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본문: 누가복음 13장 31~35절
설교자: 조정의
지난 시간에 우리는 누가복음을 통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살펴보았습니다. 주인이 한 번 닫으면 절대 열리지 않는 그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영원히 누리는 잔치에 참여하라는 주인의 간절한 경고였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문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운명을 지금 당장 피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간절한 부르심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솝우화나 그림동화 같은 아이들이 보는 이야기책에는 동물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사자, 토끼, 여우, 늑대, 양, 염소 등 다양한 동물이 사람처럼 서로 싸우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동화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인생의 깊은 교훈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어른들이 동화를 읽으며 감동하거나 어린이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서 우리는 동화책에 나올 것 같은 동물들을 만납니다. 여우가 등장하고, 암탉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암탉의 새끼인 병아리들이 등장합니다. 여우의 위협에도 병아리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는 암탉의 이야기입니다. 병아리들이 어미 닭의 그 사랑을 마침내 깨닫게 될까요? 그것이 이야기가 던지는 마지막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역사입니다. 실화입니다.
교활하고 사악한 여우는 갈릴리 지역을 담당하던 분봉 왕 헤롯을(31-32), 인자하고 사랑 많은 엄마 닭은 “나”라고 직접 밝히신 예수님을(32-34), 외부의 공격에 대항할 힘이 하나도 없는 연약한 병아리들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수도 “예루살렘”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루살렘이 대표하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가리킵니다(34-35).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헤롯왕의 협박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자기 백성을 품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사랑을 마침내 깨닫게 될까요? 그것이 예수님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입니다.
1. 여우(31-32a)
먼저 여우를 만나봅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었고 가는 길마다 여러 마을과 동네를 거치며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눅 13:22).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하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마을들을 두루 다니며 곳곳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고쳐 주었습니다(눅 9:6). 이 소문은 갈릴리를 통치하던 왕 헤롯 안디바에게 들렸고 그는 당황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네가 죽인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네가 죽인 요한이 옛 예언자 중 한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헤롯은 “내가 분명히 요한을 죽였는데, 저 사람은 누구인가?”하고 예수를 만나고 싶어했습니다(눅 9:7-9).
분봉 왕 헤롯 안디바의 아버지는 헤롯 대왕으로,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베들레헴에 태어날 유대인의 왕이 누구인가?”하고 예수를 만나고 싶어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왜 만나고 싶어 했을까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아래 아기를 다 죽이라고 명한 것을 보면 그 이유가 명확해집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디바 역시 같은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능력과 권능으로 많은 추종자들을 만드는 무서운 세력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몇 바리새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예수님께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31절)
이 바리새인들의 동기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안전을 염려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자라고 생각했고(눅 5:21) 죄인의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눅 5:30).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했으며(눅 6:7)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나면 거세게 달려들었습니다(11:53).
보통 유대인인 바리새인은 반은 에돔의 자손, 반은 사마리아인인 헤롯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미워하고 없애려고 하는 일에는 바리새인과 헤롯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에 바리새인과 헤롯의 영향이 작용한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헤롯의 권력을 이용하여 당장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예수님이 가르침과 사역을 멈추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헤롯에게 가서 그대로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헤롯을 교활하고 해로우며 아무 쓸모없는 인간의 상징인 “여우”에 비유하면서 말입니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32절a)
농장에서 여우는 병아리처럼 연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동물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잡아먹으려고 했던 많은 여우를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을 430년이나 노예로 부려먹고 약속의 땅으로 보내지 않으려 했던 완악하고 잔인한 바로가 다스리고 있던 나라입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민족을 강제로 섞어서 완전히 파멸시킨 나라입니다. 바벨론은 남유다를 침몰시킨 나라입니다. 페르시아, 그리스, 예수님 시대의 로마까지 병아리같이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을 삼키려는 여우들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영적인 영역으로 확장시켜 보면, 마귀와 그 무리들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하나님 나라 백성을 계속해서 죄와 사망으로 삼키려는 존재입니다. 이 막강한 권력과 교활한 야욕과 잔인한 손길에서 병아리같이 힘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누가 보호할 수 있을까요?
2. 어미 닭(32a~34)
예수님은 여우 헤롯에게 이렇게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32-33절)
이것은 다시 말하면, 나는 계속해서 내가 하던 일을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히 2:10; 5:9)이라고 제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 9:22)
예수님은 이 일의 기약이 차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눅 9:51). 하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죽으실 날이 아닙니다. 제 삼일에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까지 오늘과 내일은 계속해서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실 것입니다. 귀신들린 백성을 고치시고 병든 백성을 고치실 것입니다. 자신이 잡혀서 죽임 당하는 날이 올 지라도 오늘과 내일은 자신의 백성을 품으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어미닭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아버지가 정하신 그 날이 오기 전까지, 오늘과 내일과 모레 계속해서 예수님은 갈 길을 가야 합니다. 가시는 곳곳마다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실 것입니다. “흩어져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이리저리 헤매지 말고 그 길에서 돌이켜 나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의 위협에 겁먹지 말고 이 모든 원수의 나라를 평정할 하나님의 나라에 백성이 되라”고 요구하십니다. “나에게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기쁨과 즐거움은 “나에게 피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어떻게 영원히 기뻐 외치고 영원히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강성한 나라들도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이 땅의 나라는 질병에 제약이 있고 악한 귀신이 살아서 역사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질병도 없고 악한 귀신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하나님의 나라를 완벽하게 통제합니다.
