱에게 알렸어야 했습니다. 7년 동안 아무런 언급이 없다가 이제 와서 이런 관례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야곱의 항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야곱은 약자의 위치입니다. 쉽게 말하면 라반은 갑이고, 야곱은 을입니다. 갑의 횡포에 을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씁쓸하지만 야곱은 어쩔 수 없이 다시 7년 동안 라반을 위해 일하기로 합니다. 그것이 라헬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 일을 겪으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라반으로부터 속임을 당하면서 형, 에서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해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7년을 더 봉사하면서,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지 않는 아내라는 분열된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야곱의 가정에 또 다른 갈등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문을 살펴봤는데, 오늘 본문의 두 장면은 묘하게 창세기 이전 장면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우물에서 라헬을 만난 장면은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난 장면과 연결되어 있고, 야곱이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는 장면은 야곱이 이삭을 속이는 장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을 리브가에게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은 그와 동일하게 야곱을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라헬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죄를 심었습니다. 거짓을 심었고 속임을 심었습니다. 그래서 그 열매를 자신이 거두고 있습니다. 자신이 ‘동생’을 ‘형’으로 속인 것처럼, ‘형’을 ‘동생’으로 속임을 당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선하신 뜻 가운데 그의 백성을 훈련시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인도하셔서, 야곱의 입장에서 좋은 것을 주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입장에서 좋지 않은 것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야곱을 훈련하시며 선하신 뜻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 세 가지 교훈을 정리하면, 무엇이든 자신이 심은 것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은 그 선하신 뜻 가운데 자신의 백성을 훈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것을 심었을 때 선한 것을 거두게 하시지만, 악한 것을 심었을 때는 악한 것을 거두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그분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겁니다.

우리는 살면서 때로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교활하고 적대적이고 거짓말하고 경쟁적이고 인간적인 약점으로 가득한 사람과 함께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불평하기 전에 내가 이 상황에서 무엇을 심으면 좋을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기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서 나의 부족함 깨닫게 되고 나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잘못된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우리 주변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의 곁에 누가 그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떠오르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가족 중에 누군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의 배우자나 자녀일 수 있고, 부모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회사에서 모두가 싫어하는 누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그런 사람들이 나의 인격을 다듬어가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 중에는 누구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러한 역할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훈련시킨다고는 쉽게 생각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훈련시킨다고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기본적으로 나 중심적이며,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내가 내 주변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점검해보십시오. 지금 나는 무엇을 심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거두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고 계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좀 더 노력해야 하는 부분은 없을까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로서 나는 지금 무엇을 심어야 할까요?

변치 않는 진리는 우리는 우리가 심은 것을 거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는 내가 심은 것만 거두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심은 것만 거둔다면 우리 인생은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심은 것 중에 선한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심으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되셔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열매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심지도 않은 열매, 다 이해할 수 없는 열매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뿐만 아니라 은혜의 원리가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를 살피며 주의하며 수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닮으려고 노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연약하여서 넘어질 때마다 다시금 그분의 은혜에 기대여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설 명절을 보내면서 또 한 번의 새해를 맞았고, 2월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시금 새로운 마음으로 내가 무엇을 심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의지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