어떻게 그 나라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매 맞고 심문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제삼 일에 다시 살아나사 승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는 예수 안으로 피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대신하여 죽고 부활하여 새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실 것입니다. 그 하늘나라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수많은 병을 고치고 악한 세력을 쫓아내시며 자기 백성들을 모으고 계십니다.
헤롯이 위협하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온통 자기 백성들 생각뿐입니다. 아버지가 정하신 그 날이 아직 되지 않았으니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백성들을 내 품으로 모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식을 품으려는 어미의 마음을 자녀들은 알고 있을까요?
3. 병아리들(34~35)
예수님은 33절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33). 사실 선지자들 가운데 예루살렘 밖에서 죽은 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죽은 장소가 어디인지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선지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영적, 정치적 수도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이 참 많이 죽었습니다.
여호야김이 예루살렘에서 선지자 우리야를 죽였고(렘 26:20-23), 요아스 왕이 통치할 때 여호야다의 아들 제사장 스가랴가 예루살렘에서 죽었습니다(대하 24:20-22).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감금당했고(렘 38:4-6), 므낫세 왕이 다스릴 때 성경은 그가 무지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에 가득했다고 말하고(대하 21:16), 전승은 므낫세 왕이 “선지자조차 용서하지 않았고 매일 그들 중 일부를 학살하여 예루살렘이 피로 넘치게 했다”고 말합니다. 또 전승에 따르면 선지자 이사야도 하나님의 도시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죽임당하기 직전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 7:52-53)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보내신 선지자를 백성이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에서 직접 죽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기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보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 하나님의 백성은 그 아들까지 예루살렘에서 잡아 죽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렇게 부르짖으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34절)
두 가지 대조되는 커다란 의지가 드러납니다. 자녀를 모으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지와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자녀의 의지입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를 내 품 안으로 모으려 했는지 아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애굽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고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듯이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출 19:4; 신 32:11).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사랑의 율법을 쓰시는 동안 금으로 황소를 만들고 이 소가 우리를 인도했다고 말하며 섬겼습니다(출 32).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해야 하건만(시 17:8; 57:1; 61:4; 63:7; 91:4) 그들은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렘 2:13; 17:13).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 이스라엘은 자기 어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사 1:3).
하나님은 선지자 에스겔의 입술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아무도 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는 이런 동일한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내 품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면서(엡 2:3) “이 세상에서 맞는 슬픔과 고통에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하고 죽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죽고 나서 영원한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될 불쌍한 내 자녀들아. 내 날개 아래 피하라! 내가 너희를 살릴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참된 삶을 줄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다. 너희가 돌아올 곳은 오직 내 품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이 사랑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까요? 35절에 예수님은 그들에 대한 예언을 하십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라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35절)
황폐한 집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빠져나간 성전을 가리킬 때 사용된 표현입니다(렘 12:7; 22:5).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이제 곧 예수님께서 그들 곁에서 빠져나가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전의 말씀에서 주인이 문을 닫겠다는 말과 유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회의 문이 닫힐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그 문이 닫히기 전에 회개하라는 사랑의 외침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라”라는 고백은 시편 118편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시편 118편에는 이런 말씀도 있는데 바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버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왕을 마침내 알아본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 찬송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 언제 이런 고백이 나올까요? 계시록 1장 7절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그들의 손으로 죽인 예수께서 하늘의 보좌를 가지고 구름을 타고 이 땅에 다시 오실 그 날,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라”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예언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품으려는 성자 하나님을 끝내 원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의 성에서 자신들을 계속해서 품으려고 한 사랑의 주님을 죽일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결말입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보내신 무수히 많은 사랑의 전령자들을 죽이고, 이제는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사랑과 정의를 선포하셨는데 그 하나님을 그들이 직접 죽였다는 것 말입니다.
이 동화와 같은 실화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참된 진리를 전파합니다. 우리 영혼을 위협하는 간교한 존재가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밤낮으로 참소합니다. 마귀의 지배 아래 세상은 온갖 악한 것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 옛 자아가 그것에 쉽게 빠져듭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랑의 음성으로 그분의 품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사랑과 함께 기쁨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도 이타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의 팔을 벌려 우리에게 그 안으로 들어오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참 어리석은 병아리들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내 욕심이 추구하는 대로 내 생각이 주장하는 대로 살기 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주님의 품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어리석게 사랑의 주님을 부정하고 내 마음에서, 내 삶에서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주의 백성이 되지 못하신 분들은 주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분의 품은 넓고 넓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관계없이 당신을 받아주실 수 있습니다. 과거에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든지 얼마나 멀리 그분을 떠났든지 그분의 은혜는 훨씬 더 커서 그 모든 죄와 허물을 덮고도 남습니다. 주님께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주의 백성인 우리들, 주님의 품으로 돌아갑시다. 처음 구원받았을 때 주님이면 충분하다고 고백하던 우리가 어느 새 마음속에 다른 것으로 채우는 우리를 보게 됩니다.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가 우리를 찾아옵니다. 세상의 것과 내 욕심으로 채우는 삶을 버리고 다시 주님께 돌아갑시다.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내 마음의 우상을 처단하고 우리의 영원한 사랑의 주님의 품으로 돌아갑시다. 그분만큼 우리를 아시고, 위하시고, 사랑하신 분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분이 다른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내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얻을 곧은 오직 우리 구주 예수님의 품 안입니다.